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플라톤 추방] 남자는 물 속의 물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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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사대부들은 모군(慕君)을 노래했지 여성에게 사랑을 바치는 시는 쓰지 않았다. 이런 전통은 서양에서 건너온 새로운 양식의 시를 받아들인 근대 초기의 한국 시인들이 사랑을 노래하려고 할 때 장애가 됐다. 김소월과 한용운은 연애시의 전통이 없었던 나라에 사랑을 노래해야하는 어색함을 여성 화자를 차용하는 것으로 무마했다. 남성 시인이 남성의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하기 시작한 것은 유치환부터다.

채호기의 <지독한 사랑>(문학과지성사, 1992)은 사랑과 성애를 하나로 본다. 표제작을 보자. “기차의 육중한 몸체가 순식간에 그대 몸을 덮쳐 누르듯 / 레일처럼 길게 드러눕는 내 몸 // 바퀴와 레일이 부딪쳐 피워내는 불꽃같이 / 내 몸과 그대의 몸이 / 부딪치며 일으키는 짧은 불꽃 // 그대 몸의 캄캄한 동굴에 꽂히는 기차처럼 / 시퍼런 칼끝이 죽음을 관통하는 / 이 지독한 사랑” 마지막 네 번째 연 두 행을 생략한 이 시의 화자는 “기차”로 은유된 남성이며, 화자가 상대인 여성은 “동굴”로 은유되었다.

이 시집에는 남녀의 성기나 성애를 연상시키는 환유로 가득하다. “나 이제 그대의 몸 속으로 / 내 몸을 밀어넣어 / 그대와 한 몸이 되느니”(‘몸’), “그대의 살 속으로 들어가서 / 그대의 상처 속에서 / 비로소 자신을 세우는 못이여”(​‘못’), “나는 그대의 가슴에 꽂힌 칼 / 분홍빛 여린 살꽃을 찢고 / 그대의 몸 속, 거기 / 서늘하게 있네”(‘상처’) 이런 사례를 모두 나열하려면 지면이 모자랄 것이므로, 마지막으로 ‘뱀’의 첫 연과 마지막 연을 제한 2~4연을 보자. “기름 단지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 손아귀에 잘 잡히지 않는 뱀의 / 길고도 미끄러운 화사한 징그런 몸 // 구멍의 어둠 속에서 나와 어둠의 구멍 속으로 / 들락날락하는 / 온갖 사물의 몸 속의 암흑을 탐사하는 / 구불구불하고 예민한 영혼이여! // 뜨거운 여름 그토록 차가운 뱀이 / 나무의 터진 구멍으로 완벽하게 사라지듯 / 내 몸은 뱀처럼 그대의 끓는 어둠 속으로 / 빨려들 듯 숨어버리느니 / 이제 없다! 나는” 뱀은 형태상으로 남성 성기를 완벽하게 재현하며, 구멍 역시 여성의 성기와 부합한다. 이 시집에는 뱀이 등장하는 시가 여섯 편 쯤 되고, 구멍과 틈은 수시로 나온다.

일반적인 성애에서 남녀가 맡은 역할은 남성이 주도권을 쥐고 여성이 거기에 반응하는 것으로 정의 된다. 그런 점에서 <지독한 사랑>은 남성 성기중심주의를 고스란히 재현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채호기의 에로티즘은 뭇 포르노가 재연하는 남성의 제국주의 욕망을 재생산하는 것과 무관하다. 사랑(성애)을 술에 비유하고 있는 ‘몸 밖의 그대 1’에 따르면, 음주의 주인은 술을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 술이듯(“내 몸 속에는 그대가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죽었다고 하지만 내 몸 속에는 그대가 온전히 살아 있습니다. ··· 나는 없고 오로지 그대만이 있습니다.”), 에로티즘의 관장하는 이는 여성이다. 시인은 그 까닭을 명료히 적어 놓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것은 여성의 잉태 능력과 상관되어 보인다. ‘맑은 꽃들을 뱉아내듯, 나를 낳아!’의 첫 연과 마지막 연을 보자.

“솟았다 꺼지는 너의 몸의 유혹, 굴곡의 발아들임, 나는 자꾸만 너의 몸 속으로 자맥질한다. 너의 몸 안의 두근거림, 그물코를 빠져나가는 피라미드처럼 파닥거리는 내 피, 바닥 없는 너의 몸을 나는 한없이 빠져들어간다. // ··· 네 몸에서 안개가 피어오르는 이른 새벽, 희부윰한 정적 속에서, 통증도 없이 맑은 꽃들을 뱉아내듯, 나를 낳아! 너의 살, 너의 피와 체온을 가진 나를 낳아다오!”

표제작 ‘지독한 사랑’의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남녀양성을 암시한다. “내 자궁 속에 그대 주검을 묻듯 / 그대 자궁 속에 내 주검을 묻네” 에로티즘을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라고 말한 철학자처럼, 시인은 “나 그대 몸 속으로 들어가려면 / 죽음을 지나야 한다는 것 그때 알았네”(‘몸 밖의 그대 2’)라고 쓰고, “죽음을 치고 튀어오르는 섹스!”(‘햇빛의 볼륨을 높여라!’)라고도 쓴다. 그와 같은 언명의 가장 극한 이미지가 ‘눈’에 나온다. 빨갛게 달아오른 쇳덩이 위에 내리는 눈(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