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천년왕국처럼 누려온 권력이 도전받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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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는 독립영화인들에겐 출발하는 작업이다. 단편 하나 연출해보지 않고 장편으로 바로 ‘입봉’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누군가에겐 장편영화로 가는 필수 코스이자 중간 정거장으로, 누군가에겐 ‘감독’ 데뷔라는 소망을 성취하는 계기로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대개 대중 앞에서 자신이 연출한 영화를 공개하는 순간, ‘감독’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레 붙는다. 그래서 간혹 영화를 하고 싶은 거냐, 감독이 되고픈 거냐 곤혹스러운 질문이 던져지기도 한다. 그만큼 자기 이름이 각인된 영화 작업은 출발이자 궁극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일단 ‘감독’으로서 자신의 영화를 관객 앞에 공개하는 ‘맛’에 빠지면 다음번에는 좀 더 보완해서 더 잘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마치 중독된 것처럼 차기작 고민에 돌입하게 된다. 하지만 기회는 늘 주어지진 않는다. 많은 감독이 자신의 작업과 함께 시간이 지나면 잊히곤 한다. 사실 대다수 감독이 그런 운명을 겪는다. 영화를 만드는 이는 여러 조건의 변화와 함께 비약적으로 늘어났지만, 그들의 작품을 소개할 경로의 확대가 비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여러 사정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활동이 중단된 감독이 적지 않다. 지역에서도 그런 사례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물론 누군가는 모두가 원하는 걸 할 순 없지 않냐며 반문할 수 있다. 필자 역시 영화를 업으로 삼는 건 심각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할 일이라 주변에 늘 설교하곤 한다. 하지만 단편영화의 경우엔 가능한 기회가 확대되어 그 안에서 다양한 시도가 펼쳐지길 기원하는 편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이 그저 공허한 액자 속 금언이 아니라면 실행되어야 한다. 그 속에서 경험을 쌓으면서 늦게 개화하는 재능은 분명히 존재할 테고, 그런 가능성을 발굴할 기회는 많을수록 좋지 않은가.

멀쩡한 전학생의 등장이 초래한, 폭력 교사에게 닥친 불행의 전조

‘봉남’은 교사다. 영어 수업을 맡고 학생을 지도한다. 여기까지면 쉽게 볼 수 있는 유형에 속한다. 하지만 조금만 더 관찰하면 그가 뭔가 ‘이상하다’ 싶어진다. 영어 교사이지만, 정작 봉남의 영어 실력은 수업에 별 관심이 없는 학생들조차 수군거릴 정도로 기준 이하라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학생 대다수는 그의 영어 수업에 무관심하다. 애초 공부에 담쌓은 학생들뿐 아니라, 그럭저럭 학업에 참여할 법한 학생들도 별 기대감이 없어 보인다.

▲봉남은 학생 지도를 핑계로, 수업 시간에 던진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서슴없이 제자들을 엎드려뻗쳐 시키고 방망이를 휘두른다.

그런 봉남은 교사 사회 내에서도 ‘사이코’라 불리며 그리 잘 어울리지 못한다. 식사 시간에 늘 혼자 밥을 먹는다. 임시로 부임한 후배 교사가 말을 걸거나, 동석하려 해도 별로 반기지 않는 데다 의아해하는 임시교사에게 주변에서 뭘 몰라서 그런데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할 정도다. 그러거나 말거나 봉남은 학교생활에 불만이 없어 보인다. 그에겐 모든 스트레스를 풀 수단이 학교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비장의 방책이 학생들을 훈육한다는 명목으로 휘두르는 야구방망이라는 것이다. 그는 학생 지도를 핑계로, 수업 시간에 던진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서슴없이 제자들을 엎드려뻗쳐 시키고 방망이를 휘두른다. 요즘 학교 상황이라면 폭력 교사로 대번에 징계당해도 할 말이 없을 수준이다.

그렇게 혼자만의 고립을 즐기던(?) 봉남에게 요즘 거슬리는 일이 하나 생겼다. 전학생 ‘희철’의 출현이다. 전학생은 겉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다. 품행이 방정하고 늘 미소짓는다. 성적이나 기타 기록도 매우 양호한 편이다. 이 정도면 전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없다. 하지만 봉남은 희철의 존재가 묘하게 불편하다. 따지고 보면 희철이 별로 사고를 쳤다랄 게 없다. 전학생이라 교실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봉남이 그동안 당연한 것처럼 구축한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반항하는 것도 아니다. 봉남은 그래서 더 얄밉고 짜증이 난다.

괜히 트집을 잡아가며 봉남은 희철에게 불합리한 처사를 일삼는다. 점점 더 전학생 존재가 그의 평화롭던(?) 학교생활 최대의 장애물인 기분이다. 괜히 학교에서 허용된 교복 착용 기준을 막무가내로 시비 걸고, 교사의 권력을 이용해 징벌한다. 불합리한 처사에 합리적으로 이의를 제기해도 듣지 않는다. 일단 수직적 권력 관계 덕분에 그의 윽박지름은 먹혀든 것 같다. 약간이지만 분이 풀린다. 하지만 뒤이어 반격이 벌어진다. 봉남의 비효율적 수업 시간에 알아서 기며 그저 시간 가기만 기다리는 급우들과 달리 희철은 눈치 없이 반론을 제기한다. 그 내용은 누가 봐도 타당한 의견이다. 그러나 봉남은 신성불가침의 권력이 침범당한 기분이다. 그만의 세계가 무너질 수 없는 일이니 반격해야 한다. 그렇게 갈등은 폭발하고 만다.

왜 주인공은 폭력교사로 전락했는가? 아니 어쩌다 ‘어른’ 되길 실패했나

<홈런>은 사실주의보다는 심리 스릴러에 가까운 전개를 취한다. 현실감을 강조하는 이들이라면, 기본적인 영어 발음조차 어눌한 영어 교사의 존재부터 사실적이지 않다고 지적할 테다. 비록 영화가 만들어진 시간대가 몇 년 전이라 해도 21세기 대한민국 교육현장에서 저렇게 막무가내로 대놓고 학생들에게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는 교사라면 무사할 리 없다. 학원폭력과 교사의 학대는 이미 더 치밀하게, ‘강약약강’으로 사각지대에서 암약하는 형태로 바뀐 지 오래다. 그래서 조금만 영화를 보고 있자면 <홈런>이 교육현장의 현실을 고발하려는 목적과는 별개의 의도를 지녔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구나 쉽게 지적할 수 있는 빈틈을 굳이 전제한 감독의 생각은 무엇일까?

▲봉남은 청소년 시절 야구부에서 활동했지만, 결정적 순간에 범타를 치며 팀의 패배에 일조한 아픈 기억이 있다.

봉남은 어릴 적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존재다. 그는 청소년 시절 야구부에서 활동했지만, 타자라면 누구나 꿈꿀 홈런은 고사하고, 결정적 순간에 범타를 치며 팀의 패배에 일조한 아픈 기억이 있다. 그런 경험을 겪는다면 주변의 원망도 원망이지만, 기회를 날려버린 당사자의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 된다. 하지만 자신의 실패로 팀이 참패한 순간에 누구도 그를 돌아보거나 위로하지 않는다. 코치는 어린 제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패배가 너의 책임이라 호통치기만 한다. 아마 그 계기로 좋아했던 야구를 집어치웠을 테다. 그렇게 접은 야구의 추억은 이제 봉남에겐 제자들을 구타하는 야구방망이로만 남은 셈이다.

교사로서 작은 권력을 교실에서 거머쥔 주인공은 어른이 되지 못한 채 그날의 야구장에서 성장이 멈춰버렸다. 용케 운이 좋았는지, 수저를 물고 태어난 덕분인지 모를 사유로 겉보기엔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지위를 갖췄지만, 그의 일상은 그런 조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루한 민낯 자체다. 오로지 미성년 제자들에게 야구방망이를 휘두를 수 있는 권력만이 그에게 기쁨과 보람을 준다. 아마 봉남은 승진도 명예도 별로 관심이 없을 테다. 그저 자신이 청소년 시절 놓친 홈런을 제자들을 상대로 날리는 것에 집착하며 자위하는 것 외에 삶의 목표나 자아실현 수단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른이 되지 못한 존재에게 제도권이 부여한 형식적 권위는 폭력교사의 방패가 되어준다. 이전 세대라면 종종 접하곤 했던 폭력교사 중 ‘질서 악’ 존재가 아니라 감정조절 장애를 지닌 이들의 ‘혼돈 악’ 속성이 봉남에겐 극단적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그는 눈치도 없고 욕심도 별로 없기에 그저 자신이 거머쥔 교실 안의 독재 권력이 영속되기만 기대한다. 하지만 덧없는 희망일 뿐이다. 외부에서 상식과 합리로 무장한 전학생이 침입하는 순간, 그만의 낙원은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권력을 사수하기 위해 정치적 거래나 회유를 할 능력조차 봉남에겐 부재하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 반장보다 뒤떨어지는 수준이다. 소설 속 반장이 현실 권력 관계를 우화적으로 상징하는 데 비해, 봉남은 가해자가 된 피해자에 가깝다.

그래서 지금껏 무차별 폭력으로 군림하던 봉남만의 왕국은 순식간에 붕괴 직전에 처한다. 야구방망이로 홈런을 날리는 유아기적 퇴행에 머물던 주인공은 희철의 (정작 본인은 전혀 의도치 않은) 공세에 어쩔 줄 모르며 발악에 가까운 대처로 일관할 뿐이다. 자신도 위기 상황이라는 것쯤은 잘 안다. 정신과 클리닉을 받아가며 그는 대책을 묻지만, 결국 스스로 자신을 구해야만 한다. 그러나 세상물정 아는 어른이 되길 거부했던 봉남으로선 너무 버거운 일이다. 결국에 그는 파멸과 비극의 주인공이 될 운명인 것이다.

어른이 되지 못한 이들에게 던지는 일말의 연민으로 기억될 작업

기이한 것은 좋게 볼 구석이 전무한 주인공 봉남을 그리는 영화의 태도다. 물론 이야기는 부조리극에 가까운 형태로 비현실적 학교 풍경과 주인공의 위태로운 심리 상태를 가감 없이 그려낸다. 하지만 대개 학원물이 선과 악, 구체제와 저항군 구도로 흘러가는 구도라면 선 혹은 정의의 편으로 그려져야 할 전학생 희철은 미스터리 존재로 머문다. 그가 다른 의도를 지녔다거나 초현실적 재앙의 현신이라는 근거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그저 입바른 소리를 자주 하고 동네 분위기 파악이 덜 된 외부의 침입자일 뿐이다. 하지만 그 묘사 방식과 태도는 그런 희철에게 묘하게 불길한 기운을 덧씌운다. 이는 <홈런>의 주인공이 명백히 봉남이라는 선언 격이다.

그렇다면 왜 봉남을 굳이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일까? 일반적으로는 당연히 그가 빌런을 담당하고, 학교의 모순과 구습을 혁파하는 선봉장이 된 희철을 주인공으로 삼을 테다. 그렇다고 봉남이 매력적인 악역이 될 가능성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봉남을 좋아하거나 동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가 개심하거나 회개할 여지도 끝까지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타개하고자 궁리해 보지만, 결국 성질 참지 못하고 파멸로 향하는 롤러코스터에 오르고 만다. 이쯤 되면 감독의 의도가 무엇일까 모호하기 짝이 없을 지경이다.

▲봉남은 희철의 존재가 묘하게 불편하다. 따지고 보면 희철이 별로 사고를 쳤다랄 게 없다. 전학생이라 교실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봉남이 그동안 당연한 것처럼 구축한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것뿐이다.

발상을 다르게 해보자. 분명히 영화의 주인공은 봉남이다. 피카레스크 소설의 주인공처럼 전혀 동정하거나 참작해줄 구석 찾기 힘든 그에게 감독은 무엇을 투영하려는 걸까? 그렇다고 이 밉상 주인공에게 억지 해피엔딩 혹은 개과천선으로 새사람이 될 기회도 굳이 제공할 생각이 없는 영화인데 말이다.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영화도, 통쾌한 복수에 성공하는 장르 영화의 쾌감도 일절 욕망하지 않은 <홈런>이 전하려는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추리의 시간이다.

결국 남는 건, 봉남의 현재형 민폐는 용서할 수도, 변호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그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 잠복한 ‘괴물’의 탄생 배경, 그리고 그런 존재에 대한 한 줄기 동정과 연민의 환기일 테다. 그들의 죄는 용서할 수 없다. 변명의 여지도 딱히 수여되기 어렵다. 하지만 어떻게 괴물이 탄생했는지 고찰하고 혹시 내가 저런 경우라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한 번쯤 성찰은 해보자는 태도의 발현이 영화 전체를 감싼다.

이런 태도는 양쪽에서 협공당하기 딱 좋은 방향성이다. 그러나 감독은 굳이 그 길을 택했다. 본인이 회색지대에 머물며 선명한 흑백 대립을 빗겨나 있거나, 혹은 그렇게 선악의 대비와 단죄 과정이 갖는 폭력성에 질색한 경험을 가졌을지 모를 일이지만, 속사정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감독의 의도를 굳이 어렵게 잡은 연출 기회에도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인 건 비상한 각오와 결기가 바탕이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권진애 감독이 이후 신작을 세상에 보여주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다. 요즘처럼 단편영화가 영화제 공모를 위해 획일화된다는 우려 속에서 독특한 기운을 간직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감독의 차기작을 기다리며 작은 응원의 마음을 담아.

<작품정보>

홈런 Home Run
2017 | 한국 | 드라마 | 15분25초
감독/각본 권진애
출연 홍상표(박봉남 역), 김현목(김희철 역), 류왕주(국어선생 역), 박지수(임시교사 역),
권영상(교감 역), 손동표(어린 봉남 역), 전호성(의사 역), 한상훈(코치 역) 외
촬영 최창환
PD 김현정
동시녹음 조유정문
조감독 이다운

2017 18회 대구단편영화제 개막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