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플라톤 추방] 시로 대신하는 출가(出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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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은 자서전처럼 읽히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출생과 함께 울음을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이, 시인은 첫 시집을 통해 자신의 이력을 밝히는 수가 있다. 이동백의 첫 시집 <수평선에 입맞추다>(문학동네, 2004)도 예외라고는 할 수 없지만, 시인들이 쓰는 언어는 그 자체로 가면이기도 해서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다. 시인은 “물소리 먹고 자란 나는 본시 섬 아이 / 섬이란 물길 따라 있고 없는 법”(‘이어도 산다’)이라고 썼지만, 정작 태어난 곳은 금호강이 흐르던 경북 경산시 하양읍 환상1리다.

시인이 인색하게 드러낸 이력은 가난 체험과 연계되어 있다. “기둥 부둥켜안고 술래 하던 자리 / 해오리 서성거린다 / 홀쭉한 배 채워주던 깊은 강물 소리”(‘환상리’) “굽은 길이 마음을 편다면 / 운문사 가는 길 잡겠네 / 가난한 물줄기들 / 골짝마다 떠나와 / 잔기침 한 번 없이 내를 이뤄 모여드네”(‘경계의 그늘’) “산은 산을 불러 떠나려 하고 / 하늘 가린 나무 아래 길은 없네 / 목마른 이야기 들리는 듯 찾아온 물소리 / 멀어질 듯 따라가면 / 갈대밭 너머 낯선 집 숨죽이고 있네“(‘바람의 집’) ”묘사떡 훔쳐들고 줄행랑치던 날 / 산그늘 타고 / 동구까지 쫓아오신 할아버지 / 이제 마음 좀 풀리셨을까“(‘벌초’)

시인이 출생한 1955년은 한국전쟁의 포화와 적빈이 그대로 남아 있을 때였다. 이 시기에 자라난 한국인치고 굶주림과 가난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눈에 보이거나 들리는 이야기가 온통 가난이나 목마름으로 수식되었던 시인의 유년은 그만의 것이 아니었고, 강물 소리로 홀쭉한 배를 채우거나 묘사떡에 손을 댄 구체적 추억조차 그만의 체험이라고 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시절에 누구나 겪었을 법한 굶주림과 가난 위에 시인이 또 다른 층위의 가난을 더했다는 것이다. ”남몰래 훔친 경(經) 몇 장으로 / 비겁한 생이 가려지겠느냐“(‘耳鳴 속의 해일’) ”낯선 집 기웃거리다가 몰래 베낀 경(經)”(‘수평선에 입맞추다’)

이 시집의 맨 처음에 실려 있는 시와 표제작에 나오는 경은 시인에게 생물학적 배고픔과는 다른 층위의 배고픔이 있었다고 귀띔 한다. 경서(經書)의 준말인 경은 쓰는 사람에 따라 유가의 고전에서 기독교의<성경>까지 폭넓게 아우르지만, 좁게는 불경의 준말로 쓰인다. 그러나 시인의 시에 불교 용어와 사유가 잘 베여있는 걸 보면 두 싯구에 나오는 경은 불경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시인은 시집 권말에‘나는 아직도 가출을 꿈꾸고 있다’는 제목의 산문을 실었는데, 다음 싯구는 그가 젊었을 때 품었던 열망의 흔적이다.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다 // 나는 먼 바다에 가 닿으리”(‘耳鳴 속의 해일’)

시인은 몇 번의 가출은 하였던 모양이지만, 출가룰 이루지는 못했다. 때문에 유년시절의 생물학적 배고픔은 어느덧 해결되었으나, 시인은 여전히 “못다푼 수수께끼”(‘靑山圖’)로 배고프다. “내가 조금씩 엷어진다 / 떨고 있는 내 몸, 잎새만하더니 / 가지 끝에 매달려 발버둥 친다”(‘처서’) “허수아비처럼 지켜보던 날들이 흔들린다”(‘새끼 꼬기’) “잠들고 싶다 / 키 큰 생각들은 넒은 바다로 보내고 / 가슴 밑바닥 돌이 된 찌꺼기 / 차곡차곡 감춘 무늬 새겨놓았다”(‘저문 강’)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 놓친 길 얼마던가 / 벼랑 끝 몸 던질 때 / 비로소 제 빛깔 내는 / 물의 잠행 / 훙내내어왔지만 / 어느 벼랑 끝 목숨 걸었던가 / 겁 많은 짐승처럼 / 끙끙거리다 버리고 만 길”(‘개옻나무’) “눈을 감고 들여다본 / 어둠 저 너머 / 수없이 빗나간 나의 화살들 / 산을 이루고 있다”(‘과녁’)

아내와 아이들을 가진 시인은 지금도 “길을 끊으려 안간힘”(‘근황’)쓰다가, 세속이라는 벼랑에서 “뛰어내릴 용기”(‘몽유’) 없음을 자책한다. 그 긴장이 그를 성(聖)도 속(俗)도 아닌 경계에서 시를 쓰는 시인이도록 한다. 시집이 끝나갈 때에 나타난 ‘가위눌린 봄밤’·‘봄봄’·‘쇼생크 탈출’에서 시인은 가면 없이 말한다. 그 중에서 ‘봄봄’의 첫 연이다. “꽃잎 지듯 마음 날리면 / 자주 숨이 차는 비둘기호 타고 / 바람 부는 간이역에 버려지고 싶네”

장정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