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그 시절, 서로에게 버팀목 되어준 친구들의 사진첩 같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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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정류장, 떠나는 이와 그곳에 남게 될 이

겨울에 들어선 바닷가 한적한 마을, 교복을 입은 한 여학생이 해변을 응시하다 이윽고 뒤돌아선다. 사연 가득한 표정, 하지만 우리는 그의 속내를 알 길이 없다. 같은 시각, 근처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던 또래 여학생에게 좀전의 여학생이 다가간다. 둘은 친구로 보인다. 핀잔을 주고받으며 티격태격하지만, 오래 알고 지낸 관계에서 배어 나오는 친밀감이 그들을 감싸고 있다. 담배를 피우던 여학생은 이제 끊을 거라며 친구에게 담배와 라이터를 담보로 맡긴다.

헤어진 뒤 처음 여학생은 집에서 홀로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한다. 밤이 되자 그는 아까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어딘가 같이 가줬으면 한다고. 한적한 버스 정거장에서 둘은 낮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목적지로 향한다. 둘이 머물던 바닷가 작은 마을과 달리 도시의 어느 아파트다. 끙끙대며 겨우 문을 열고 들어간 아파트는 원래 이사하기로 했던 곳이지만, 상황이 변했다고 한다. 둘은 촛불을 찾아 켠 뒤, 그 불빛에 의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이어간다.

아파트를 나온 후 둘은 마을로 돌아가 문 닫힌 동네 슈퍼마켓 앞 평상에서 몰래 술을 마신다. 이웃집 숟가락 개수마저 훤히 알 수밖에 없는 작은 동네에서 둘은 각자의 집안 사정을 통달한 상태다. 아직 스스로 달리 뭘 할 수 없는 처지를 위로하며 실현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허풍 섞인 위로를 건넨다. 그들의 대화는 언제나 그랬다는 듯, 하지만 영원히 이어질 듯 계속된다. 한 명은 가정 형편상 곧 전학을 앞뒀고, 또래가 드문 이곳에서 자매처럼 지내왔을 둘은 이별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단편다운 단편에 목마른 이들에게 환영받을 결과물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의 작법은 같은 소설로 묶이지만 확연히 다르다. 장편이 기-승-전-결 구성으로 촘촘하게 밀도를 유지하는 서사가 기본이 되는 데 비해, 단편은 독자에게 어떤 특정한 이미지를 조성해 풍경화처럼 떠올리게 하거나 혹은 이전까지의 흐름을 단번에 뒤집는 ‘반전’의 승부수를 던져 각인하는 작법을 취하기 때문이다. 둘의 구조는 각자의 조건에 따라 대비될 수밖에 없다. 장편영화와 단편영화 역시 대동소이한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근래 많은 단편영화가 이 구분법을 어기려는 의도를 뿜어내곤 한다. 물론 형식이란 고정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창작자가 다양한 시도를 하는 건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요즘 적지 않은 단편영화가 오랜 시간 축적되고 검증을 거친 공식을 벗어나는 건 대개 장편영화를 찍고 싶되 여건상 못하는 것을 억지로 단편에 밀어 넣으려는 욕망의 발로로 보인다. 서로 다른 작법으로 승부를 봐야 할 소 장르를 무시하고 억지로 팔다리 뽑아서 끼워 맞추다 보면 무리수가 생기게 마련이다.

이는 대개 단순히 상영시간이 길고 짧음이 아닌, 단편다운 호흡을 무시하고 장편 분량에 걸맞은 이야기를 우격다짐으로 압축하려다 보니 일어나는 경우다. 관객의 시선에서는 주로 뭔가 설명이 더 필요한데 건너뛴다거나, 인물과 사건의 배경을 영화 내용이 아니라 추가 자료 혹은 감독의 설명을 들어야만 온전히 소화 가능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만든 이 입장에서야 그렇게라도 제작 의도를 풀어내고 싶지만, 관객에겐 불친절하고 자기 본위의 태도인 셈이다.

<환절기>는 다행히 그런 유혹을 벗어난 작업에 속한다. 이 영화를 만든 이는 그저 본인의 청소년 시절 부모님과도 공유하지 못하던 어떤 여백 혹은 추억을 나눌 수 있었던,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새 곁에서 사라진 친구들을 화면에 소환하는 영상 사진첩에 매달린다. 집을 짓는데 마음속에서야 으리으리한 저택을 짓고 싶어도 가용 형편은 늘 그보다 옹색할 수밖에 없다는 걸 직시하고, 감당 가능한 범위에서 올릴 수 있는 내실 있는 건축을 추구한 결과다. 덜어내기란 창작자에게 늘 제 살 도려내듯 아프고 힘든 숙제다. 욕심 덜어내고 오직 핵심에 집중하기란 의외로 쉽지 않다.

작지만 필요한 건 빼먹지 않은 ‘집’을 짓는 영화

포항의 변두리, 용두리 마을회관과 바로 앞 버스정류장, 스산한 어촌 마을의 오래된 풍경은 지극히 단조롭지만, 풍경 자체로 등장인물의 내면을 표상하는 데 일익을 담당한다. 그들이 하염없이 바라보지만 어떤 답을 들을 수 없는 무심한 동해의 바다는 아직 온전한 성인으로 자유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없는 처지를 극대화한다. 그저 멍하니 응시하거나, 절해고도에 위리안치된 유형수의 심정으로 애꿎은 담배만 피워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탈출할 수 없고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절대적 장벽은 주인공이 처한 처지를 표상하는 장치로 더없이 효과적이다. 그런 고립감은 동병상련인 이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법.

이들의 막막한 심경은 영화 내내 화면을 장악하는 기본 에너지가 된다. 하지만 그저 출구 없는 답답함이 감독이 보여주려는 전부는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영화를 보는 18분이란 시간은 창작자가 겪었던 청소년기의 어두운 그림자, 블랙홀로 관객을 빨아들이려는 심보에 불과했을 테다. 마치 <주온>의 ‘토시오’와 ‘가야코’처럼 말이다. 그 대신 영화는 그 답답하던 시절 서로의 비밀을 몰래 나누며 함께 어깨를 맞대고 어둠과 추위를 이겨낸 ‘전우’들을 향한 그리움과 감사함을 전하려 애쓴다. 그런 소박한 회고가 엇비슷한 경험을 간직한 이들에게 보편적인 공감대를 획득하게 만든다.

친구가 술과 담배를 달고 사는 걸 그러다 뼈 삭는다는 투로 말리는 행위는 어른들의 훈계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자신 또한 왜 친구가 몸에 안 좋은 거 알면서도 의지하는지 너무 잘 안다. 본인 역시 자연스레 충동을 느끼고 서툰 시도에 도전한다. 그런 피식 웃음 짓게 하는 찰나의 위트, 그리고 먼 길 떠날 친구가 길을 잃지 않도록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염려를 상징하는 무엇인가를 꼭 전하려는 애틋한 기운이 암흑 에너지 대신에 화면 구석구석 여백을 채워준다. 마치 영화 속 그들의 거처처럼 오래된 집 틈새로 들어오는 윗바람 막기 위한 세심한 손놀림처럼.

지역 영화창작 후속세대의 길을 밝히는 등불같은 작업

지역 독립영화판에서 가장 중요한 창작그룹으로 자리매김한 대구영화학교 출신 중 1, 2기는 어느덧 독자적인 색채를 형성한 몇몇 작가군을 형성해가는 상태다. 이들은 이전 세대 경험을 발치에서 지켜보고 동참하며 일정한 경력을 쌓은 후 체계적인 교육 과정을 거쳐 수혜를 입은 세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학교 수료작으로 데뷔한 후 대개 두 번째 작품부터 본격적인 주목을 받으며 기량을 만개하는 중이다.

반면에 3기 이후 온전히 대구영화학교가 자신들의 영화 첫 경험이 된 이들은 이제 ‘선배’ 그룹이 된 1, 2기를 선망하는 동시에 벽처럼 여기는 이중적 상황에 놓인다. 매년 천 단위의 단편영화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처음엔 무작정 내 영화 완성하기만 해도 충분히 만족했지만, 점점 시야가 넓어지면서 ‘작가’로서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지 고민은 자연스럽게 확장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누구나 들어서게 되는 딜레마, ‘두 번째 영화’가 도래한다. 어찌 보면 ‘진검승부’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순간이다. 첫 번째 영화는 학교 수료 작품으로 넘어가 줄 수 있지만, 두 번째부터는 온전한 ‘홀로서기’가 가능해야 한다.

<환절기>는 영화학교 4기 연출전공으로 <운동회날>을 선보인 김주리 감독의 ‘두 번째’ 영화다. 전작과 달리 큰 제작 지원 없이 소소하게 작업한 결과물에서 ‘스승님’들의 울타리를 벗어나 도전한 두근두근 떨리는 작업은 세상을 놀라게 할 깜짝 한 방 대신, 본인이 그리고 싶은 이야기를 화면에 채워낸다. 물론 그곳에서 만난 ‘동료’들의 이름이 제작진에 가득 채워진 걸 확인하는 순간, 해당 교육 과정이 지식과 기술의 전수가 아니라 바로 함께 작업할 친구를 만드는데 목적을 뒀음을 긍정할 수 있다. 그렇게 차근차근 자신이 하고 싶고 잘 소화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그런 시도가 응답을 얻어 조그만 관심과 주목을 획득하며 세상으로 향하는 중이다.

그렇게 완성된 결과물은 3기 이후 영화학교 창작자 중 두 번째 영화를 선보인 최초의 출발점 중 하나로 인장을 새겨넣는다. 3기 촬영 전공 이호철 감독의 <왜행성>과 함께 지역 독립영화 후속세대의 두 번째 영화 선발대로 <환절기>를 바라보는 순간, 개별 결과물에 대한 단평을 넘어 지역 영화창작 물결과 연계해서 볼 흥미로운 여지가 추가될 수 있겠다.

<작품정보>

환절기
Change of Season
2024|한국|드라마|18분
감독/각본 김주리
출연 김다솜, 안수민
촬영/조명/색보정 이한오|PD/동시녹음 장일경|편집/미술 김주리|
특수효과 김규태|조감독 류승원|스크립터 한지원|촬영부 조성림|사운드믹싱 강범구

2024 4회 FILM IN DAEDEOK 영화제
2024 50회 서울독립영화제 로컬시네마

김상목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