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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12.3 윤석열 내란 사태’로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무도한 자에게 권력을 내어주었을 때 국가시스템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처절한 경험을 하며, 대한민국은 다시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21세기의 민주주의는 형형색색, 각양각색의 응원봉처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뉴스민>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에서 응원봉을 든 그들, ‘민주주의자’들을 만나고, 기록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12월 3일부터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14일까지 대구 CGV한일극장 앞에선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무대가 세워졌다. 광장을 연 것은 시민이지만 무대를 세운 건 윤석열퇴진 대구시국회의(대구시국회의)다. 이들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토요일 집회를 이어갈 예정이다.
탄핵 이후의 사회에 대한 고민은 이제 출발점에 섰다. 윤석열 대통령이 퇴진한다고 해서 시민들의 삶이 저절로 나아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10여 일간 대구에서 열린 윤석열 탄핵 집회에는 많은 여성, 소수자, 장애인, 노동자가 참석했다. 무대를 세운 이들은 가시화된 이들이 던진 의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윤석열 탄핵 정국에 특히 주목 받은 건 ‘여성들’이다. 여성단체는 주목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라고 평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이번 정국의 핵심이 됐다는 건 분명하다. 특히 대구에선 ‘TK의 딸’이 주요한 구호로 작용했다. 지금도 여전히 가사노동 분담률, 가족관계 만족도 모두 전국 꼴찌인 대구의 상황이 반영된 현상일 테다.
앞으로의 집회에선 좀 더 구체적인 구호가 나올 예정이다. 대구시국회의는 ‘윤석열 퇴진’과 함께 ‘윤석열 퇴진 이후 우리의 삶’을 말하는 목소리를 받기 위해 고민 중이다. 김예민 대구여성회 대표에게 지난 집회에 대한 회고,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12월 3일 밤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몸이 안 좋아서 일찍 퇴근한 날이었다. 한잠 자고 일어났더니 대구여성회 단체카카오톡방에 카톡이 쌓여 있었다. ‘비상계엄이라니 말이 안 된다’ 싶어 곧바로 TV를 트니 뉴스에도 나오고 있었다. ‘전쟁이 났다. 그렇지 않고선 비상계엄을 선포할 리 없다’ 싶었는데, 전쟁 소식은 없었다. 우리 단체 활동가 중 한 명이 마침 서울 마포에 있어서 국회로 뛰어간다는 연락을 받곤 실감이 확 났다. 이제부터 바빠질 테니 아프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상계엄 선포 다음 날부터 매일 집회가 열렸다.
대구에서 집회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은 말이 잘 통하는 사람들이다. 여성 단체, 장애인 단체 등에서 문제가 제기되면 함께 논의한다.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집회에서 빅뱅의 ‘뱅뱅뱅’ 노래를 거르지 못하고 트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외부에서 ‘빅뱅 멤버 승리의 버닝썬 게이트 문제는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빅뱅 노래를 트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피드백이 와서 바로 반영했다. 민중가수 백자의 노래를 트는 것도 마찬가지다. 김건희 여사를 풍자하면서 여성혐오에 기반한 노래를 썼고, 이에 대해 민주노총 여성위원회와 여성단체들이 비판하는 성명을 냈으나 아직도 공식적으로 사과한 적은 없다. “다른 신나는 노래가 많으니 굳이 문제 될 만한 노래는 안 트는 게 어떻냐”고 제안했고, 금방 합의됐다. 연령대도 젊은 편이다. 결정하는 집행위원장들이 40대 초반, 그 밑의 실무자들이 30대이기 때문에 비교적 유연하고 젊게 집회를 꾸려나갈 수 있었다.
-매일 집회에 수어통역사가 섭외된 것도 인상 깊었다.
2016년 박근혜 탄핵 정국의 집회에서도 주최 측이 수어통역사를 섭외했다. 아마 그때가 최초일 것이다. 장애인을 위한 경사로를 설치하고, 발언 시 주의사항도 공유됐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금방 원래대로 돌아갔다.
수어통역사는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다. 사실 집회 현장에선 조금만 뒤에 앉아도 수어통역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거다. 진행자가 수어통역사를 소개하고 우리가 지금 수어통역을 하고 있다고 안내함으로써 대중에게 다양한 구성원이 함께 있다는 걸 인식시키는 게 중요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자유발언을 위해 무대에 올라 ‘최애야, 살기 좋은 세상 만들어 줄게’라고 말한 성소수자 시민이 인상 깊었다. 발언을 들으며 울컥했다. ‘내 최애의 행복을 기원하고, 그에게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주고 싶다’는 말을 들으며 ‘이게 여기 나온 사람들의 마음이겠구나’ 싶었다.
‘그들’과 너무 비교되지 않나. 권력 유지와 정권 창출을 위해 헌법을 부정하는 그들, 나라를 위하는 척하지만 배지를 유지하기 위해 움직이는 국회의원들과 대조되게 시민들은 내 옆의 사람,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칼바람 맞고 있었다. 함께 구호를 외치는 시민들의 얼굴도, 발언자의 목소리도 아직 생생하다. 나는 정치도 그런 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 참가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여성단체 입장에선 기회 아닌가.
지난주 탄핵소추안 가결까지의 국면에선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일단은 굉장히 뾰족하게 탄핵 가결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했다. 탄핵안 가결이 갖는 의미 자체가 셌기 때문에 다른 이슈들은 그다음에야 볼 수 있는 문제라고 봤다.
사실 여성계에선 집회에 여성들이 많이 나오는 게 이례적이지 않다는 측면도 있다. 그들을 주목하는 게 오히려 이례적이다. 다만 14일 집회를 앞두고는 이미 탄핵안 가결이 기정사실화되던 분위기였고, 그렇다면 ‘탄핵 이후 우리가 바라는 세상에 대해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자’는 이야길 나눴다. 실제 14일 여성 청년인 최유리 대구청년연대은행 디딤 이사장이 마지막 발언을 했다.
-14일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고 매일 열리던 집회가 토요일 집회로 전환됐다.
곧바로 다음날인 일요일 대구여성회 이사회가 있었고 월요일에는 기자회견과 고용노동청 현장점검이 있었다. 다시 매일매일 급한 일정을 쳐내는 하루살이로 살고 있다.
이젠 조금 여유가 생겼으니 토요일 집회에서 우리 존재감을 어떻게 드러낼지 고민 중이다.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탄핵 정국은 시민단체 입장에서 대목이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서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 너나 할 것 없이 두들겨 맞았지 않았나. 대구여성회만 해도 20년 넘게 운영한 고용평등실이 폐지되면서 타격을 입었다. 물론 긴급상황이지만 탄핵집회는 광장 속에서 시민단체의 존재 이유를 시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곳이다. 아무리 힘들고 바빠도, 일상 업무가 몰려와도 이게 먼저라 생각하고 있다.
-박근혜 탄핵의 교훈일까. 다들 ‘지금부터 탄핵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있는 것 같다.
아마 다들 비슷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전과 같아선 안 된다. 대통령 하나 바꿨다고 우리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문재인 정권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한 걸음 나아간 건 언제든 후퇴할 수 있고, 심지어 후퇴하는 속도는 너무 빠르다.
특히 대구여성회는 탄핵 이후를 준비하는 걸 시급한 문제라 보고 있다. 대구여성인권센터, 대구여성장애인연대, 대구여성노동자회같이 지역의 다른 여성단체들은 대체로 사업대상이 분명하다. 반면 대구여성회는 태생적으로 성평등 확대, 페미니즘 인식 저변 확대 같이 대중 사업을 중심에 두고 있다. 그래서 지금 집회에 10~30대 여성이 나오는 현상에 주목하고 이들과 어떻게 네트워킹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쉽진 않다. 집회에 나오더라도 대중은 시민단체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 직장에서 성희롱을 겪거나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자가 되는 등 자기 삶에 필요해지면 그때 찾아온다. 그 외에 단체에서 내가 뭔가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잘 못한다. 집회에 많은 여성이 있지만 내가 깃발을 든 단체와 무언갈 같이 할 수 있다는 생각까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이가 대부분이라는 거다. 단체의 과제는 이들을 조직해 내고, 그들의 요구나 필요에 맞게 활동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미 박근혜 탄핵 광장에, 혜화역 시위에 무수히 많은 여성이 나왔지만 그들은 기존의 시민운동으로 흡수되지 않았다.
페미니즘 리부트가 있었지만 그들은 대체로 개인화되어 있었고 마스크를 쓴 채 철저히 익명성을 얘기했다. 조직화되어서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고 공통된 목소리를 내고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게 더 이상 이 세대에 맞지 않는 게 된 것 같다. 서로 다른 응원봉을 들고 같은 노래를 부를 수는 있지만 똑같은 응원봉을 들고 싶지 않은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래서 대구여성회가 주목하고 있는 건 성평등 정치다. 여전히 국회의원 가운데 여성 비율은 20%뿐이다. 광장에 수많은 20·30 여성이 나와 탄핵안을 가결시켰지만 결국 그 권력을 쥔 대부분의 얼굴은 50~60대 남성이다. ‘이 간극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투표나 정책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의 문제다.
-대구 집회에선 ‘TK의 딸’이라는 피켓이 많았다.
변화의 조짐이다. ‘TK의 딸들에 의해 TK 콘크리트가 무너질 것이다’라는 구호가 단순히 텍스트로만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TK 지역에 투표 변화가 있다면 2030 여성들로부터 시작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흐름을 잘 끌고 가면 2026년 지방선거 결과로 나타날 텐데, 문제는 ‘정치권이 그 선택지를 얼마나 내놓을 것인가’다.
-또 하나 궁금한 지점은 ‘이대남(20대 남성)’이다. 집회 현장에서 10~30대 남성은 비교적 수가 적었다. 개인적으로 어떻게 보는가.
20·30 남성은 과도한 가부장적 책임을 느끼는 것 같다. 20·30 여성들이 나와서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것에 대해 자기 자리를 뺏겼다거나 권위를 잃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정치는 오래전부터 남성의 영역이었다. 일자리 경쟁, 군대 문제와 유사한 흐름이다. 전체 파이를 넓혀가면 되는데 ‘탄핵 정국에서도 우리가 밀리네’라고 생각하면서 손쉽게 여성을 공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안타까운 건 여성, 남성 모두 손을 내미는 이가 없다는 점이다. 십여 년 전에는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서로에 대한 혐오가 적을 때, 여성들이 살해 위협까지 느끼지 않을 때 정치나 문화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혀야 했는데 지금은 너무 멀리 온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같이 하자고 얘기해야 한다.
-단체 입장에선 이제부터 열리는 토요일 집회가 중요하겠다.
‘집회에 나오는 개별화된 대중을 어떻게 엮어낼 것인가’에 대해 노동·여성·장애인·정치 등 단위마다 고민이 있을 것이다. 참가자들도 마찬가지다. ‘민주노총 멋있다. 나는 노동 문제에 관심이 생기네’라고 생각하거나 ‘20·30 여성이 많네. 왜지? 나는 여성단체에 관심이 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정치에 관심이 생길 수도 있다. 각자 단체가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전제하에 시민들이 예쁘게 봐줬으면 좋겠다.
대구여성회 입장에선 조직 확대 측면의 고민이 있다. 우린 페미니즘 리부트 때도 여성들을 엮어내지 못했다. 여성운동 전반의 문제이기도 한데, 대중과의 간극을 좁히지 못했기 때문이라 본다. 책 ‘82년생 김지영’에 수많은 대중 여성이 분노했지만 여성단체는 그 요구와 수준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린 이걸 수십 년 말했다’ 혹은 ‘그보다 심각한, 예를 들면 가정 내 성폭력 같은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다. 여기서부터 반성하고 그들의 요구에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단체 회원, 이사진, 구성원 모두 나이가 많기 때문에 새로운 세대가 와서 새로운 운동을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예전부터 있었다. 그동안은 정신없이 집회 일정이 몰아쳤기 때문에 깃발을 들고 나가서 참여하는 정도였지만 이번 주 토요일 집회부턴 단체 홍보를 해보려 한다. ‘우리가 여기에 있다, 여기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걸 알리는 방법에 대해 고민 중이다.
개인적으론 마이크를 여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 중이다. 지금 집회 사회를 대구시국회의에서 실무를 책임지는 나, 박석준, 이정아 셋이 돌아가면서 보고 있다. 소위 말하는 운동권 출신이고 각자 단체에서 결정권이 있는 사람들이다. 집회 사회를 본 경험이 많으니 실수가 적고 안정적이다.
하지만 이제부턴 다음 시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만큼 다음 세대에 기회를 열어줘야 한다. 책임자 아래 실무자들은 집회 주요 참석자인 10~30대와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니, 그들에겐 집회에 참석한 이들이 자기 자신이다. 서울 집회 현장을 보면서 세대를 넘길 필요성을 더 크게 느낀다. 서울에선 ‘가결됐습니다’라고 국회에서 발표하자마자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틀었다. ‘헌재로 가자’ 구호를 외치곤 에스파의 ‘넥스트 레벨’을 틀었다. 우린 ‘케이팝도 좋지만 세대를 아울러서 민중가요도 틀어야지 않을까’ 싶어서 다 같이 민중가요를 배웠다. 물론 그것도 필요하지만 여전히 나 스스로 꼰대스럽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여러 측면에서 사람을 바꾸고 자리를 더 넓히는 것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다.
김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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