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례는 익명으로 해야 하고, 가능한 당사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써주세요.
이런 부탁은 기사 쓰는 기자를 참 난감하게 만든다. 발언한 사람 또는 사건 당사자의 실명 언급은 기사의 신뢰도를 높인다. 하지만 피치 못 하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할 때가 있다. 당사자가 내부 고발자여서 혹시 모를 피해를 입을 수 있거나 무죄 추정의 원칙이 발현될 때 등이 그런 때다.
19일 저녁 대구 달서구 민주노총 대구본부에서 열린 연속집담회 <삼평리에서 강남역까지> 참여자들이 증언한 내용은 어떤 경우에 속할까. 이날 참여자들은 “‘그 자리’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명칭으로 한 집담회를 진행했다. 참여자들은 집회 현장이나 농성장 등에서 경험했던 ‘불편’한 경험을 증언했다. 주로 증언자는 여성이었고, 그들은 웃다가 울었고, 혼자 울다가 같이 울었다.
A씨는 농성장에서 겪은 이야길 하면서 울었다. A씨는 농성장에서 만난 남성 활동가가 왜 안아 달라는지 알 수 없었고, 왜 나한테 밥을 달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싫다고 말했고, 나는 당신에게 밥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그는 변함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A씨는 울었다.
B씨는 말하면서 자주 주저했다. 이야기해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말을 하면서도 용어 선택에 신중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저 혼자 민감해서, 혼자 불편하게 느꼈던 게 아닌가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이 몸담은 단체의 ‘남성’ 관계자(기사에서는 회원 및 활동가를 아울러 이렇게 표현한다)로부터 ‘비싸게 굴면 안 된다’는 문자를 받고 모멸감을 느꼈다. 하지만 모멸감을 풀 수 있는 곳은 SNS밖에 없었노라고 고백했다.
C씨는 왜 대통령의 여성성을 부각하는 욕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대통령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점을 부각해 욕하는 집회 현장의 불편함을 이야기했다.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도, 집회 현장에서는 통로가 없다고도 지적했다. 장애인에 대한 비하 발언은 비교적 수월하게 제기할 수 있지만, 여성에 대한 비하 발언은 제기도 쉽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D씨는 단지 어리다는 이유로 이뤄지는 칭찬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했다. ‘어린데도 이런 일에 참여하다니, 예쁘다. 기특하다. 참하다’. 청년과 청소년을 ‘소비’하는 방식은 진보적 운동을 하는 곳이나 그렇지 않은 곳이나 다르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어린’ 사람을 향한 무조건적인 반말도, 뒷정리는 젊은 사람이 도맡아 하는 상황도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또는 어리기 때문에 당하는 ‘당연한’ 불편함이 진보 운동 사회 내에서도 다르지 않게 일어난다는 증언이 2시간 동안 이어졌다.
신박진영 대구여성인권센터 대표는 “이런 계기들이 그래서 소중하다”며 “가해자 개인이잖아요. 그 인간 변하기 쉽지 않을 거예요. 사람 하나 변하는 건 쉽지 않지만, 오히려 세상이 변하는 건 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운동이 의미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또, “악순환을 끊자고 모이는 거고, 저는 아까 말씀하시는 것들을 들을 때 염려도 되고 동감도 되고 뭔가를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며 “최소한 함께 활동하는 단체 활동가들에게라도 고민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고 더 큰 일이 벌어지면 그땐 정말 이야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 5일부터 시작된 연속집담회는 청도 삼평리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성폭력 및 위계폭력 등을 해결하기 위해 구성된 삼평리송전탑건설반대운동에서일어난성폭력및위계폭력해결을위한모임(해결모임)과 뉴스민이 함께 주최했다. 1차 집담회는 비공개로 삼평리에서 있었던 폭력 사안에 대한 증언이 이뤄졌고, 2차부터는 공개 집담회로 진행된다. (관련기사=‘삼평리 송전탑 반대 운동 속 성폭력’ 공론화…“대의에 묻힌 권리”(‘16.7.7))
3차 집담회는 오는 8월 3일 오후 7시 같은 장소에서 ‘평등한 운동사회를 만들기 위한 실천선언 만들기’를 주제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