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권력에 대한 아부가 갖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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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년 음력 윤8월 29일 선조의 계비였던 인목왕후의 신위가 종묘에 배향되었다. 조선의 선대 왕과 왕후의 신위를 모신 종묘에 듦으로써, 인목왕후는 조선의 영원한 조상으로 추숭을 받게 되었다. 이를 보면서 인조는 또 다른 숙제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다. 잘 아는 것처럼, 광해군을 폐위키고 반정을 통해 왕이 된 인조의 친부는 왕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인조는 친부를 왕으로 추숭하고 그 신위도 종묘에 배향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았다. 종묘는 원론적으로 전대 왕의 신위를 통해 조선의 역사를 증명하고, 왕조의 권위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인조가 왕이 되었으니, 인조의 친부를 왕(원종으로 추증)으로 추증하는 것까지는 동의할 수 있지만, 실제 왕으로서 국가를 운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묘에 부묘할 수는 없었다. 이는 국가 차원의 공적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는 일로, 사적 효심의 발로가 공적 시스템을 흔들 수는 없었다. 당연히 유생들의 여론뿐 아니라, 탄핵과 감찰을 맡고 있었던 삼사(三司, 사간원·사헌부·홍문관)의 입장 역시 좋지 않았다.

삼사의 반대는 극렬했고, 이로 인해 김광현, 이경절, 이시해 등은 북쪽 변방에 유배될 정도였다. 인조의 친부에 대한 종묘 부묘 의지는 강했고, 이를 막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여론을 더욱 힘들게 했던 사람들은 권력에 기대 왕의 입장에 찬성했던 신료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특히 유백증이 대표적이다. 그는 원래 인조로부터 미움을 많이 받았었는데, 이번 인조 친부 부묘 문제에 찬성하면서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심지어 그는 사간원 장관인 대사간으로 있으면서도 사간원의 여론을 배신하고, 원종의 부묘에 찬성했다. 유백증에 대한 언관들의 비판이 폭발했고, 이를 본 인조는 그를 사간원에서 빼내 이조 참의로 승진시켰다. 이 상황을 본 홍문관은 인사를 단행한 왕을 비판할 수는 없으니, 새롭게 임명된 대사간 홍명구와 정언 성이성을 탄핵했다. 유백증의 이조 참의 임명에 대해 비판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결국 성이성의 뒤를 이어 새롭게 언관이 된 박황은 첫 임무로 이조 참의 인사를 다시 해야 한다면서 유백증을 탄핵하고 나섰다.

조정의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인조는 유백증에 대해 “강직하고 올바르며, 정직하다”라면서 다시 그를 비호하고 나섰다. 친부에 대한 부묘 찬성 만으로 이전에 좋지 않았던 감정마저 모두 털어 낸 듯했다. 인조가 보기에 유백증은 자신과 맞서는 모든 여론과 맞서 꿋꿋하게 자신에게 충성하는 신하였다. 이제 부정적 여론은 조정을 넘어 성균관으로까지 번지면서,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은 회의를 거쳐 유백증을 <청금록>에서 삭제하기로 했다. <청금록>은 유생 명부의 일종으로, 유생들이 일반적으로 푸른 옷깃의 옷을 입는 것에서 유래했다. 성균관 <청금록>에는 성균관에서 공부했던 전‧현직 유생의 이름이 올라 있는데, 여기에 이름이 올랐다는 것은 조선 사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청금록>에는 관직과 이름, 본관, 자, 호, 생년월일과 같은 개인 정보와 더불어, 명부에 적힌 사람의 증조부까지의 가족관계와 외조부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본인 포함 4대까지 양반의 신분을 갖기에 하자가 없는 사람들만 <청금록>에 올랐다는 말로, 이는 양반과 유생으로서 하자가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청금록>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삭제하는 일은 이제 그를 양반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유학 이념 사회에서 양반으로 갖는 그 사람의 명예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도덕적 명분을 통해 자기 신분의 당위를 만들어왔던 조선 사회에서 가장 심한 불명예 가운데 하나였다. 실제 <청금록>에서 삭제되면 양반이나 유생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심지어 그의 아들이나 손자도 <청금록>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이처럼 성균관 유생은 권력의 편을 들면서 옳지 않은 일을 찬성했던 유백증에 대해 <청금록>에서 이름을 삭제하는 극단적 방법을 통해 항의 의사를 분명히 했다. 친부에 대한 사적인 효심으로 국가 시스템을 무너뜨리려 하는 인조의 고집불통도 문제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비호하면서 최고 권력자의 잘못된 판단을 초래한 사람이 더 큰 문제라는 인식이 반영됐다.

조선은 같은 시대 다른 봉건 국가들과 비교할 때, 최고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 시스템이 발달한 나라였다. 왕의 잘못된 결정은 비판 기능을 담당하는 관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이를 기반으로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도 작동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비판과 견제 시스템을 담당하하고 있는 관료들이 권력과 결탁하면, 권력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시스템 자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언관들이 권력과 결탁하여 비판을 멈추는 일은 단순한 개인의 책임 방기가 아니라, 국가의 시스템과 체계를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유백증에 대한 성균관의 비판은 이 지점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