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오랜 정치 보복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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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3년 음력 6월 정기 도목정사, 즉 관료 인사가 있었다. 인사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인물은 남우후南虞候에 임명된 무관 이병천이었다. 우후라는 직책은 도의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에 소속된 관직으로 종3품에서 정4품직이다. 병조판서 조상진이 그에 대한 여러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정과 능력을 믿고 강하게 밀어붙인 결과였다.

그러나 모든 인사가 그렇듯, 누군가 강하게 밀어붙였다는 말은, 그만큼 반대도 많았다는 의미이다. 특히 병조 내에서 이병천을 두고 이러저러한 수군거림이 있었고, 이 인사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다. 의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좌의정과 우의정마저 이병천을 남우후로 기용할 수 없다면서, 부임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이병천 입장에서는 얼마 만에 낙점된 벼슬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만큼 방해하는 이도 많았다.

이병천의 인사에 대해 이렇게 말이 많은 이유는 무려 14년 전인 1789년에 있었던 일(노상추는 1788년의 일로 기록했지만, 실제 이 일은 1789년 12월에 발생했다) 때문이다. 정조 재위기였던 1789년, 당시 이병천은 궁궐을 호위하던 금군禁軍의 호군護軍으로, 부장과 함께 혜화문을 지키고 있었다. 당시 우의정은 김종수金鍾秀로, 이때 그는 영문 밖으로 행차해야 하는 일이 있었던 듯하다. 궁궐 수비 임무를 맡아 궐문을 비울 수 없었던 이병천은 우의정 행차에도 불구하고 멀리까지 배웅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렇게 되자 김종수는 이를 빌미로 하인을 시켜 이병천과 그의 부장 송윤계宋允桂를 성밖으로 끌어내 구타하고 모처에 가두어 둔 일이 있었다.

당시 김종수는 기호 노론 가운데 벽파의 거두로, 조정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던 인물이다. 정조의 신임을 받은 채제공과 당색은 달랐지만, 정조 역시 그의 위치를 인정하고 여러 관직을 제수하면서 그에 대한 신임을 표했다. 그런데 이 일로 그에 대한 비판이 빗발치기 시작했고, 특히 언관을 중심으로 강한 탄핵 상소들이 날아들었다. 왕의 신임이 두터워지면서, 왕을 능멸할 정도로 교만해졌다는 게 비판의 이유였다.

실제 김종수의 행위는 궁궐을 지키는 호군을 사사롭게 구타한 것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호군은 궁궐 문을 수비하는 인물로, 비록 작은 문이라 해도 궐문의 수비를 담당한 사람이다. 이 때문에 그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표신標信을 보내 그 문을 지킬 사람과 교체하게 한 후, 그를 잡아가야 했다. 그러나 김종수는 이를 지키지 않았고, 이로 인해 궁궐 문의 수비가 한나절이나 뚫려 있었다. 궁궐의 경호가 뚫려 있었다는 의미이다. 정조는 이 일을 ‘임금을 멸시하고 조정과 맞서 겨루면서 명예와 잇속을 차지하려는 심보’로 규정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유배를 청하는 많은 상소에 대해 정조는 그 당위를 인정했다. 그러나 대신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파직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김종수 입장에서는 이병천으로 인해 관직을 잃은 꼴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조치 이후 불과 며칠 뒤, 김종수는 바로 사면되었다. 다시 며칠 지나지 않아. 본래 직책에 서용되었다. 정조 입장에서야 충분한 경고를 주었다고 생각한 결과였지만, 이병천 입장에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일이었다. 이후 이병천은 권력을 잡은 노론 벽파들에 의해, 우의정을 향해 거짓 증언을 한 거짓말쟁이로 낙인 찍혔다.

14년이 지났으면 잊혀질 만도 한 일이었다. 그러나 벽파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이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병조판서 조상진 역시 자신이 밀어붙인 인사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반대가 심할지는 짐작도 못했던 듯하다. 그러나 그 반대의 정도는 점점 심해져, 당시 부수찬 서장보는 왕에게 상소를 올려 이병천에 대해 ‘극악한 역적 이사성李師晟과 매우 친한 사이’이므로 관직에 임용해서는 안 된다고 막아설 정도였다.

그러나 이 상소는 왕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은 순조 입장에서도 코웃음이 나올 일이었다. 실제 이병천은 이사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고, 당시 이사성의 역모로 관직을 잃었던 비슷한 이름의 이사상李思尙과 먼 10촌 족숙 관계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순조가 “남의 벼슬길을 막고 논박하려면 신중해야 한다”면서 서장보를 파직할 정도였을까! 그러나 여전히 병조 내에서는 반대 여론은 쉽게 식지 않았고, 이 일을 기록한 노상추는 이병천이 이러한 상황을 뚫고 남우후로 부임하지는 못할 것으로 추정할 정도였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에 밉보인 댓가는 꽤나 가혹하다. 이미 14년이나 지난 일인데도 불구하고, 권력을 잡은 노론 벽파는 김종수의 파직에 대한 정치적 보복을 지속했다. 누가 봐도 김종수의 잘못이었지만, 권력을 잡은 이들은 이병천을 거짓말쟁이로 취급했지, 김종수의 행위를 반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이병천에 대해 권력에 대항한 결과가 어떠한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하게 보복했던 것이다. 하긴 요즘도 권력자의 심기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만으로 상상할 수 없는 정치 보복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보면, 옛날이 더 심하면 심했지 나아야 할 이유는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