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 지하철 1호선 명덕역과 3호선 남산역 사이, 좁은 골목을 따라 남산동 2178-1번지를 찾아가면 낮은 담으로 둘러싸인 전태일 옛집을 볼 수 있다. 발목 높이의 담벼락을 지나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기념관이 보인다. 오래된 기와집 내부를 깔끔하게 수리해 20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는 공간이 됐다. 신발을 벗고 내부로 들어가면 정면에 커다란 그림이 보인다. 그림 속 전태일의 곁에는 그의 공장 동료들, 이소선 여사, 조영래 변호사, 백남기 농민이 있다. 그들 사이사이 실루엣만 보이는 ‘우리’도 있다. 작품명은 ‘나도 전태일’, 희망을 뜻하는 나비가 우리들 머리 위를 날고 있다
13일 오후 3시 30분, 개관식을 앞둔 전태일 옛집은 담장 너머까지 시끌시끌했다. 행사 준비를 도우러 온 이들이 공간을 정리했다. 윤종화 사단법인 전태일과친구들 부이사장은 의자를 깔고 스크린을 세웠다. 정은정 부이사장은 기념관 내부를 정리하다가 배달 온 떡을 받았다. 송필경 이사장은 방문객들에게 공간 하나하나를 소개했다. 이두옥 전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대표는 조용히 공간을 둘러봤다. 이 전 대표는 전태일 열사가 다닌 청옥고등공민학교 한 학년 후배다.
전태일은 1962년부터 2년간 대구에 살았다. 14살의 전태일은 면적 195㎡ 정도의 집에 가족과 세 들어 살았다. 청옥고등공민학교(현 명덕초등학교)를 다녔던 이 시기를 전태일은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 회고했다. 이후 1964년 가족과 서울로 떠난 전태일은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다가 1969년 공장에서 해고됐다. 그리고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서 시위가 경찰에 의해 막히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전태일 옛집 완공되기까지···3,000명의 시민이 모금 참여
전태일 옛집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8년 준비를 거쳐 2019년 3월 설립된 전태일과친구들은 창립선언문에 ‘가장 뜨겁게, 가장 깊이 나보다 더 힘든 어린 영혼을 사랑한 전태일의 정신이 싹튼 곳이 여기, 대구다. 대구는 단순한 출생지가 아니라 전태일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라며 그의 삶과 가치를 알리고 이어가겠다고 썼다.
전태일과친구들은 2019년 5월부터 옛집 매입을 위한 시민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지자체나 정부 지원 없이, 오로지 시민 후원으로 총 기금 8억 원을 모았다. 전국 각지에서 시민 3,000여 명이 참여했다. 전태일의친구들은 2020년 이 중 5억 원으로 집을 매입하고 ‘전태일’이라고 쓰인 문패를 달았다. 이후 3억 원으로는 주택을 복원하고 기념관을 조성했다.
모금 과정이 쉽진 않았다. 코로나19 영향도 받았다. 모금을 책임진 윤종화 부이사장은 “시민사회가 단일한 의제로 모금을 시작해, 이렇게 큰 금액이 모인 것은 전국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것이다. 특히나 대구에서 역사적인 사건을 조명하며 시작한 모금으로는 큰 성과”라고 평가했다.
매입 후 복원 작업이 시작된 건 올해 4월이다. 전태일과친구들은 시민집담회 등을 통해 기념관에 무엇을 담고, 어떻게 활용할지 논의했다. 이 내용에 더해 건축가, 목수, 도시재생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건축위원회는 유가족과 관계자 증언으로 옛집 고증 작업을 진행했다. 전태일 가족이 살았던 셋방의 터를 조사하고 기초석을 발굴한 뒤 이 공간을 공터로 두되, 21세기 지금의 전태일 정신을 표현하고 담아낼 의자 오브제로 재현했다. 집주인이 살았던 오래된 집은 골격을 두고 리모델링해 기념관으로 구성했다.
현재 전태일과친구들의 회원은 50여 명, 한 달에 모이는 회비는 100만 원 정도다. 정은정 부이사장은 앞으로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회원은 어떻게 늘릴 수 있을지를 고민 중이다. 올해 임기가 끝나는 2기 이사회가 정한 한 가지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우선 야외 마당에선 음악회나 시화전 같은 행사를, 실내 기념관에선 강연이나 소모임을 할 수 있도록 대관 신청을 받을 예정이다. 인근의 2.28민주운동기념회관이나 근대골목 투어를 방문한 이들이 이곳을 방문해 대구의 여러 면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정 부이사장은 “10월 광주의 비정규직지원센터에서 대구를 방문하는 김에 전태일 옛집을 들렀다. 전태일이 대구에 살았던 적이 있다는 것에 놀라고, 대구에서 이런 공간을 마련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라고 돌아갔다”며 “대구의 민주화 운동, 노동운동의 역사를 되짚어 다양한 논의가 시작됐으면 좋겠다. 이 공간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고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태일 기일 맞아 추모 및 개관 기념식 열려
13일 오후 6시 전태일 옛집에선 전태일의 기일을 맞아 ‘전태일 54주기 추모 및 옛집 개관 기념식’이 열렸다. 초대장에 적힌 대로 열여섯 살 전태일의 귀향을 환영하듯 시민 100여 명이 모였다.
전태일 열사가 세 들어 살았던, 지금은 터만 남은 공간에 모인 시민들이 앉거나 서서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기념관 옆 벽면에는 이소선 열사가 그려진 작품이 걸렸고. 그 옆 공터에는 ‘열여섯 태일의 꿈’이라는 제목의 의자 오브제가 전시됐다. 기일인 만큼 전태일 열사 액자와 흰 국화도 준비됐다.
북과 장구, 냄비뚜껑을 신명 나게 두드리는 도깨비굿으로 행사가 시작됐다. 청옥고등공민학교 시절 전태일의 은사였던 이희규 씨(당시 교사)는 “명덕초등학교 안에 청옥고등국민학교라는 학교를 세워 당시 어려운 학생들이 무료로 공부할 수 있게 했다. 그때 전태일과 1년 조금 못 되는 시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며 “전태일은 22살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어렵고 힘든 여공들과 노동법을 개정하고자 했으나 어려움이 따르자 나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말을 남기고 어쩔 수 없이 (죽음을 택했다). 오늘 이렇게 와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했다.
전태일의 여동생인 전순옥 전 국회의원은 “3,000명 넘는 시민의 힘으로 마련된 공간에 오니, 온 가족이 모인 것 같다”며 “우리 가족의 고향은 대구이지만, 대구를 떠나 서울, 부산에서도 오래 살았다. 하지만 결국 우리 가족을 대구로 불러 모아 준 게 여러분이다. 이곳이 전태일 오빠, 이소선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고 전했다.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