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입시 광풍과 작은 사회의 끔찍한 혼종이 낳은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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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소년, 낯설은 신세계와 만나다

한적한 시골길에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간다. 전원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한창 올라가는 중이다. 수도권 신도시 개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윽고 아담한 초등학교에 차가 서자 엄마와 아이가 내린다. 기준이네 가족은 농어촌 특별전형을 대비해 대도시에서 위장전입을 감행했다. 특별전형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아빠는 도시에 남겨둔 채 모자 둘만 이사와 전학 수속에 여념이 없다.

엄마의 철두철미한 준비 덕분에 기준은 순조롭게 모든 과정을 마친다. 시골 학교 아이들과 확연히 뭔가 달라도 다른 기준의 적응을 돕기 위해 엄마는 이것저것 신경을 쓴다. 현대판 ‘맹모삼천지교’라 해도 어색할 것 없을 정도다. 동네 부녀회에 가입하고, 생면부지 상황에서 기준이 친구를 사귀도록 독려한다. 물론 아이에게 도움이 될 만한지 선별해서다. 반장인 석호 같은 부류가 우선 접근대상이다. 결손가정으로 형제가 단둘이 지내는 영준 같은 경우는 기준의 엄마로선 그리 탐탁할 리 없다.

하지만 영준의 형인 중학생 영문은 이 마을 아이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존재다. 기준은 두려움과 선망이 복합된 감정으로 영문을 바라본다. 초반에 서먹했던 영준과 관계도 영문을 통해 가까워지고, 기준은 그런 관계를 통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 적응은 엄마가 바라는 것과는 무척이나 다른 형태로 흘러간다. 기준은 영문을 동경하기 시작한다. 작은 시골 동네에서 영문이 갖는 영향력은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이제 기준은 엄마가 소망하는 대로 착실한 모범생이 아닌, 절대권력을 향한 위태로운 아우토반에 들어선다.

평범한 기대를 끊임없이 반역해온 감독의 주목할 만한 행보

매년 전국 수십 곳의 대학 영화학과에서 졸업생이 배출된다. 절대다수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연출작품을 남기려는 열망으로 가득하다. 즉 ‘감독’으로 데뷔하는 게 지상과제다. 극장에 개봉하는 상업 장편영화를 통해 이른바 ‘입봉’까지는 언감생심일지언정, 자기 영화를 만들고픈 건 당연한 일이다. 극장에 걸려 대중과 만나진 못하더라도, 자기 혼자 보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이는 없다. 누구나 기왕이면 하나라도 더 많은 관객에게 공개되고, 대중적 평가를 받고 싶은 건 이심전심이다. 상당수 감독 지망생은 끝내 그 단계에 들어서지 못한 채 꿈을 접고 만다.

그 좁디좁은 문을 통과한다는 것, 그리고 소수의 인정일지라도 대표작이라 공인할 작품이 있다는 건 변방의 비주류 영화감독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큰 축복일 테다. 그런 측면에서 장병기 감독에게 <맥북이면 다 되지요>는 본인의 이름을 독립영화판에 널리 알린 일등공신이다. 여기에서 획득한 유무형의 실적과 평가가 감독에겐 현재까지 이어지는 창작활동 판돈이 되어준 셈이다. 그야말로 ‘시작의 영화’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감독의 작가적 지향을 오판하게 만드는 주범이 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양날의 칼’이 된 것이다.

감독은 후속작들에서 (블랙) 코미디로 통용된 성공작 이면에 감춰진 현미경 렌즈 배율을 끊임없이 확대해 왔다. 중편과 장편을 넘나드는 차기작, <할머니의 외출>과 <미스터 장>은 전작의 코믹 양념을 덜어내고 19세기 말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 전통을 구현하는 본색이 점점 짙어졌다. 유머를 촉발하기보다는, 신랄한 풍자와 냉소를 조성해가며 일그러진 세상의 단면을 화면에 풍경화로 구현하고자 했다. 일관된 작가적 지향을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견지한 측면은 주목받아 마땅한 도전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한 번 머릿속에 붙박이로 고정된 선입견은 힘이 세다. 마치 송능한 감독의 걸작 <넘버3>에 환호하던 대중이 후속작 <세기말>은 외면한 것처럼, 개그가 사라진 자리에 싸늘한 관찰로 채워진 후속작들에 관객과 평단은 냉혹했다. 대중적 코드가 의도적으로 거세된 빈자리엔 동정 없는 각박한 현실의 거울반영이 들어찼다. 먹고살기 힘든 세상살이 극장에서라도 힐링을 보고 싶은 이들은 후속작을 환대하지 않았다. 그런 반응에 실망할 법도 한데, 감독은 묵묵히 작업을 이어갔다.

교육현장과 계급재생산의 상관관계

좌절의 연속 가운데에도 지난 몇 년간 중단 없이 감독의 도전은 계속된다. 그 숙성의 과정은 마침내 감독이 보여주고자 했던, 물론 대중은 그리 내키지 않는 세계의 풍경을 1차 완성하는 단계에 도달하고 만다. 자신의 청소년기 경험담을 절치부심한 시나리오로 확장한 신작 <여름이 지나가면>은 대학입시를 위한 편법이 초래한 끔찍한 결말을 통해 세상의 무정함을 극대화한 풍경으로 이끈다. 영화는 결말까지 화해와 희망의 기대를 거두지 않던 이들의 안일함을 사뿐히 짓밟고 나아간다.

그 시초에는 ‘모든 길은 대학입시로 통하는’ 현대 한국사회의 파산한 교육 광풍이 자리하고 있다. 막대한 사회적 낭비를 연료 삼아 공회전을 거듭하는 이 톱니바퀴는 어떤 교육개혁도 무의미하게 만드는 괴력을 가졌다. 온 가족의 삶이 오직 자녀 대입을 위해 통째로 봉헌된다. 기준의 엄마는 아무런 의구심 없이 확신에 차 있다. 다 아이를 위해서란 믿음은 종교적인 수준이다. 민주 시민교육, 자아실현과 전인교육 같은 건 구호로 그친다. 누구나 대학입시 경쟁을 통해 획득한 ‘학벌’이 한국 사회 계급 재생산의 1차 관문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으랴.

그렇게 ‘괴물’이 된 한국 교육은 그 실체적 진실을 바꾸기 전에는 어떤 좋은 취지와 제도도 일그러지고 왜곡되게 만들어버린다. 수많은 대안과 개혁안이 나왔음에도 하나같이 허점을 간파당한 채 입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변이되고 만다. 영화 속 갈등의 촉발인 농어촌 특별전형 역시 전형적인 사례다. ‘강남 8학군’, ‘대구 수성구’ 같이 상징화된 대도시 내에서도 특정 학군 과밀현상을 개선하기 위해 시골 아이들에게도 명문대 진학 기회를 보장하고, 이를 통해 지역 균형발전까지 도모하려던 야심 찬 계획은 그저 편법으로 우회경로를 확보하려는 입시전문가와 학부모들에 의해 순식간에 공략당하고 만다.

대도시에서 사교육과 플레이스테이션에 익숙하던 ‘샌님’ 기준은 그렇게 마치 벽지에 유배당하듯 끌려온 신세다. 도시의 풍요와 편리함, 인공적인 유토피아에 이미 익숙해진 초등학교 6학년이 알던 세상이 무너진 것이다. 여기에서 청소년기를 몽땅 보내야 한다니, 그에겐 통곡의 벽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대학 진학을 위해선 꼼짝없이 6년 이상을 여기에서 보내야 한다.

도시 vs 지방의 갈등, 아이들의 계급사회 우화로 구현되다

기준의 엄마는 평소 같다면 어울릴 일 없는 시골 동네 엄마들과 섞이길 감수하며 앞장서 돌격한다. 이게 다 너 잘 되라는 거라며, 이미 엄마 머릿속에는 이 동네 아이들의 정당한 몫이 되어야 할 명문대 진학 자격은 기준의 차지인 것이다. 자신들이 감수한 희생을 생각하면 절대로 그 보상을 빼앗길 수 없다. 자신들이 언제고 목적만 이루면 떠날 텐데 말이다. 결국에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 수도권이 나머지 전국을, 대도시가 주변 시골을 착취하고 군림하는 구도 압축판 자체인 것이다.

그런 욕망을 고려하면 전학 오기 전부터 학급의 중심인 반장 석호와 기준은 결국 친구가 될 수 없는 관계였다. 기준의 엄마에게 석호는 아들이 동네에 자리를 잡기까지 활용할 대상이지만, 기준이 전학을 오지 않았다면 (아마 그에게 갈 확률이 높았을) 좋은 대학 갈 기회를 양보해야 마땅한 이용대상에 불과한 것이다. 석호와 기준의 우정은 철저히 상하-수직으로 설정됨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지속할 수 없는 운명이다. 아직 아이들은 어른들의 그런 간계를 간파할 수 없지만, 결국 그 순간이 오고 말 테다.

기준은 엄마의 그런 심모원려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비틀어 소화한다. 어쩌면 좀 더 본질적인 형태로 말이다. 어차피 공부가 인성교육이나 건전한 사회인으로 성장하기 위함이 아니란 건 누구나 다 속내로 감춘 상태다. 그런 무의식적 본능이 기준을 폭주하게 만든다. 이 촌놈들 사이에서 군림하고 권력을 움켜쥐면 되는 일 아닌가. 소년은 그렇게 판단한다. 그리고 엄마가 석호와 친해져 이용하라고 부추긴 것처럼, 동네의 살아있는 권력인 영문에게 접근한다. 호랑이의 권위를 자기 것인 양 행세하는 여우처럼 기준은 교활하게 이를 활용해나간다. 작은 사회에서 감당할 수 있는 ‘선’을 지키던 영문의 통제력을 위협할 만큼 폭주하기까진 순식간이다.

기준의 ‘타락’은 보는 이를 당황하게 만들지만, 사실 그의 엄마가 원했던 성공 욕망을 자신의 수준에서 철저하게 부합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석호와 영문의 존재는 그들 모자에게 사실 별로 다를 바 없다. 이용하고 써먹다 그들의 위치를 독점하면 그걸로 끝날 관계인 것이다. 하지만 착취하는 지배자가 일방적일 수만은 없다. 수탈당하는 대상과 접촉하다 보면 영향력은 쌍방에게 미치게 마련이다. 아직 세상의 질서를 자기 것으로 온전히 체화하지 못한 아이들 사이에선 그런 통제 불가능한 위험이 상존한다. 기준이 엄마의 계획을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로 획득하는 사이, 마치 전염되듯 정반대의 형국이 조성된다. 강제종료 버튼을 눌러야 할 긴급상황이 경보음을 찢어지게 울릴 때다.

‘장병기 유니버스’의 1단계 완성,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적 시선의 다음 단계는?

얼개만 놓고 보면 <여름이 지나가면>은 그야말로 ‘청춘잔혹사’의 유소년 버전에 가깝다. 보고 있자면 그 물리적 강도가 그렇게 세지 않더라도 눈을 질끔 감거나 다가올 상황에 지레 겁을 먹고 화면을 외면하고픈 찰나가 제법 될 정도다. 누군가는 한국 독립영화가 사회적 현실의 압축이라는 명목으로 남용하는 극단적 폭력의 전시를 떠올릴 법하다.

하지만 한국 독립영화가 양산하는 ‘천하제일 불행대회’의,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오남용과 본 작품의 터치는 같은 듯하면서도 확연히 다르다. 극장에서 관객이 헉하고 내뱉을 충격의 진폭이 영화적 과장이나 장르 문법이 아니라 현실에서 우리가 목격하지만 외면하고 마는 이면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바로 ‘보도블록 뒷면의 사실주의’다. 매끈한 표면을 뒤집으면 드러나는 축축한 낙엽과 이름 모를 벌레들의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감촉과 동일선상의 그것이다. 극장 안에서 우리는 고개를 돌려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것 외에는 그저 직면해야 할 뿐이다.

영화는 일본 청춘 학원물의 여름방학과 겹치는 시공간을 무대로 삼되 독자적 시선으로 청소년 잔혹사를 그린다. 어른들은 자식과 세계를 어떻게 망치는가. 그 한국적 실체가 오롯이 구현된다. 막판의 인상적인 한 장면은 <키즈 리턴>을 끝내 소환한다. 숱한 복제 시도가 끝내 짝퉁에 그쳤던 어떤 극점에 가슴 시리게 도달하고 말았다.

근래 일본 청춘물 복사판을 숱하게 찍어내는 어떤 징후에 대해 <여름이 지나가면>은 한국 사회의 기이한 단면을 폭로하며 정확히 대척점에 자리하고자 자임한다. 지방소멸 방지대책마저 서울 강남에 착취당하는 풍경은 숨 막히다 못해 오싹해질 수밖에 없다. 변방의 청소년이 냉혹한 세계와 직면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분기점을 건너는데 뭐라 말리지도 못하고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아픔이 관객에게 전이되는 작업이다. 영화가 끝난 후 그들의 삶은 어떻게 될까? 관람이 끝나는 순간 질문이 소리 없이 터진다. 그리고 장병기 감독의 작업을 눈여겨봐온 이들이라면, 그의 다음 행보는 과연 어떤 나선을 그릴지 못견디게 궁금해질 테다.

<작품정보>

여름이 지나가면
When This Summer is Over
2024 | 한국 | 드라마 | 115분
감독 장병기
출연 이재준, 최현진, 최우록, 정 준, 고서희
PD 박재성, 이은임 | 촬영 추경엽 | 편집 최현숙 | 음향 하남규 |
스크립트 장병기 | 미술 최임 | 의상 김현정 | 조감독 장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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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목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