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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로 HIV 감염인이 HIV 감염의 장애 인정을 위해 제기한 소송이 소송 적격만 따지다 끝났다. 장애인 등록 업무 처분청인 단체장이 아닌 동장이 장애인 등록 서류 접수를 반려한 사건이라, 재판부가 동장의 반려 처분이 무효인 점을 확인했음에도 장애인 등록 신청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게 됐다.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와 HIV장애인정을위한전국연대는 재판부가 HIV 감염인이 겪는 사회적 어려움과 장애 여부에 대해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은 채 종결했다고 규탄했다.
13일 오후 2시 대구지방법원 행정1단독(재판장 배관진)은 HIV 감염인 여운(가명) 씨가 남구청장(주위적 피고)과 A 동장(예비적 피고)을 상대로 제기한 장애인 등록 반려처분취소청구에서 남구청장에 대한 청구는 각하, A 동장에 대한 청구는 인용한다고 판결했다.
여운 씨의 장애인 등록 신청에 대해 반려처분을 할 권한이 없는 A 동장이 반려처분한 사건이라, A 동장의 처분은 무효라는 의미다.
여운 씨 변호인에 따르면 동장의 반려가 무효인 점은 타당하지만, 남구청장에 대한 소송은 각하돼 장애인 등록을 원하는 여운 씨 입장에서는 결국 장애인 등록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게 됐다.
여운 씨의 소송을 도운 HIV장애인정을위한전국연대는 재판부가 소송 요건만 따지고 실제로 HIV 감염인인 여운 씨에 대해 장애인 등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검토는 전혀 하지 않은 점도 문제로 지적했다. 실제로 재판부에 따라 소송 요건이 되지 않아 사건을 각하하면서도 사건 내용 자체에 대한 판단을 함께 제공하는 사례도 있다.
HIV장애인정을위한전국연대는 재판 직후인 오후 2시 30분 대구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판결을 규탄했다.
이들은 국가인권위원회가 HIV 감염을 이유로 한 수술 거부를 장애인 차별 행위로 인정한 점, UN장애인권리위원회가 한국의 장애인복지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대해 HIV 감염 장애인에 대한 고려를 권고한 점에 비춰서도 한국이 여전히 협소한 장애 유형을 기준으로 장애인 등록을 고수하고 있다고도 비판했다.
여운 씨 소송을 대리한 조인영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 권고에 따라 정부가 먼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이었지만 어디도 하지 않아서 결국 당사자가 나선 사건”이라며 “첫 공판부터 약 7개월의 기간에 HIV감염인이 장애인으로 등록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실체적 판단은 이뤄지지 못했다. 당사자를 위한 정의는 또다시 지연됐다”고 말했다.
이어 “장애인 등록 신청은 행정복지센터(동)에서만 받고 있어서 여운 씨 입장에서는 권한 없는 사람이 반려했으리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행정청이 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할 수 있나”라며 “장애인 등록 신청을 다시 해야 한다. 이런 무용한 일을 다시 하게 함으로써 당사자 고통을 더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여운 씨는 “장애인으로 인정돼, 편견 없는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소송을 냈다. 평등한 사회에서 살고 싶었을 뿐인데,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박중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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