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선희 시인 시집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 낭독회

권선희 "타인의 마음을 외면하지 못하는 무당의 운명"
"생의 깊은 내면까지 이르러 진정한 의미의 샤먼이 되어버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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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무가 긴 사랑을 물고 산다
발긋하게 피는 말을 너도 알고 있다
여름은 의혹이나 의욕으로도 충분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사랑은 운다
울음을 비틀고 저무는 오후도
사랑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못한다
다만 명월산 능선 노을이나 낮달에
꽃잎 걸쳐둘 뿐
오로지 한 나무만이 긴 사랑을 물고
절 마당을 가득 채울 뿐이다
고요만이 붉은 염불을 외울 뿐이다
어쩌면 저 나무는 없는 말인지도 모른다
당도하지 않을 사랑인지도 모른다”
_‘해봉사 목백일홍’ 전문

지난 19일 심심책방(대표 최호선) 개점 4주년 기념 권선희 시인 시집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 낭독회가 쎄라비음악다방에서 열렸다.

▲권선희 시인 시집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 낭독회 자리의 심심책방 최호선 대표, 권선희 시인, 이정연 시인_쎄라비음악다방(사진=정용태 기자)

최호선 대표는 “권선희 시인 이번 시집은 심심책방의 베스트셀러 가운데 하나다. 작가는 여성의 눈으로 사람들을 지켜봤고, 자신과 이웃의 이야기를 살아있는 말로 그려냈다. 지금 시대에는 금기지만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이상하지 않았던, 예를 들자면 ‘죽변 효자’ 같은 시편을 비롯해 앞 세대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은 말로 독자에게 전한다”고 말했다.

“봐라 김양아, 울 아부지 오시거들랑 씨븐 커피 말고 비싼 걸로다 팍팍 내드려라 영감쟁이가 요새 통 잡수질 않는다 뱃일도 접었지럴, 몸띠도 시원찮지럴, 할마씨까지 갖다 묻고 적막강산 같은 집구석에 죙일 들앉아 있으믄 부애밖에 더 나겠나 그래도 김양 니가 아부지요, 아부지요 하이 여라도 가끔 들락거리는 기제 돈이 없구나 싶으면 니가 한턱 쏜다 카고 두잔 내와가 같이 마시라 손도 쪼매 잡혀주고, 궁디도 슬쩍 들이대고, 한번씩 오빠야,라고도 불러주그라 복 짓는 맘으로다가 모시믄 그 복 다 니한테 갈 끼다 돈은 을매가 되든 내 앞으로 달아놓고”

_’죽변 효자’ 전문

오후 3시 작가와 김용락, 이철산 시인을 비롯한 독자 20여 명이 두 겹 원형을 그리고 앉은 가운데 이정연 시인의 진행으로 낭독회를 시작했다. 낭독은 안쪽 자리 독자부터 순서대로 시집의 시 한 편을 읽기로 정했고, 첫 낭독자는 시인의 유방암 투병기를 담은 ‘기다렸다는 듯’을 읽은 중년여성 독자였다.

낭독에 이어 그는 시인과 맞닿은 투병 경험을 이야기하며 “친정어미가 벽에 걸린 가발을 챙길 때”라는 시어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독자 10여 명이 자신이 고른 ‘간독’, ‘꽃도둑질’, ‘위험 구간’, ‘못 할 짓’ 같은 시편을 읽고 시인은 그 시편에 대한 이야기를 더하며 100분 동안 낭독회를 이어갔고, 작가 사인회로 막을 내렸다.

장은영 문학평론가는 해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말’에서 “시인의 페르소나이기도 한 ‘무당’은 가장 절박한 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존재이다. 시인이 이 시집의 서두에서 ‘구룡포 무당’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삶의 막막함을 견디지 못해 신을 부르며 그 힘에 기대고 싶은 타인의 마음을 외면하지 못하는 무당의 운명이 시를 쓰는 자신의 운명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요양병원 내 옆 침대, 어린이집 원장이었던 마흔네살 여자
겨우내 밥 한숟가락 못 넘기고 말라가다
벚꽃 피자 죽어 나갈 때
친정어미가 벽에 걸린 가발을 챙길 때

씨벌노무 인생,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시작되었다”

_‘기다렸다는 듯’ 부문

권선희 시인은 “깊이 사유하지 않고 호흡이 짧다. 낯선 언어들의 조합이 쉬워보여 쓰지만 뒤돌아 보면 다 좋진 않다. 조금 더 호흡이 깊이가 있었으면”이라고 말했다.

▲권선희 시인_쎄라비음악다방(사진=정용태 기자)

“바닷가 부족이 입을 달아주었다.
그 입으로 노래했다.

나이거나 너였던 풍파를 타며 살다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것에서 저것으로 건너가는 순정한 음절들
어쩔 수 없다.

사랑하고 말았다고
쓴다. 이제야.”
_ 시인의 말 전문

권선희는 1998년 <포항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구룡포로 간다>와 <꽃마차는 울며 간다>, 산문집 <숨과 숨 사이 해녀가 산다>를 출간했다.

정용태 기자
joydrive@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