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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종로 몬스터즈크래프트비어(대표 김시연)가 고은주 작가 초청 <나는 이육사다> 북토크를 열었다. 일송북 출판사의 ‘한국 인물 500인’ 연작 가운데 근대 편인 <나는 이육사다> 북토크 제목은 ‘꺽이지 않은 마음으로 행동했던 시인’으로, 작가는 약 90분 동안 일제에 무릎 꿇지 않고 살았던 대구사람 이육사의 삶과 문학을 말했다.
이날 북토크에는 정대호 대구이육사기념사업회장, 채영희 10월항쟁유족회장과 조선남, 이동훈 시인을 비롯해 행사를 후원한 와이스토리협동조합 관계자와 시민 등 20여 명이 함께했다.
행사를 진행한 ‘한국 인물 500인’ 선정위원인 심상균 와이스토리협동조합 사무국장은 “올해가 육사 서거 80주기이고, 태어나신 지 두 번의 환갑을 치르는 120년이 되는 의미가 있어서 올해를 넘기지 않고 대구시민과 함께 육사를 생각하고 같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나는 이육사다>의 고은주 작가를 초청했다”고 말했다.
대구 방문이 처음이라는 고 작가는 “북토크에 앞서 이육사기념사업회와 10월항쟁유족회 관계자 등과 대구 남산동의 이육사기념관을 둘러봤다. 육사가 가족들과 함께 생활했던 집은 사라졌지만, 그곳에 작은 기념관으로 남아있는 흔적을 통해 역사의 엄연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관객에게 인사했다.
이육사 시인은 대구형무소 출소(25세) 후 난징군관학교 가기(28세)까지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며 대구에서 독립운동을 이어왔다. 육사가 군관학교 졸업 후 서대문 형무소에 갇힐 무렵 가족들은 서울로 이주했고, 육사 순국 이후 그의 아내가 어린 외동딸 옥비를 데리고 다시 대구로 내려와 삼덕동에서 홀로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고 작가는 이육사를 대구사람으로 소개하며 관객과 거리를 좁혔다. 외동딸 이옥비 여사를 만나면서 들은 대구 삼덕동 시절 이야기, 육사 인생의 역사적 배경, ‘원록’에서 수인번호 264가 그의 이름이 되기까지 과정을 필명과 함께 설명했다. 육사가 “말도 아니고 글도 아닌 무서운 규모가 우리를 키워 주었습니다”(수필 <계절의 오행> 가운데)라고 말한 의병과 독립운동 집안 이야기, 최근에 발견된 육사의 아내 안일양 여사의 사진과 청년 시절 한복을 입은 육사 사진, 만주의 외숙 허발에게 드린 것으로 추정하는 ‘수부선행’ 휘호, 육사가 신석초에게 그려준 ‘의의가패’라 쓴 묵란 등도 소개했다.
고 작가는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안동에서 태어나 유교적 전통 속에서 자란 육사는 16세에 가족과 함께 대구로 이주한 뒤 본격적으로 근대 문물을 접하게 된다. 이후 일본 유학과 중국 유학을 거치면서 독립운동을 시작하고, 대구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청년동맹 활동을 벌이다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된다. 이때 얻은 수인번호가 264. 훗날 그는 이 숫자를 필명으로 삼아 불멸의 저항시들을 발표한다”고 말했다.
관객이 육사의 시를 읽는 시간도 가졌는데 류경화 씨가 ‘청포도’를, 조선남 시인이 ‘광야’를 읽었다. 정대호 회장은 ‘절정’을 읽으며 “육사는 문학자보다는 행동하고 실천하는 행동가였다. 육사는 살았을 때 본인이 시를 쓴다고 내세운 적이 별로 없다”고 덧붙였다.
고은주 작가는 1967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KBS 아나운서로 ‘TV 책을 말하다’를 진행하기도 했다. 1995년 단편 소설 <떠오르는 섬>이 문학사상 신인상 수상하면서 등단, 99년 장편소설 <아름다운 여름>으로 제23회 오늘의 작가상 공동 수상. 이번 평전 <나는 이육사다>에 앞서 2019년 장편소설 <그 남자 264>(노근리평화상 문학상 수상)와 장편동화 <내 이름은 264>를 펴내는 등 이육사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했다.
정용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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