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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아주 평범해서 오히려 비범한 영화가 한 편 있다. 모두가 ‘한국이 싫어서’ 탈출만 꿈꾸는 것처럼 보이는 ‘세기말’ 대한민국에서 ‘내가 제일 불행해!’나 ‘천하제일 불행대회’ 경연장처럼 보일 지경인 한국 독립영화 일군의 흐름에 지친 상태라면 더욱 그렇다. 물론 그런 질식할 것 같은 풍조에는 객관적 진실이 일정하게 전제된 건 엄연한 사실이긴 하다. 그래도 설익은 묘사나 극단화된 설정에 연거푸 노출되다 보면, 보는 이로선 진이 빠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스타일이 되고 만 오만가지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잔인한 세상’의 반영이란 명목 아래 편의적으로 남용되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전작 <나랑 아니면>으로 상당한 주목을 얻었던 박재현 감독은 차기작에 많은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테다. 단편치고는 묵직한, 거의 중편에 가까운 분량과 함께 그야말로 ‘이태리 장인이 한땀 한땀 공들인’ 정교한 수공예품 같은 후속편이 그 증거물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의 짧은 에세이, ‘포르노 영화를 식별하는 방법’에서 아주 명쾌하게 포르노와 영화를 구분해 주는데, 그 정의에 의하면 <모르게>는 명백하게 ‘영화’에 속하는 셈이다. 의외로 에코의 기준에 미달하는 영화가 상당히 많기에 더 돋보이는 대목이다.
아빠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
주인공은 중2 여학생 ‘소은’이다. 소은은 엄마와 함께 산다. 하지만 이혼한 아빠와 그리 사이는 나쁘지 않아 보인다. 영어학원을 운영하는 아빠는 딸의 공부를 종종 봐주곤 한다. 엄마와 아빠는 이혼 후 왕래가 거의 없지만, 딸을 통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듯하다. 소은 역시 지금 생활에 만족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어느 날 아빠는 소은에게 이제 고등학교 준비도 해야 하니 전일제 학원으로 옮기길 권유한다. 엄마와 이미 이야기가 되었다고 한다. 소은은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친다. 그에겐 아빠가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한다는 촉이 왔다. 이혼 후에도 일상을 공유하던 아빠는 이제 소은과 간격을 벌리고자 한다.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바로 아빠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것이다. 소은은 아빠를 미행해 여자친구의 정체를 알아낸다.
‘현서’라는 이름의 아빠 여자친구 역시 작은 영어학원 선생님이다. 소은은 당돌하게 학원 문을 열고 들어가 등록하겠다고 나선다. 현서는 석연찮은 표정을 짓지만, 소은의 둘러댐에 마침내 등록을 허락한다. 이제 소은은 현서의 학원에 다니면서 선생님이 어떤 사람인지, 아빠와 관계는 어느 정도인지 캐내려 애쓴다. 공부에 신경이 쓰일 틈이 없다. 하지만 그런 딸의 미세한 변화는 아빠와 엄마에게 곧 간파될 게 뻔하다. 과연 소은은 들통나지 않고 계속 이 잠행을 이어갈 수 있을까. 아빠의 여자친구와 위험한 학습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어느새 흔한 풍경이 된, 이혼 가정 청소년의 성장을 다루다
앞서 언급한 움베르토 에코의 감별 기준은 대강 이렇다. 정사 장면을 위해 영화의 나머지 분야가 도구적으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포르노’이고, 그렇지 않다면 ‘영화’라는 것이다. <모르게>는 그런 면에서 에코의 구분법상 확실히 ‘영화’에 속한다. 적지 않은 한국의 단편 영화들은 에코의 기준에서 ‘포르노’에 근접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치러야 한다. 성적 묘사가 아니라 자신들의 작품에서 너무나 작위적, 혹은 그저 지나가며 낭비되는 분야가 많기 때문이다. 이는 연출력의 미숙함일 수도, 혹은 자신이 고안한 ‘죽여주는’ 아이템에만 집착하기 때문일지도, 또는 시류에 영합하는 선명한 주제만 있다면 나머진 대충 알아서 넘어가겠지 하는 게으름의 산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르게>는 그렇지 않다.
영화는 이혼 가정 청소년 자녀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런 주인공은 거의 극한상황에 내몰린 희소성 넘치는 특별한 존재였다. 당연히 비극성이 전제되고 주변의 동정 혹은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보는 이들 또한 안쓰러워 미칠 지경이다) 대개 주인공은 이런 조건에 처해 엇나가거나 혹은 건전영화 주인공답게 구김살 없이 성장하거나 중 한 가지 상황에 속하고 말 운명이다. 물론 후자라 해도 오만가지 시련과 시행착오는 필수탑재사항이긴 했다. 현재도 적지 않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관련 캐릭터의 돌출행동이나 일탈은 저런 환경 탓으로 돌려지곤 한다. 오도된 환경결정론의 예시다.
물론 소은이 처한 상황은 이제 갓 10대 중반이 되려는 주인공에게 만만하지 않은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조건은 점점 한국 사회에서 희귀한 사례로만 머물지 않는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이혼한 배우는 한동안 공중파에 등장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대한민국이지만, 뭐든 순식간에 휙휙 변하는 세태답게 이제 이혼과 돌싱(돌아온 싱글)은 드물지 않은 경우가 된 지 오래다. 그런 가운데 그들의 2세 역시 급속도로 쉽게 발견될 정도로 보편적인 존재가 되어간다. 이제는 이혼이 흠결이라기보단, 조금 의외에 속하는 사례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혼 가정의 자녀는 불쌍한 피해자, 또는 그로 인해 비뚤어진 문제아로 강제 규정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작 그들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지 배려보다 과거 인식을 답습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태반이다. 즉 동정이나 관심의 결과라기보다 편의적 갈등요소 혹은 신파의 소재로만 차용되는 활용법이다. 민감한 세태 변화에 미디어가 선도는커녕 한참 뒤처진 셈이다.
그저 속삭이는 것 같지만, 단호함을 놓지 않는 태도의 작업
<모르게>는 바로 그런 한계와 차별화하는 시도 차원에서 주인공의 성장통을 다룬다. 영화 속 주인공은 아직 어리고 미숙하지만, 비슷한 소재를 다룬 타 작품 속 동류와는 확연히 다르게 존중 받는다. 존중이란 게 특별대우가 아니다. 어른들이 주인공 눈치를 보며 달래는 데 촉각을 곤두세우는 게 존중이 아니란 뜻이다. 독립된 자아이자 주체로서 세심하게 상대를 배려하는 대접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에게 주된 영향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3명의 어른 모두 그런 점에서 일관된 태도를 보인다. 소은은 자신의 추리극을 누구도 모를 거라고 순진하게 믿었지만, 실은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른들이 소은의 얕은 계책을 대번에 분쇄하지 않는다. 소은의 심리를 이해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주인공의 주변 환경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그런 개성 측면에서 <모르게>가 점유하는 영화적 자리는 극단적 갈등으로 치닫고 이를 현실의 반영이라 단정하는 숱한 습작들과 확연히 차별화된다. 영화는 현실을 부정하거나 혹은 애써 밝게 보자고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국책홍보영화, 대한뉴스 차원에 머물고 말았을 테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말이다. 현실의 아픔을 낭비적으로 소모하는 부류와도 선을 긋는다. 그런 부류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보다는 그저 소비하는 태도로 치우칠 위험이 있으니 말이다. 이 영화는 모질고 각박한 세상에서 위험천만한 줄타기를 자신의 자리로 설정한다. 사서 고생하는 길이다.
어려운 길을 선택한 감독은 정교한 세공품처럼 영화를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관객은 매 순간마다 인물의 표정 혹은 동선을 놓치지 않고자 오감을 곤두세워야 한다. 물론 그런 고도의 집중력이 강요될 필요는 없지만, 그렇게 봐야만 감독의 사려 깊은 태도를 온전한 감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선택 사항이긴 하지만 꼭 그렇게 봤으면 좋겠다는 권고에 가깝다. 그만큼 이 영화는 거의 모든 장면이 허투루 쓰이지 않는다. 상업영화, 특히 ‘팝콘 무비’와 다른 형태의 관람 태도를 요구받는 셈이다.
10대 주인공은 올곧은 고민과 주변의 도움으로 자란다는 당연한 진리
소은은 지금처럼 비록 한집에 살진 않지만, 아빠의 딸로 지내고 싶다. 그런 주인공의 바람은 한집에 사는 엄마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미묘하게 관측된다. 이 소가족을 떠받치는 기둥인 엄마를 마치 가장처럼 대접하며 소은은 빨래고 밥상이고 전부 책임지는 착한 딸이다. 그렇게 남들과는 조금 다른 가족 형태에서 그는 지금껏 그저 효심이 깊어서만이 아닌, ‘정상 가족’에 최대한 근접한 형태로 구현하려 무의식중에 노력해온 것이다. 하지만 그 작은 세계가 위기에 처했다. 소은은 분연히 떨쳐 일어나 세계를 구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일단 소은은 추리물에 도전한다. 아빠의 여자친구로 의심되는 인물을 미행하고 잠입하면서 심리극까지 펼친다. 구체적인 증거를 수집하고 꾸준히 동태를 추적한다. 일단 조금씩 정보는 파악되는 낌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다음 한 수는? 소은은 여기에서 벽에 부딪힌다. 물론 물리적 장벽은 아니다. 자신이 구축해온 세계를 그저 지켜내기 위해서 사랑하는 아빠의 미래 행복을 방해하는 게 옳은 일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서의 꿈과 사랑을 망치는 게 올바른 태도일까? 소은은 이제 딜레마에 봉착한다.
중2라면 애 취급하기 딱 좋은 나이건만, 우리의 주인공은 뜻하는 대로 어른들이 해주지 않으면 악다구니를 쓰는 ‘금쪽이’들과 차원이 다르다. 그는 아직 서툴긴 하지만,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고자 애를 쓴다. 그런 태도는 사실 당연한 ‘시민’의 덕목이어야 한다. 하지만 요즘 우리 주위에선 마치 멸종위기 보호종처럼 희귀해지고 말았다. 사실 우리 사회는 그런 덕목 덕분에 공동체를 유지하며 돌아가지만, 어느 틈엔가 그런 미덕은 우스워지고 매도당하며 보기 힘들어졌다. 독립영화 역시 적잖게 그런 시류에 물들어간다.
하지만 소은은 그런 세태에 휩쓸리지 않고 도리를 다해 고민하고 판단한다. 거기에 덧붙여 자신의 착하고 선량한 심성을 간직하게 도운 주변 어른들 덕분에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이제 주인공은 나만의 세계를 한 단계 확장하려는 것이다. ‘정상 가족’의 모사 형태를 안간힘 써가며 지키길 초월하는 순간이다. 그 대신에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순수한 가족의 정과 신뢰만 남긴 다음 차례로 진입할 준비를 마치게 된다. 그런 물이 포도주로 변하듯 일어나는 마법이 시험을 통과한 소은에게 깃든다.
대구 독립영화의 중간 허리가 두터워진다는 신호탄
영화는 그저 착한 소은의 성장통과 그를 둘러싼 세계의 미세한 변화 묘사에만 그치진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적당히 늘어지고 지루한, 그냥 착한 영화로 그쳤을 테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영화 전체를 감싸며 도는 선량함에 가려진 미스터리 스릴러 구조를 실제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훈훈한 분위기에 그만 방심하고 안도했을 관객에게 마지막 비수처럼 숨겨둔 승부수를 던지기까지 한다. 물론 전반적 기조를 뒤집을 정도의 파괴력을 설정하진 않았지만, 뒤통수 가볍게 맞는 정도의 충격은 남겨둔다.
그런 비밀장치들 덕분에 만약 스틸 이미지만으로 <모르게>를 재구성한다면, 전혀 다른 장르 영화로 변신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 이는 무척 흥미로운 대목이자, 감독의 연출 능력이 ‘ver.2.0’으로 진입했다는 선포이기도 하다. 그저 ‘착한’ 결말로만 느슨하게 흘러가지 않는 장르 공식의 활용과 시대적 변화의 적극적인 반영이 골고루 조화를 이룬다. 그렇게 꼼꼼히 곱씹고 구석구석 뜯어보기 시작하면 감춰둔 많은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는 흥미로운 결과물이 숙성을 마치고 세상에 등장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던 지역 독립영화 진영이 총력을 기울여 ‘대구영화학교’ 프로그램을 가동한 지 6년째다. <모르게>로 오랜 고민 끝에 묵직한 신작을 선보인 박재현 감독을 포함해 어느새 선배 그룹이 된 1, 2기 기수 창작자들의 후속작이 속속 일정한 성취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확인될 때마다 괜한 보람이 차오르곤 한다. 독립영화의 섬세한 감각을 즐기건, 사회적인 흐름을 반영한 유용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든 <모르게>는 쓰임새가 무척 많은 작업으로 훗날 기억될 테다.
<작품정보>
모르게
IN SECRET
2024 | 한국 | 드라마 | 37분
감독/각본/편집 박재현
출연 김민서(소은 역), 소영미(현서 역), 문승배(도현 역), 원향라(소희 역)
프로듀서 김재은
조감독 장주선
스크립터 김주리
촬영/조명 전상진
미술 김주리, 조성림
동시녹음 김태휘
음악 전일환
사운드 김수현2024 25회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 대상, 관객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