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시혜와 권리 사이, 장애인야학의 현주소를 조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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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도 야학이 있다?!

‘야학’이란 단어를 들으면 고개를 갸우뚱할 이들이 많을 테다. 이제는 과거의 유물로 희미하게 그런 게 있었다고 회고하면 다행이다. 아예 존재 자체를 상상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교육 과잉의 시대를 사는 2020년대 한국인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외양만 놓고 보면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 진학률을 기록할 정도로 공부에 목숨 건 나라 아닌가. 며칠 전 치러진, 사실상 국경일보다 더 중요한 사회적 관심사 2025년도 대입 수학능력시험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제도교육도 모자라 거대한 사교육 시장이 형성되고, 인기 강사는 시대의 지식인이자 거대한 부를 쌓아 재벌이 되는 사회다.

하지만 심훈의 <상록수>,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 등장하던 야학은 21세기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기찻길 옆 공부방에선 맞벌이 가정의 맡길 데 없는 아이들이 지금도 돌봄과 교육을 받고, 시골에선 여성 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다양한 형태의 과정이 가동 중이다.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시인 할매>, <칠곡 가시나들> 같은 다큐멘터리가 잔잔한 주목을 얻기도 했었다.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한 ‘한글 교실’을 야학의 변용으로 봐도 무방하다. 여기까지 놓고 보면 현존하는 야학과 그 계승자들에게서 공통된 면모가 관측된다. 바로 교육 열풍의 이면에 가려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제와 차별의 그림자다.

그렇다면 당연히 상상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 장애인이다. 장애인 야학이 없을 리 없다. 아마 일반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장애인 야학이라면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부근에 자리한 노들장애인야학일 테다. 역시 뭐든 서울에는 있을 게 다 있구나 하며 돌아설 즈음, ‘사실 우리 지역에도 장애인 야학이 있어요’ 속삭임처럼 뭔가가 다가온다. 대구에도 장애인 야학이 존재하다.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바로 그 주인공, 질라라비장애인야학을 다룬다.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바로 그 주인공, 질라라비장애인야학을 다룬다.

‘봄바람 프로젝트 시즌 2’의 중력장 안에 위치하는 독자적 단편

7분 채 안 되는 단편 다큐멘터리 <장애교육>은 독자적 작품 형태를 갖췄지만, 하나의 옴니버스 장편 형식에 포함되는 기획으로 탄생했다. 바로 <봄바람 프로젝트 시즌2 : 다시 바람이 분다>다. ‘시즌2’라면 ‘시즌1’이 있다는 뜻일 텐데 과연 이 출발점은 무엇일까.

2022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자, 겉으론 대화가 가능한 것처럼 보이던, 정작 제대로 해결된 건 없지만 그나마 조금 낫던 사회적 지형의 퇴행이 우려되던 시절에 응전하듯 마치 섬과 섬처럼 전국 곳곳에서 계속되던 다양한 투쟁 현장을 조명하며 연결하려는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들의 기획이 시작된다. 바로 ‘봄바람 순례단’ 기록작업이다. 길 위의 사제라 불리던 문정현 신부가 중심이 된 순례단의 여정을 동행한 다큐멘터리 감독들에 의해 기록됐고, 이를 바탕으로 시즌1이 탄생한다.

순례단의 여정 중 18곳의 ‘섬’이 독립된 단편이자 옴니버스 영화 일부로 공개된다. 각각 ‘기후위기의 시대’, ‘빼앗긴 노동’, ‘있다, 잇다’, 2_4. ‘기억 투쟁’, ‘평화 연습’으로 분류된 구성 안에 포함된 단편 중 대구·경북 지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4개나 된다.

‘기후위기의 시대’에선 월성 핵발전소 인근지역 주민들의 이주대책 관련 투쟁을 다룬 <원전 말고 사람>이, ‘빼앗긴 노동’에선 한국장학재단 대구 본사 로비와 마당에서 장기간 농성투쟁을 진행하던 콜센터 노동조합의 <콜센터 노동자의 봄날>이, ‘기억 투쟁’ 편에선 경산의 청소년 정유엽군 이야기 <코로나19의료공백 1. 정유엽군 아버지 어머니>가, ‘평화 연습’에는 <소성리 국가폭력의 시간들>이 수록되어 있다. <원전 말고 사람>과 <소성리 국가폭력의 시간들>은 옴니버스 전체 구성에서 각각 열고 닫는 역할을 담당한다. 지역의 비중이 적지 않은 셈이다.

<시즌1>은 몇 곳의 영화제와 공동체 상영으로 시민들을 만났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더 나빠졌다고 표현함이 적절할 테다.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두 번째 시즌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카메라로 연대한다는 건 그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부여했을 것이다. 그렇게 <시즌2>가 출발한다. 이번에는 첫 번째 프로젝트와 달리 순례단에 동행하지 않고 각자 관심을 천착하던 소재와 주제에 따라 작업한 것들을 이어 붙인 형태에 가까운 구성이다. 총 11개의 단편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현장 미디어 제작지원 프로젝트에 힘입어 완성되었다.

〈봄바람 프로젝트 시즌2 : 다시, 바람이 분다〉 역시 전편에 이어 ‘노동과 사람을 말하다’, ‘기후위기 시대의 우리’, ‘한국사회의 자화상’, ‘차별과 혐오의 현장’으로 각 단편을 묶어낸 형식을 취한다.​​ 이번에는 지역 배경 작품이 얼마나 될까 확인해본다. 아쉽게도 1편뿐이다. 그 작품이 장애인야학을 다룬 <장애 : 교육투쟁>인 것이다. 나머지 10편도 흥미롭지만 일단 이 작품부터 풀이해보자.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듯, 누군가에겐 너무나 좁은 문

▲박명애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다. 그는 자신의 경험담을 카메라에 술회하기 시작한다.

장애인운동을 지역 내에서 주시하거나 연대한 적이 있는 이들이라면 모를 리 없는 인물이 화면에 등장한다. 박명애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다. 그는 자신의 경험담을 카메라에 술회하기 시작한다. 47살에 처음으로 장애인야학을 접하며 얻게 된 새로운 인생이 지금의 자신을 존재하게 했다며, 47살이 아니라 30살에 시작했다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아쉬움을 토로한다. 집 대문 밖으로 공부하러 나가는 게 평범한 누군가에겐 땡땡이치고 싶은 갑갑함이지만, 정작 그 기회 자체를 박탈당한 이들에겐 거대한 축복이 된다는 아이러니한 순간이다.

그나마 광역시쯤 되니 야학이라도 찾을 수 있었지만, 열악한 제도권 밖 교육과정을 수강하기 위해선 넘어야 할 제약이 ‘대륙횡단’ 차원으로 가득했다. 박명애 대표는 초창기 수업을 듣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회고한다. 일단 집 밖으로 나오려면 일반 대중교통은 이용할 수 없다. 휠체어로 이동해야 하니 가족이 승용차로 통학시키기도 애로가 꽃핀다. 장애인 콜택시를 요청해야 한다. 문제는 그렇게 야학 앞까지는 도달했는데 사정상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것이다. 콜택시 기사에게 2층까지 업어줄 수 있는지 부탁해야 하는 곤혹이 뒤따른다. 그런 시련을 딛고 쉰이 다 된 나이에 처음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본인의 인생 시즌2가 열린다. 지금 우리가 보는, 전국구급 장애인 투쟁의 상징 중 하나가 된 박명애 대표의 Begins 전설은 야학에서 출발한 것이다. 우리가 한국 사회에는 교육이 너무 넘쳐 문제라 하는 21세기 초입에 있던 일이다. 조금만 눈높이를 다르게 각도 조절하면 평범한 이들은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 여전히 다이내믹 코리아에는 가득한 것이다. 그런 기구한 일화를 재현하기 위해 영화는 인터뷰와 애니메이션을 결합해 인물의 과거 기록되지 못한 시절을 재구성한다. 단편 다큐멘터리치고는 품이 많이 들어간 셈이다. 하지만 단순 증언만으로 상상하기 힘든 풍경, 고립감과 슬픔이 그런 수고를 통해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있었다.

카메라는 학교라기엔 너무나 단출한 질라라비장애인야학의 현재를 돌아보기 시작한다. 주3일 수업에 국어, 영어, 수학 등 기초적인 내용 위주이지만, 이조차 제도교육에서 배제된 이들에겐 결핍된 상식이다. 간략하게 묘사되는 수업 현장의 풍경도 크게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이런 기본적인 수업조차 언감생심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던 무대가 된다. 우리의 상상력이 오히려 부족했던 데 가깝다. 영화에선 분량 제약 때문에 온전하게 그려지진 않지만, 이 야학에선 수업 외에도 소풍이나 수학여행도 갖출 건 갖춰서 진행하고 있다. 박명애 대표가 어릴 적 창문 밖으로 또래 아이들이 등교하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며 부러워하던 장면과 자연스럽게 대비되는 광경인 셈이다.

▲카메라는 교육청 앞 장애인들의 시위 현장으로 관객의 시선을 잡아끈다.

동냥하지 않고 공부하기, 이 땅에 살기 위하여

인간 승리 차원의 소회, 그리고 대수롭지 않아 보여도 소중한 가치가 구현되는 현장까지만 보면 훈훈한 ‘인간극장’으로 진행될 것 같다. 하지만 곧이어 카메라는 교육청 앞 장애인들의 시위 현장으로 관객의 시선을 잡아끈다. 질라라비장애인야학의 현주소, 그리고 난제를 풀어낼 시간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갑자기 화면이 어두워지고, 마치 칠판처럼 전환된다. 그 자리에 “동냥하지 않고 공부하기”라는 문장이 분필로 필사하듯 새겨진다. 영화 주제의식이 구현되는 순간이다. 2000년에 세워진 질라라비장애인야학은 수업 지원에 머물 뿐 정규 이수로 인정받지 못했다. 대구에서 2011년 성인 대상 초등학교 학력 인정 과정이 개설되었지만, 장애인에겐 접근이 허락되지 못했다. 무려 7년이 걸린 투쟁의 결과로 장애성인의 초등학력인정 문해교육과정이 2018년 개설되기에 이른다. 검정고시를 위한 준비 과정에서 한 단계, 마치 아폴로 11호에 탑승해 처음으로 달 표면을 밟았던 이들이 지구에 송신한 것처럼 ‘거대한 발걸음’이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다.

이제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력인정까지는 질라라비장애인야학 교육과정을 성실히 다니는 것으로 취득이 가능해졌다. 비장애인이라면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며 그 성과에 뿌듯해할 테다. 하지만 당사자는 거기에 만족할까? 여기에서 영화는 질문을 던진다. 아주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의 권리 보장에 대한 해묵은 논쟁의 재점화이기도 하다. 이 정도면 그래도 많이 개선되었으니 조금만 참고 양보도 좀 하고 해야 한다는, 주로 예산과 자원 문제를 거론하며 나오는 정부와 사회 전반의 시선 vs 동정 차원에서 이것 받고 참으세요 수준을 넘어 평등을 향해 보편인권을 요구하는 당사자의 시선 충돌 현장이다. 화면의 문장은 정확히 그 분계선을 겨냥한다.

박 대표가 다시 등장한다. 이번엔 차분한 실내가 아니라 격렬한 시위 현장이다.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연설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도 똑같이 요람에서 태어나 무덤에 묻힐 텐데, 왜 똑같이 교육받을 권리를 얻지 못하냐는 울분을 분출한다. 그 주장은 장애인에게 고등교육 접근성을 보장할 ‘장애인평생교육법’의 표류를 질타하는 내용이다. 교육부는 미온적이고, 기획재정부는 법안이 통과되면 막대한 비용이 들어갈 우려로 반대하는 중이다. 당연히 기존에 교육에서 배제당하던 이들이 편입되면 비용을 투입해야 한다. 이를 계산기로만 놓고 보면 당연히 없던 지출이 늘어나는 셈이다. 하지만 자신들을 주판알로 판단하지 말라는 인간 선언 앞에서 무엇이 옳고 틀린 것인지 관객은 이제 선택해야 할 시간이 닥친다.

작품 바깥에서 여전히 관측되는, 지역 내 기록작업의 빈곤

짧은 단편 다큐멘터리는 효과적으로 지역에서 분투하는 장애인야학의 존재를 알리고, 이 대안교육 기관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구현한다. 단순히 장애인들의 교육기본권 문제를 넘어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그 역할을 소화하는 다양한 형태의 대안적 교육을 향한 관심사를 촉발하는 전채 요리로 활용되기 좋은 작업이다. 다큐멘터리가 고전적으로 수행해 온 다양한 사회적 풍경의 기록이란 역할에도 충실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영화 외부에서 주로 비롯된다. <봄바람 프로젝트> 첫 번째 시즌에서도 그렇고 이번에도 여전한 고민 지점이다. <시즌1>의 4편, <시즌2>의 본 작품까지 지역 내에서 적어도 사회운동과 연대 활동에 관심을 지닌 이들에겐 의미가 적지 않은 의제들의 소중한 영상 기록작업이 전부 지역 외부 작가들에 의해 수행되어왔다는 점이다. 이는 첫 시리즈에 비해 이번 편에서 지역 배경 작업이 감소한 것과도 연결되는 문제다. 분명히 크고 작은 투쟁과 현장이 다른 지역에 비해 적지 않은데 편수가 줄어든 건 기록자가 부재한 것이 한 원인일 테다.

물론 시급한 당면 투쟁에 지역 출신 따질 틈이 없다. 누구든 잘 기록해 세상에 알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자체로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지역 독립영화가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고 화제가 되는 것과 견줘보면, 의아할 정도로 다큐멘터리 분야의 부재가 ‘튀는’ 건 사실이다. 개별 창작자가 할당을 받듯이 장르를 배분받을 순 없는 노릇이지만, 이런 취약성에 대한 진단과 해법 마련이 또한 독립영화가 공감대를 획득하고 지역 사회에서 영화제 및 개봉실적과는 별개로 그 존재 가치를 공인받는 경로가 될 것이다.

<작품정보>

봄바람 프로젝트 시즌2 : 다시, 바람이 분다
Spring Wind Project 2 : Meet comrades
again
장애 : 교육투쟁
2024 | 한국 | 다큐멘터리 | 7분
감독 황나라
출연 박명애 외

2024 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 연대의 연대기: 한국의 미디어 액티비즘 초청
2024 26회 부산독립영화제 – 스펙트럼 부산 나우 초청

김상목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