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말꼬리에 매달린 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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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관 정유검의 행태는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너무 심했던 듯하다. 이 기록을 남겼던 노상추 뿐만 아니라, 동료 선전관들이 모여있는 선전관청의 여론마저 정유검의 편이 아니었다. 사정을 들어보면, 그도 그럴만했다.

1793년 음력 7월 1일, 선전관 정유검은 명릉明陵(숙종과 인현왕후‧인원왕후의 능) 근처 벌고개 길의 형세와 소현묘昭顯墓에 심은 나무 상태를 조사해 보고하라는 명을 받았다. 업무 출장이니, 당연히 병조에 속한 역마를 타고 길을 떠났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말이 제대로 쉬지 못했던 탓인지, 가는 길에 금세 지쳐 퍼져 버렸다. 고속도로에서 자동차가 고장 난 것과 같은 난감한 상황이었다. 역참에 들려 말을 교체해야 했는데, 역참보다 경기 감영이 가까웠던 모양이었다. 급한 마음에 경기 감영부터 두드렸다.

그러나 임무가 급했던 정유검과 달리, 경기 감영 소속 아전인 영리營吏는 쉽게 말을 내어 줄 수 없었다. 일단 감영 내 준비된 말도 없었지만, 얼마 전 역마를 이용하는 규정이 새롭게 반포되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 사안을 조사했던 경기 관찰사 정창순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영리는 정유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리 왕명을 받은 행차라 해도, 여기에서 말을 교체할 수는 없습니다. 병조의 역마를 타고 경기역의 해당 역참에 가서 교체한 후 임무를 수행하는 게 맞습니다. 그렇지 않고 경기 감영에서 제가 사사롭게 교체한다면 말을 내어 주는 것과 받는 것이 같은 죄이고, 그러한 말을 함부로 타는 것도 동일한 형법의 적용을 받습니다.”

영리의 말이 이치에 부합했지만, 정유검의 태도로 보아 그의 말(言)이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나가지는 않았던 듯하다. 하긴 다짜고짜 젊은 선전관 하나가 감영에 들이닥쳐 말을 내달라 하니, 영리인들 말이 곱게 나가지는 않았을 터였다. 안 그래도 자신이 타고 왔던 말로 인해 짜증이 나 있던 정유검은 이러한 영리의 태도에 결국 화가 폭발했다. 당시까지 쌓인 짜증과 화가 모두 영리를 향했다.

당연히 온갖 욕설이 난무했을 터였다. 그리고 영리의 보고에 따르면 몇 차례 강한 폭력도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정유검은 화가 덜 풀렸는지, 영리의 상투를 풀어 자신이 타고 온 말꼬리에 묶었다. 영리는 그렇게 10여 보를 끌려가야 했다. 이후 정유검은 영리의 상투는 풀어주었지만, 자신의 지친 말 앞에서 영리를 달리게 했다. 모화현 사현에 도착해서야 경우 경기 감영에서 급히 마련한 역마가 도착했고, 그제서야 영리는 정유검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영리 입장에서 신분제 사회의 설움이 없었던 적은 없었겠지만, 이리도 지독하게 겪은 것은 처음이었을 터였다.

경기 감영 입장에서도 영리를 풀어주기 위해 급히 말을 마련했지만, 사안 자체는 쉽게 묵과하고 지나칠 수 없었다. 아무리 조정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견된 선전관이라 해도, 규정을 어기면서 말을 요청한 것도 문제였는 데다, 이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상식에서 벗어난 방법으로 처벌까지 했으니, 보통 일은 아니었다. 특히 경기 관찰사 정창순 입장에서는 상투를 풀어 말꼬리에 매단 행위는 쉽게 용인할 수 없었던 듯하다.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나 역모에 해당하는 중범죄를 지었을 때나 풀어 헤칠 수 있는 상투를 풀어 말에 매달았으니, 이는 신분의 차이와 상관없이 최소한의 지켜야 할 선을 넘어 버린 일로 판단했다. 경기 관찰사가 직접 선전관의 형벌을 청하는 보고서를 왕에게 올린 이유였다.

일이 커졌다. 이 보고를 받은 정조 역시 말을 교체하는 규정을 어긴 것도 문제였지만, 그것보다 머리채를 말꼬리에 매단 일에 대해 ‘해괴하다’면서 병조판서에게 정유검을 심문하게 했다. 결국 정유검은 곤장 7대에 자신이 행한 일을 낱낱이 아뢰어야 했다. 물론 그렇게 한 이유에 대해서는 변명으로 일관했지만 말이다. 자신은 새로 반포된 규정을 알지 못했고, 영리가 불손한 태도로 거부해서 분을 이기지 못해 그러한 일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백에도 불구하고, 정유검은 병조에서마저 동의를 얻지 못했다. 병조판서는 정유검이 이미 관직에 있은 지 1년이나 되었는데, 바뀐 규정을 몰랐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영리의 태도가 행여 문제가 있다 해도 곤장이나 태를 칠 일이지 상투를 풀어 말꼬리에 매달지는 말았어야 했다. 최대한 정유검의 입장에서 이해하려 해도, 선을 넘은 정유검의 행위에 대한 병조의 판단 역시 싸늘하기만 했다. 병조판서는 왕에게 의금부로의 이첩을 건의했고, 정조 역시 이를 받아들였다.

잠시 분을 참지 못했던 정유검의 행동은 결국 흥해군 유배로 일단락 되었다. 당시 선전관은 왕을 지근거리에서 시위하는 무관들로, 무관계의 청요직이다. 품계는 3품에서 9품까지 그 직책에 따라 다양했지만, 선전관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무관으로서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국가의 규정을 함부로 어기거나, 신분 차이가 있는 사람이라 해도 다른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모욕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조선이 아무리 신분제 사회라고 해도, 이렇듯 해서는 안 될 일이 있었고, 이는 미래가 창창한 선전관이라 해도 예외일 수 없었다. 최소한의 질서를 갖춘 국가라면, 사람에 대한 존중이 기본적인 문화로 작동하고, 어떤 신분보다 법이 우선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