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교육이 허락되지 않는 자들] (8) “저는 질라라비야학이 진짜 좋아요”_이정모 이야기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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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대구에는 장애성인을 위한 질라라비장애인야학이 있다. 초등학교, 중학교 인정은 이뤄지고 있지만, 고등학교 인정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질라라비장애인야학 학생의 구술을 5월부터 8월까지 연재할 예정이다.]

[학교교육이 허락되지 않는 자들] (1) “이제 고등학교 가고 싶어요!”
[학교교육이 허락되지 않는 자들] (2) 모르고 살아온 삶_박경화 이야기 ①
[학교교육이 허락되지 않는 자들] (3) 모르고 살아온 삶_박경화 이야기 ②
[학교교육이 허락되지 않는 자들] (4)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_이상근 이야기①
[학교교육이 허락되지 않는 자들] (5)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_이상근 이야기②
[학교교육이 허락되지 않는 자들] (6) 계속 공부하고 싶어요. 진짜로!_김태완 이야기①
[학교교육이 허락되지 않는 자들] (7) 계속 공부하고 싶어요. 진짜로!_김태완 이야기②

이정모 씨는 47세의 지적장애인이다. 대구에서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중학교 때 큰 교통사고로 인해 장애 판정을 받은 후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없었다. 이후 여러 직장을 전전하며 학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다시 야학 중학 과정에 입학했다. 몇 번의 가족을 잃은 아픔으로 가슴 한구석이 늘 외로웠지만, 새롭게 용기를 내 도전하고 꿈을 꾸는 정모 씨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 글은 질라라비장애인야학 조계숙 활동가가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들

저는 옛날에 대구 동서변 거기 있잖아요. 거기서 살았고, 학교는 성북국민학교 다녔어요. 어릴 때는 침산동에 살다가 조금 컸을 때 그쪽으로 이사 갔어요. 1989년에는 국민학교를 졸업했고예. 국민학교 다닐 때는 반 친구들하고 다 같이 잘 놀았어요. 딱지도 치고 구슬치기도 하고 친구들이 빌려온 만화책을 보면서 놀았어요. 보이스카우트 있잖아요. 거기서 놀러도 가고 그냥 뭐 평범했지예.

중학교는 복현동에 있는 대구 북중학교를 다녔어요. 2학년 때 큰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기억은 잘 나지는 않는데, 자가용 차가 저를 치고 달아났다고 들었어요. 뺑소니죠. 뺑소니! 동산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었어요. 팔도 다치고 머리를 많이 다쳤다고 했어요. 그래서 중학교를 휴학했어요. 그러고는 학교는 계속 안 다니고예.

그 뒤에 엄마랑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된다고 캐가지고 그때 검사받고 장애 판정을 받았어요. 지적장애예. 아버지는 인제 장애인이 됐으니깐 학교 다닐 필요가 뭐 있냐 카고, 엄마는 그래도 중학교는 나와야 된다고 카면서 두 분이 많이 싸우셨어요. 그때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어예. 남들은 다 학교 다니고 졸업하는데 나만 졸업도 못해서 많이 속상했어요. 학교 안 가면서 계속 집에만 있었어요. 그냥 TV나 보면서 집에서 지냈어요.

우리 집에서는 제가 장남이에요. 한 살 어린 남동생이 하나 있었고, 여동생이 있어요. 남동생은 하늘나라에 갔어요. 암으로요. 폐암 있잖아요. 그게 걸렸어요. 폐 쪽에 문제가 생겼는데 병원에 가니 심장까지 번졌다고 캤어요. 경북대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제가 한번 가봤어요. 엄마랑요. 동생이 많이 아프다고 카더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입관하는 날에는 진짜 많이 울었어요.

▲이정모 씨가 지갑에 넣어 다니는 가족들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왼쪽), 화기애애상을 받고 있는 이정모 씨. (사진=질라라비야학)

그라고 몇 년 후에 엄마가 피부암으로 돌아가셨어요. 당뇨 있잖아요, 그거. 당뇨가 원래 있었는데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고생을 많이 했어요.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는 진짜 무서웠어예. 다른 (친구) 집에 가면 다 그렇지는 않거든예. 친구 부모님은 자식들한테 잘했는데, 우리집은 안 그랬어요. 엄마가 많이 힘들었어요. 아버지는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안 찾고 싶어요.

마음고생 많이 해가지고 엄마가 큰 병에 걸린 것 같았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안 보고 싶어요. 저는. 엄마 장례식 때 많이 슬펐어요. 카톨릭 병원에서 장례식을 했어요. 진짜 많이 슬프고 힘들었어예. 대명10동에 살 때 그때 갑자기 쓰러졌고 그걸 제가 직접 봤거든요. 여동생이 119에 전화를 했어요. 그래서 병원에 옮겼는데, 바로 돌아가셨어요. 이런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한테 한 번도 자세하게 이야기 안 했어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말하면 아픈 기억이 생각나잖아요. 남은 가족은 이제 여동생과 저뿐이에요.

성주에 있는 산소, 그 나무에 하는 수목장 있잖아예. 거기에 남동생과 엄마가 같이 있어요. 명절이 되면 여동생이랑 여동생 식구들과 같이 보러 가요. 꽃 사들고요. “내 왔다” 카면서 이야기하고 남동생한테도 보고 싶어서 왔다고 이야기해요.

여동생은 결혼한 지 오래됐고 아이들이 4명이나 있어요. 저한테는 조카가 4명이라예. 매제는 사람이 착하고 내한테도 잘 해줘요. 나를 “형님!”이라고 캐요. 지금은 여동생과 매제가 저를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반찬도 해주고 한번씩 집에 와서 청소도 해줘요. 청소는 나도 할 수 있는데 돈 관리하는 거는 어려워서 동생이 해줘요.

옛날에 안 좋은 일도 있었어요. 아는 동생이 반월당에 놀러 가자고 캐가지고 갔는데, 거기서 다른 애들을 몇 번 만났거든예. 아는 동생이 소개시켜 줬어예. 여자애들도 있고 내보다는 어리니깐 다 동생이라예. 장애인은 아니고예. 그래서 주말에 몇 번 만나고 했는데, 근데 그중에 어떤 애가 내보고 핸드폰 요금 3만 원 대신 내라카고. 안 그러면 고발한다고 캐가지고 스트레스를 제가 많이 받았어예. 저는 그 애 핸드폰 쓴 적도 없었는데 내한테 핸드폰 요금을 내라고 전화 와서 욕까지 했어요. 그때 매제가 (그 애한테) 대신 전화 해가지고 그런 일은 나쁜 일이고 이야기하고 핸드폰을 쓴 증거를 대라고 캐가지고 돈 안 내고 해결이 잘 됐어요. 또 얼마 전에는 집 계약기간이 다 지났는데 이런 것도 여동생이 와서 도와줬어요.

▲수업시간에 집중하는 모습, 왼쪽은 태블릿으로 공부하는 정보수업 시간, 오른쪽은 이정모 씨가 좋아하는 과학시간. (사진=질라라비야학)

새로운 결심: 질라라비장애인야학

20대 때는 직장도 좀 다녀봤어요. ‘샤니’ 거기 있잖아요. 빵 만드는 공장요. 논공에 있었는데 거기서 빵이 들어오면 저는 차에 싣는 일을 했어요. 좀 오래 했어요. 월급도 많이 줬는데 용역회사에서 뭐 떼고 뭐 떼고 해가지고 내한테는 얼마 안 줬어요.

자동차 부품 만드는 회사도 다녔어요. 차 같은데 보면 휠 있잖아예. 그거 만들고 고무 끼우는 것도 했어요. 닥치는 대로 그냥 일했어예. 국비 학원도 다녔고 경산직업전문학교에 전기 실습하는 것도 배웠어요. 다마(전구)를 갈아 끼우는 것도 배웠어요. 여러 군데 직장도 옮겨 다녀보니깐 중학교 못 나와서 취직도 잘 안되는 것 같더라고예. 사람들도 무시하는 것 같고 해서 다시 학교 다녀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생겼어요.

옛날 야학이 신천동에 있었잖아예. 그때 잠깐 다녔어요. 컴퓨터도 배우고 뭐 다른 것도 배웠지만, 그때는 중학교 졸업장 주는 그런 게 없었거든예. 지금은 중학교 공부하고 있어요. 도움이 많이 되지예. 당연히. 과학이나 영어 공부가 진짜 재미있어요. 과학은 실험 같은 거 하면 재미있고 새로운 것도 많이 알게 되었고예. 얼마 전에 서문시장에서 외국인을 만났거든예. 제가 영어로 인사도 하고 말도 걸었어요. 또 지하철 3호선에서 외국인을 만났는데 제가 먼저 “헬로, 익스큐즈미, 나이스 투 미츄” 이렇게 하니깐 좋아하더라고요. 한국 사람이 외국 사람한테 함부로 욕하면 우리나라 이미지가 나빠지잖아요. 옛날에 TV에서 봤어요. 그래서 좋은 말만 했어요. 그러니깐 외국인들이 웃어줬어예.

이제 졸업을 앞두고 있어요. 조금 있으면 중학교 졸업해요. 학교생활이 여기서 끝날까 봐 걱정돼요. 고등학교 가야지요. 당연히!

<기록자의 말>
중학 3단계 1반 수업에서 가장 활기차고 열정적인 학생을 찾으라고 한다면 모두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바로 이정모 씨다. 이처럼 정모 씨는 학교가 좋고 공부하는 것이 즐거운 학생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인터뷰를 통해 그의 삶을 잠시 엿보니 조금은 이해가 되고 공감이 갔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상실감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힘들어했을까 생각하니, 듣고 있는 내내 마음이 찡했다. 하지만 그 깊은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바로 정모 씨가 꿈꾸는 미래일 것이다. 그리고 그 미래를 위해 한 발짝씩 내딛고 있는 정모 씨에게 박수를 보낸다.

“선생님, 저는 질라리비야학이 진짜 좋아요”라는 정모 씨의 진심 어린 말이 질라라비장애인야학이 지속될 수 있는 이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