[편집자 주: 조직률이 10% 미만인 한국 사회에서 노동조합을 경험한 사람들은 10% 안에 드는 사람이다. 긴 인생에서 한순간을 차지했거나, 인생의 동반자로 살아온 노동조합은 각자의 삶에서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의 운동을 버텨내게 해 줄 지지대를 꿈꾸는 ‘지역사회 노동자운동 지지모임’은 각자의 삶에서 노동조합은 어떤 모습일지 조명해보고, 의미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저는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합니다. 알바 노동자에게는 식대가 지급되지 않습니다. 폐기만을 먹으며 9시간 동안 알바를 합니다. 아침과 점심 식사는 잠을 자느라 거릅니다. 하루에 두 끼의 단식이 저절로 됩니다. 야간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까지, 폐기만 먹을 수밖에 없지 않아도 되는 날까지, 함께합시다. 비록 완전한 단식은 하지 않지만, 조금이나마 힘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SNS에 올라온 한 장의 사진 속 그녀는 최저임금 1만 원을 향한 단식에 하루 동조한다는 글을 올렸다. 그녀가 알바노조 조합원이란 사실을 알게 된 나는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 처음 그녀를 만난 날, 그녀는 내게 A4용지 한 장을 건네주며 이름은 박혜인이지만 자신의 필명을 불러달라고 했다. 그녀의 필명은 마른 붓이란 뜻을 가진 ‘갈필(渴筆)’이었고, 스스럼없이 자신을 시인이라 소개했다.
A4용지로 만든 ‘한 장짜리 시집’에는 「절념(竊念)」, 「마지막 시」, 「봄날은 올까」, 「세 가지 위법」 4편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시인 갈필은 ‘한 장짜리 시집’을 냄으로써 당당히 문학계에 등단한 것이다.
자신을 시인이라 소개한 뻔뻔스러울 만큼 당돌한 그녀에게 정말 시인이 맞느냐고 나는 물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시를 생각한다면 그는 분명히 시인이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그런 사람이다” 눈을 뜨면 종일 시를 생각하며 시를 썼고, 언젠가는 시인이 될 거라 확신하고 있다고 말한다. 꼴랑 50원 들여서 만든 ‘한 장짜리 시집’으로 그녀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보수적인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지만, 한 번도 대구를 떠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내가 보수적인가?’라는 의문을 품기도 했다는 이십대 알바노동자이자 시인인 박혜인 씨. 그는 아버지를 자신의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꼽는다.
아버지는 건축가였지만, IMF 경제위기로 실직한 후 아파트관리사무소 일을 하고 있다. 딸이 바라본 아버지는 정의롭고 강직한 성품을 가진 분이라 늘 존경했다고 한다. 20대 청년의 삶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 아버지인 것은 조금 의아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며 박혜인 씨가 아버지 성품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어릴 적 문학을 하고 싶었지만,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아 고등학교 때 이과를 지망하고 대학은 공대를 가게 된 그녀의 별칭은 ‘공자’(은근히 공대 자부심)다. 그녀는 22살에 문학 교양수업을 신청해 들었다. 진보적인 교수의 수업이라 약간 기대도 됐고, 문학세계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을법했다. 그러나 그 일은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는데 아주 큰 사건이 됐다.
성적입력 기간 마지막 날 전화벨이 울렸다. 교수의 전화였다. 교수는 수업을 함께 듣는 한 학생이 ‘견습공무원’이 되고 싶은데 성적이 B+이라서 미달이란다. A-인 혜인 씨 학점과 B+인 학생 성적을 교환하면 어떻겠냐는 게 용건이었다. 처음에는 교수의 부탁을 거절했다. 그런데 교수는 성적을 바꿔주면 큰 선물을 주겠다며 집요하게 설득했다.
교수는 혜인 씨가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했지만, 다시 성적을 안 바꿔주면 어쩔 수 없이 수업을 들은 모든 학생의 학점을 세 단계 낮출 수밖에 없다고 했다. 혜인 씨는 나 때문에 다른 이에게 피해가 될까 봐 그만 바꾸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만 해도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는데, 얼마 후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날로부터 끙끙 앓아누웠다.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불공정한 일에 저항하지 못한 자신이 미웠고, 자괴감에 빠졌다. 아프고 나니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교수에게 연락했다. “교수님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하지 마세요”라고 충고했다. 갑작스런 혜인 씨의 충고를 받은 교수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교수는 다시 성적을 바꿔주겠다고 했고, 성적은 원위치로 돌려졌다. 하지만 학교당국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교수는 학교에 경위서를 제출하는 수준에서 사건이 마무리됐다. 교수는 혜인 씨에게 사과했다. 그 사과가 어떤 의미인지는 해석하기 어렵지만, 사과를 받고서야 충격에 빠졌던 혜인 씨 감정도 조금 추슬러졌다.
이 사건은 문학 공부를 하고 싶었던 혜인 씨에게 확신을 심어준 계기가 됐다. 앞으로 불의에 저항해야겠다는 생각은 점점 더 선명해졌고,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공대를 그만두었고, 집으로부터 원조를 기대할 수 없었다. 생활비를 손 내밀 수가 없었다. 돈은 벌어야 했고, 낮에 일하면 시 창작을 위한 공부와 습작을 마음껏 하지 못할 것 같아 야간 일자리를 알아봤다.
마땅한 것은 편의점 야간알바밖에 없었다. 밤 10시부터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밤새 일한다. 손님은 5분 간격으로 들어올 때가 많아 꾸벅꾸벅 졸면서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기도 한다. 야간에 일하다 보니 취객으로부터 폭언을 들을 일도 많아 스트레스가 있지만, 아침에 퇴근하면 오전에 푹 잔다. 오후에는 문학 창작수업도 듣고, 교양세미나, 독서를 할 수 있어서 그럭저럭 참을 만하다.
간혹 편의점에 취한 채로 들어와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며 난동을 피우는 손님도 있다. 그럴 때면 친절한 경찰 112로 신고해서 도움을 받는다. 경찰이 올 때까지 계속되는 폭언과 폭력에 노출될 때가 있어서 불안한 야간알바지만, 처음보다는 대처하는 요령이 많이 늘었다. 아버지가 한 번씩 새벽에 딸이 일하는 편의점을 찾아 함께 밤을 새울 때도 있었다.
최근 박혜인 씨의 계획은 아버지를 설득해 노동조합에 가입시키는 것이다. 혜인 씨는 야간알바를 하면서 인터넷으로 알바노조를 알았다. 누구도 가입을 권한 사람은 없었다. 스스로 인터넷으로 가입했다. 편의점 야간알바를 하면서 야간수당도 못 받고, 주휴수당도 없이 그야말로 오로지 최저임금이 전부인 야간알바의 현실이 노조에 가입한다고 당장 바뀔 것이라는 기대를 한 것은 아니다.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호프는 “하루 세 시간만 일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고 했다. 나도 세 시간만 일하고 생활할 수 있다면 야간근무를 하지 않을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나는 야간근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 하루 세 시간만 일해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꾸면서 지금을 살아간다. 그중 하나가 알바노조 활동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세상을 바꾸는 공부도 하고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지켜내는 것, 이것이 자신의 투쟁이라고 혜인 씨는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과 투쟁의 방식을 일치시키자”
혜인 씨에게 노동조합은 시와 삶이 같이 가야 할 평생친구다. 알바노조는 최저임금 일만 원을 향해 투쟁하고 있다. [최저임금 일만원]은 혜인 씨 같은 알바 노동자뿐만 아니라 사회를 살아가는 노동자 모두에게 해당하는 임금이다. 특히, 청소년, 노인, 여성 등 사회 취약계층, 밑바닥 노동에 노출된 사람들에게 사회가 제시해준 최저기준이다. 혜인 씨 마음속에는 사회가 지켜야 할 기준을 높이는 운동을 하는 곳이 바로 알바노조라는 자부심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시를 쓰는 것도, 시로 소통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것도 혜인 씨에게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