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그림을 만나다] ‘헤어질 결심’, 이영철X장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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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주] ‘영화, 시·그림을 만나다’는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영화를 본 후 시인은 그 영화의 이미지를 시로 쓰고, 화가는 그림을 그려 함께 발표하는 프로그램이다. 시와 그림, 그리고 영화는 이미지의 예술이다. 좋은 시를 읽으면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경험을 하셨을 것이다. 좋은 영화 또한 한 폭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시인과 화가가 본 그 영화의 이미지는 어떤 모습일까.

 

‘헤어질 결심’
감독:박찬욱
출연:박해일, 탕웨이
2022년, 러닝타임 138분

산 정상에서 추락한 한 남자의 변사 사건으로 담당 형사 해준(박해일)은 사망자의 아내 서래(탕웨이)와 마주하게 된다.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남편의 죽음 앞에서 특별한 동요를 보이지 않는 서래. 경찰은 보통의 유가족과 다른 서래를 용의선상에 올린다. 해준은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 탐문과 신문, 잠복수사를 통해 서래를 알아가면서 그녀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가는 것을 느낀다. 좀처럼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서래는 상대가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해준을 대한다.

▲ ‘헤어질 결심’은 아직 우리가 겪어 보지 못한 지극한 사랑의 극지점을 선사한다.

‘헤어질 결심’은 살인사건 담당 형사와 용의자인 아내라는 설정으로 다가온다. 영화의 문외한이라도 이 정도는 감이 온다. 남편을 살해했다는 의심을 받는 아내는 미모가 뛰어나고 사악한 팜므파탈이며, 형사는 그녀의 매력에 빠져 허우적댄다는 ‘감’이다. 맞다. ‘헤어질 결심’ 또한 그렇게 간다. 스릴러의 질감에 치명적 로맨스를 드레싱 해놓았다. 그러나 전혀 다른 지점에서 다른 경험을 하게 한다.

깎은 듯한 절벽에서 등반하던 남자가 추락사한다. 젊은 아내 서래는 슬퍼하지 않는다. “마침내”라는 말까지 내뱉는다. 기다렸다는 말인가. 서래는 당연히 용의선상에 오른다. 형사 해준은 그녀를 취조하면 할수록 또 다른 길을 걷는 자신을 보게 된다. 해준은 아내가 있는 젊은 형사다. 자부심도 있다. 그래서 서래는 “품위 있다”고 말한다. 견고한 그는 서래를 통해 무너진다.

모든 로맨스가 그렇듯 운명적이다. 취조실에서 같이 초밥을 먹고 책상을 치울 때는 마치 부부 같다. 서래는 강인한 여성이다. 중국에서 밀입국한 조선족이라 한국어가 서툴다. 그래서 스마트폰 앱으로 소통한다. 공자의 <논어> 글귀를 중국어로 읊는다.

‘헤어질 결심’은 모든 것이 명료하지 않다. 정훈희의 노래 ‘안개’가 영화 내내 흐른다.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를 하염없이 외로이 나는 간다’는 가사. 영화가 그렇다. 로맨스는 염탐하는 수준이고, 스릴러는 서스펜스가 모자란다. 모든 것이 아스라하다. 불면에 시달려 기억마저 명료하지 않다. 사랑이었을까. 애타게 부르지만 정작 “사랑한다”는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 안개만이 자욱한 거리를 걷는 것 같다.

영화는 주인공의 섬세한 심리를 특유의 미장센으로 증폭시키며 관객의 내면에 파도를 일으킨다. 광곽으로 찍은 한 면은 늘 비워져 있다. 거기에는 거울이나 유리가 있어, 또 다른 이미지를 반영한다. 어느 것이 진실인 지 모호하다. 언어도 명쾌하지 않다. 서래의 어눌한 한국어는 더욱 귀를 쫑긋하게 만든다. 그 흔한 “사랑해”라는 말도 없다. 타오르지도 않는다.

흔한 사랑의 도식을 부정하면서 그 어느 것 하나 단정하지 않는다. 해준의 불면은 서래만이 고칠 수 있다. 망원경으로나마 그녀를 볼 때는 잠을 잘 수 있다. 차 안에서 수갑 찬 손으로 서래의 손을 만진 후 단잠을 자는 해준을 보면서 사랑이 아니라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서래는 두 번의 결혼을 하고, 두 번 모두 남편이 죽는다. 두 번째는 잔인하게 피살된다. 모든 용의선상에 오르지만, 그녀는 무죄다. 죄와 벌 또한 의미가 없다. 오직 하나의 생각으로 버텨낸 시간들이다. 자신을 지키며,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모든 것을 건 한 ‘현대인’이다. 그래서 일상화된 악녀 캐릭터를 벗어버린다. 바다 깊숙이 비밀을 묻기 위해 모래를 파헤친다.

‘헤어질 결심’은 워낙 숨겨진 복선이 많고, 다양하게 해석될 은유와 상징도 빼곡하게 박혀 있는 영화다.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가 남편을 잃은 미모의 미망인에게 끌린다는 설정은 참으로 닳고 닳은 소재다. 그러나 ‘헤어질 결심’은 그 상투성을 걷어내면서 아주 우아한 사랑의 원형을 체험하게 한다.

사랑이 싹트고, 진심일까 의심하다 마침내 사랑을 확신한다. 그리고 연인을 지키기 위해 희생으로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영화의 스토리다. 여기에 살인 사건과 가수 정훈희의 ‘안개’, 언어의 모호함, 색깔의 의미, 반지와 수갑 등 갖가지 은유가 쌓이면서 스토리에 절절함을 수혈하고, 캐릭터도 생명을 얻는다. 이런 연출 솜씨는 거의 장인의 수준이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이영철 화가와 장옥관 시인 (사진=김중기 영화평론가)

‘헤어질 결심’을 만난 건 이영철 화가와 장옥관 시인이었다. 이영철 화가는 ‘사랑-그 남자의 바다가 두 번 울었다’는 제목의 150호 대작을 완성했다. 밑바탕은 세 가지 색으로 표현했다. 붉은색과 초록, 푸른색이다. 붉은색은 폭력과 살인의 색이다. 서래가 폭행을 당할 때 입은 드레스 색깔이다. 초록은 영화에서 구원과 안식, 진실의 색이다. 서래가 죽은 까마귀를 묻어줄 때 양동이, 편한 죽음으로 이끄는 약 캡슐, 서래의 노트 표지가 모두 초록이다. 청색은 착시의 색이다. 혼란과 미결, 불확실성을 거느린 색이며 결국 푸른 바다로 이어진다.

세 가지 색 위에 회색 파도가 물결친다. 혼란과 무질서, 정신적으로 붕괴되는 해준의 마음과 종잡을 수 없는 서래의 행동을 상징한다. 이를 배경으로 명징하게 표현한 것이 해준과 서래의 옆모습이다. 헤어질 결심을 한 연인처럼 등을 돌리고 서 있다. 흥미롭게도 둥근 원통으로 말면 둘은 마주 보게 된다.

화가는 “헤어질 결심 또한 헤어지기 싫다는 주인공의 마음”이라며 “서래가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방법으로 그들의 사랑을 미결로 봉인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영화에서는 선택할 수밖에 없는 미결이지만, 두 주인공이 사랑을 완성하고 안식할 것을 기원하는 화가의 마음 또한 담긴 것이다.

가장 달콤한 키스는 아직 해보지 못한 키스라고 했던가. ‘헤어질 결심’은 아직 우리가 겪어 보지 못한 지극한 사랑의 극지점을 선사한다. 특히 엔딩 장면의 비극미는 위세가 대단하다. 평면을 입체적 시각으로 승화시키는 이영철 화가의 시도 또한 그 지극함을 느끼게 해준다.

▲‘사랑-그 남자의 바다가 두 번 울었다’, 이영철, 236cm x 98cm, Acrylic on Printing paper.

장옥관 시인은 시 ‘사랑이 메아리칠 때’에서 “안개가 발목을 감아 오릅니다 / 종아리가 지워지고 무릎이 사라지고 허리가 잠기고 / 아, 당신의 전부가 사라지면 / 마·침·내 사랑입니다”라고 적었다. 서래의 마지막 결심을 ‘감히 영원을 꿈꾸는 사랑’이라고 표현했다. 시인은 흥미롭게 1963년 가수 안다성이 부른 ‘사랑이 메아리칠 때’를 제목으로 했다. 사랑하는 이를 보내고 못 잊는다며 절절하게 부르는 사랑의 노래다. 사랑이 메아리치는 바닷가에서 “서래씨!”를 외치는 해준의 마음이 이 같을까.

영화에서 정훈희의 1967년 ‘안개’가 영화의 메시지를 잘 그려주었다면, 시는 동시대인 1963년 안다성의 ‘사랑이 메아리칠 때’로 변주했다. ‘사랑이 메아리치는 바닷가입니다 / 못 잊는다고 못 잊는다고 / 밟을수록 더 희미해지는 목소리 / 당신이 내 얼굴에 파묻은 사랑입니다’라며 노랫말을 연상시키는 시 구절을 쓰기도 했다.

모래밭을 걷습니다
흑해 연안의 검은 모래밭입니다
당신을 불러봅니다 일구육삼 안다성이 부른 노래,
사랑이 메아리치는 바닷가입니다
못 잊는다고 못 잊는다고
밟을수록 더 희미해지는 목소리
당신이 내 얼굴에 파묻은 사랑입니다
당신이 묻은,
당신을 묻은,
당신의 물음에 내가 답해야 합니다
안개가 발목을 감아 오릅니다
종아리가 지워지고 무릎이 사라지고 허리가 잠기고
아, 당신의 전부가 사라지면
마·침·내 사랑입니다 지울수록 또렷해지는
사랑의 얼굴입니다 어긋난 사랑입니다
사랑을 실어나르는 말의 수레와 구어와 문어의
어긋남까지 죄다 사랑입니다 손끝 하나
닿을 수 없는 피안입니다 축축한 메아리가 발바닥을
적십니다 젖어서 번져나가는 사랑입니다
질문 속에서 피는 꽃입니다
헤어질 결심으로 비롯된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죽음이 필요했을까요
저 모래밭엔 얼마나 많은 비밀이 묻혀있을까요
죽음이 탄생인 사랑
감히 영원을 꿈꾸는 사랑입니다 모래밭에 물거품으로
그려진 당신의 얼굴, 사랑의 미궁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랑은 未遂이요
未決이기에 영원한 현재입니다
하염없는 되풀이에 고요한 사랑이 메아리칠 때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
봉인함으로써 비로서 완성된 얼굴입니다
흑해 연안까지 와 닿는 검은 사랑의 얼굴입니다.

사랑이 메아리칠 때 _ 영화, ‘헤어질 결심’
_ 장옥관

영화가 숨겨 놓은 의미를 찾아보는 것은 늘 흥미로운 일이다. ‘헤어질 결심’이 바람난 남자의 불륜영화라서 불편하다는 관객도 있다. 그러나 감독이 숨겨 놓은 단서를 이해하면 다르게 볼 수 있다. ‘헤어질 결심’에서 캐릭터 이름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해준은 바다를 좋아하고, 서래는 서쪽에서 왔으며, 서래의 남편인 기도수는 숨이 막힐 지경의 소유욕을 자랑하며, 임호신은 절대 서래를 지켜 주지 않는 양아치이다.

이렇게 볼 때 해준 아내 안정안은 전혀 안정할 수 없는 캐릭터이다. 그녀는 원자력발전소에서 근무한다. 원전은 뭔가 터질 것 같은 불안과 공포의 메타포다. 안개의 영향도 있지만, 이 집에는 곰팡이가 핀다. 뭔가 곪고 있다는 것이다. 부부의 섹스 또한 사랑보다는 고혈압과 심장병에 좋다는 것이 정안의 생각이다.

이 주임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결정적이다. 이 주임은 영화가 시작하면서 아내가 언급하는 직장 동료다. 성적인 대화도 나누기에 여자인 줄 알았는데, 결국 남자였고, 그와 함께 집을 나설 때 정안의 손에는 여자 폐경에 좋은 석류와 남자의 정력에 좋은 자라가 들려 있다. 에로스적인 아내의 캐릭터 묘사는 해준의 일방적인 일탈로만 볼 수 없는 감독의 장치다. 불륜이라는 시선으로 ‘헤어질 결심’을 보는 것은 진수성찬의 밥상에서 달랑 반찬 하나만 먹고, 성찬을 논하는 것만큼 편협한 시선일 수 있다.

‘영화, 시그림을 만나다’는 단순히 영화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예술과 인문, 문화와 인간을 찾는 여정이다. 시대를 읽어내는 작가들의 노력이 더 많은 이들과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김중기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