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왜공, 감정이 더 큰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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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倭館의 역사는 대마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왜적이 조선 해안가까지 그 영역을 넓히면서 시작됐다. 세종은 조선 해안을 괴롭혔던 왜적을 소탕도 하고, 대마도까지 쳐들어가 무력으로 진압도 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관리 가능한 곳을 지정해 그들의 활동을 용인하되, 불법적인 일은 일본 스스로 단속하도록 하는 게 효과적이라 판단했다. 세종 때 삼포, 즉 부산포와 내이포, 염포에 각각 왜관을 설치했던 이유다.

왜관이 경상도 땅인 부산 지역에 설치되면서, 경상도 백성들에게는 새로운 세금이 생겼다. 왜관에서 사용할 잡다한 물품과 사신이 왔을 때 이를 맞아야 하는 경비, 그리고 일본과 교역에 필요한 물품이다. 이른바 ‘왜공’이다. 일본과 외교는 국가 차원의 문제였지만, 조선의 세금 수취는 특정 지역에 이를 부과했고, 왜공은 경상도에 부과된 특별세가 됐다. 원칙적으로는 다른 세금을 그만큼 제해 주어야 했지만, 기록을 통해 이러한 사실이 있었는지 확인은 되지 않는다.

임진왜란 그 자체는 재앙이었지만, 이로 인해 왜관이 혁파되면서 왜공도 잠시 없어졌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실제 임진왜란으로 사지에 내몰렸던 백성들을 대상으로 왜공을 거둘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이도 오래 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1607년, 일본의 강한 요청으로 국교가 다시 정상화됐고, 두모포(현 부산시 동구 초량동 일대)에 왜관이 설치되었다. 한 곳에만 왜관이 설치되어 다행일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상도 백성은 다시 왜공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임진왜란 후 왜관이 설치된 지 11년이 지난 1628년, 예안현(현 안동시 예안면 일대) 현감은 왜공 납부를 위해 백성들을 부지런히 독촉하고 있었다. 예안현처럼 작은 현의 현감 입장에서는 경상감사를 비롯한 상급자에게 어떠한 평가를 받는지에 따라 이후 관직이 결정되므로, 상급자들로부터 부지런하고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 힘겨운 노력을 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예안현 백성들이 보기에 예안현감은 ‘성실해도 너무 성실했다.’

상례에 따르면 원래 왜공은 가을걷이를 끝낸 후 거두었다가, 이듬해 설을 쇤 후 왜관에 보냈다. 가을걷이가 끝나야 보낼 물품 마련도 비교적 수월했고, 비록 그것이 왜공이지만 반대하는 마음마저 조금은 넉넉해지기 때문이었다. 실제 가을걷이가 끝나야 마련할 수 있는 물품도 있었으니, 예안현감의 닦달이 이르기는 일렀다. 당연히 백성들 입장에서는 볼멘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예안현감의 닦달에도 불구하고, 들기름과 농어, 그리고 벌꿀은 각기 다른 이유로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잘 아는 것처럼, 햇들깨 수확은 음력 8월은 넘어야 가능했고, 이것을 가지고 기름을 짜서 납부하려면 최소 두어 달은 더 있어야 했다. 그런데 들깨 수확도 하기 전에 기름부터 내어놓으라 하니,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었다. 소소하게 왜공에 포함되는 물품들 가운데 이와 같은 게 한둘이 아니었지만, 예안현감은 이를 살필 생각이 없었다. 없는 물품을 만들어서라도 내야 할 판이었다.

예안에서 생산되지 않는 농어는 또 다른 문제였다. 농어를 직접 잡을 수 없는 예안 고을에서는 농어를 구입할 곡식이나 포를 거두어서, 이것으로 적절한 크기의 농어를 구입해서 납품해야 했다. 그런데 당시 봄 보리 농사가 흉년인지라, 겉보리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게다가 농어가 잡히는 철도 아니어서, 농어 한 마리 값도 만만치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농어 한 마리를 사려면 겉보리 두 말을 지불해야 했는데, 이게 평소 몇 배를 상회하는 가격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예안현감은 크고 튼실한 농어만을 납품하라 요구했다. 왜공 특성상 이전 현감들이 대충 중간 정도 크기에 마릿수만 맞춘 것과 비교하면, 완전 딴판이었다.

꿀 역시 또 다른 이유로 문제가 컸다. 원래 벌꿀은 전세 대신 벌꿀을 세금으로 내는 민호民戶(이를 정역호라고 불렀다)가 따로 있었고, 당시 그들에게서 미리 거둔 꿀이 두 섬이나 되었다. 이 양이면 예안현에서 내는 왜공 양으로는 충분했는데, 알고 보니 관아에서 이미 사적인 용도로 써버려서 남은 게 없었다. 관아 창고 관리 부실이 문제였다. 결국 왜공을 거둔다는 명목으로 관아에서 이후 필요한 꿀까지 다시 부과했고, 꿀을 납품하는 민호 입장에서는 이미 납부한 벌꿀을 다시 내야 했다. 이미 낸 세금마저 사적으로 소진하고 이를 다시 백성들에게 거두니, 수탈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상황 파악도 못 한 채 불가능한 물품을 내라 닦달하고(들기름), 가격이 내린 뒤 적당한 물건을 사도 될 일을 굳이 서두르는 바람에 백성들 부담만 가중시켰으며(농어), 관아 창고 관리를 부실하게 하여 그 책임을 백성들에 떠 넘기기까지 했다(벌꿀). 그야말로 무능한 관료가 출세욕을 가지면 어떠한 일이 생기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상급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마음만큼 백성들의 경제적 손실도 컸다. 그런데 백성들의 화는 경제적 손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1628년이면 임진왜란이 끝난 지 채 30년도 지나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국토는 10년 가까이 왜군의 군화에 짓밟혔고, 백성들은 왜군의 칼에 도륙됐다. 전쟁이 끝난 지 이제 겨우 한 세대쯤 지났는데, 일본 사신을 대접하고 왜관을 운영할 비용까지 세금으로 거두어 가니, 이는 단순한 경제적 문제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예안현감은 자기 백성들을 닦달하여 더 좋은 물품을 납부하게 하고 일본 좋은 일만 하고 있으니, 예안의 선비 김령은 “정녕 이 나라가 백성을 위한 나라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