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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때는 세상을 바꿔보겠다며 사회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운동가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줄어듭니다. 사회운동을 하는 운동가들은 오늘도 사람을 만나고, 제도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려고 애를 씁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운동권 특권 세력 청산은 시대정신”이라며 자신과 대립하는 정치인과 싸우기 위해 운동가들을 몽땅 폄훼하기도 합니다. 운동권이라는 어원은 독재정권 시기 민주화운동에 나선 학생운동가를 고립시키기 위해 만든 용어였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기득권으로 살아가지 않았고, 또 일부는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오늘날까지 사회운동을 이어가는 운동가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2020년대 사회운동을 시작한 운동가들도 있습니다. 2024년, <뉴스민>은 매달 1980년대 사회운동을 시작한 운동가,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운동가들의 삶과 더 나은 공동체를 바라는 운동가의 고민을 듣기로 했습니다.
‘마을 공동체’라는 단어가 운동의 영역에 들어온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마을 안 사람들이, 마을과 마을이 서로 관계를 맺고 함께 사는 게 자연스러웠던 때도 있었다. 아파트 중심의 도시개발을 거치며 ‘마을 만들기’, ‘마을 가꾸기’ 같은 말이 등장하다가 2000년대 후반부터는 마을 공동체 관련 민관 네트워크가 활동을 주도했다. 이후 정부나 지자체도 ‘마을’ 정책을 추진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운동으로 조직되던 ‘마을 운동’은 관 주도의 보조사업 중심으로 재편됐다.
이 흐름 속에서 마을활동가들은 고민했다. 보조금을 받아 행정의 일을 보조하는 걸 넘어 운동으로서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건 쉽지 않았다. 고민은 진행형이다. 도시 개발은 필연적으로 마을을 분화하고 낙후지역에 상실감을 던진다. 구현주는 책 ‘공동체의 감수성’에서 “운동이 제도의 영역으로 발을 담그면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운동의 자율성이 축소되는 지점이다. 때문에 공동체 만들기가 ‘운동’에서 ‘사업’이 될 때, 주민 주도의 운동 지향성을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달성토성마을의 마을라디오 활동가 이동민(33)의 고민도 이 근처를 유랑한다. 대구 서구 비산2,3동은 도심과 가깝지만 개발에서 제외된 오래된 동네다. 골목이 많은 특징을 살린 공동체 활동이 활발한 편이지만, 여전히 낙후된 동네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이동민은 이 곳에서 8년간 활동했다. 벽화를 그리거나 텃밭을 가꿨으며, 미니 다큐와 라디오 방송을 만들었다. 봉사활동부터 사회적기업 창업, 마을방송국 창립멤버까지의 길다면 긴 여정을 풀어낸 그는 마을 운동에 대한 명확한 전망을 제시하기보단 ‘지금을 기록하는 것’의 의미를 강조했다. 자신을 마을활동가라 정의한다는 이야기도 여러 차례 했다.
Q. 마을 입구부터 이어지는 골목의 벽화와 화분이 인상적이었어요.
대구 서구 비산 2,3동은 골목정원으로 잘 알려져 있어요. 10여 년간 주민들이 크고 작은 정원을 가꿨거든요. 정원이라 해서 거창한 게 아니라 자신이 키우던 화분을 대문 안에서 밖으로, 골목으로 내놓으면 공동체 활동이 시작된 동네입니다. 2016년부터 매년 4월마다 마을 구성원들이 직접 기획하고 참여하는 축제도 열고 있어요.
1970년대에는 인근에 방직공장이 많았대요. 그런데 섬유사업이 정리된 다음 별다른 개발사업이 없었죠. 달성토성이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개발 제한이 걸렸어요. 가까운 시내에선 재개발이 진행됐지만 여긴 오래 낙후된 상태로 머물러 있었어요. 그러다 2012년에 국토교통부 도시활력증진 사업에 선정돼서 골목이 많은 동네 특징을 살리자고 주민들이 뜻을 모았죠. 오래된 반양옥이 많다 보니까 화분을 키우는 집이 많았거든요. 화분을 골목으로 내면서 주민 간 교류도 활발해지고 최근에는 공동텃밭도 키우게 됐죠. 도심 속 시골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요. 전체 주민 대비 고령인구가 30%에 육박할 정도로 전반적인 연령대가 높은 편이에요.
Q. 비산 2,3동이 고향인가요?
네. 어릴 때 20년 정도 살았죠. 그다음엔 건넛마을인 비산 6동에 살았으니 동네를 잘 알아요. 지금은 북구에 살지만 일은 쭉 이 동네에서 했죠.
Q. 마을에 사는 것과 마을 활동은 별개잖아요. 마을 활동은 어떻게 접하게 됐나요?
2016년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봉사 동아리를 시작했어요. 동아리를 같이 하던 선배가 비산동에서 벽화를 그리자고 제안했어요. 지금은 좀 수그러들었지만 그때는 벽화봉사가 많았어요. 당시 벽화전문가 양성 과정도 듣고 마을에서 1년 정도 봉사활동을 했죠. 권기주 작가님에게 벽화전문가 양성 과정 수업을 들었어요. 작가님이 수업보다는 주민들과 함께 작업을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단순한 봉사를 넘어서 마을활동에 대한 고민을 같이 했죠.
Q. 벽화봉사 다음을 고민하게 된 건 어떤 계기였나요?
대학에서 사회복지사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원래 전공은 어문계열인데, 사회복지를 복수전공했죠. ‘뭘 해야 할까’ 고민이 많아서 2년 정도 졸업을 연기했던 시기에 벽화봉사로 비산2,3동 마을과의 접점을 넓혀 갔어요. 우연히 대구시민공익활동지원센터에서 하는 공모사업을 통해 지역 문제 해결 모델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하게 됐죠. 벽화를 그리는 과정에서 다양한 시도를 했어요. 버려진 물건을 이용해 업사이클링 벽화를 그리거나 시각장애인을 위한 벽화를 그리는 활동이죠. 프로젝트는 잘 끝났지만 활동의 지속성에 대해 고민하게 됐어요.
마을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싶은데 단순한 동아리 수준으론 한계가 있었어요. 벽화를 그리는 봉사활동으로 마을 주민과의 연관성을 가져가는 한 축과 DIY 키트 개발, 조형물 제작, 축제 기획, 문화예술교육 등 영리사업을 하는 한 축으로 창업을 했어요. 제가 대표를 맡았죠.
사회적기업가 육성 사업을 신청해 덜컥 선정된 게 컸어요. 사회적기업에 진입하기 전에 지원하는 사업인데 이번 정부 들어서 없어졌죠. 당시 ‘사업 설계 콘텐츠가 너무 비영리적이다’, ‘비산동에 국한하지 말고 대구 전역이나 전국의 사업모델로 가져가면 어떻겠냐’는 평가를 받았던 기억이 나요. 발표날이 아이러니하게도 대학을 졸업하는 날이었거든요. ‘그때 떨어졌다면 마을에 남아 있었을까, 사회복지사를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해요.
Q. 창업을 한 이후에도 달성토성마을 기반으로 활동한 이유는 뭔가요?
이 질문을 매번 받아요. 당시엔 뚜렷한 목표가 있어서 이 길을 선택한 게 아니라, 같이 벽화를 그리고 교류한 주민들의 마음이나 관계가 좀 더 오래 지속됐으면 하는 바람이 컸던 것 같아요. 그때 함께 한 시간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거든요. 프로그램이 끝나고 지원이 끊기게 되면 자칫 그동안 해왔던 게 유에서 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엔 창업 과정에 주민들도 함께 했지만 사회적기업가 육성 사업에 참여하고 본격적으로 주식회사 소미다미를 만드는 과정에선 저와 권기주 작가님, 김다솜 선생님 3명이 주축이 됐어요. 주로 비산동에서 활동했지만 그 외 지역에서도 활동했고요. 이 과정에 주민들이 서운해하기도 했어요. 저희가 쓰는 공방이 비어 있으면 ‘어디 갔다 왔냐, 다른 지역에서 일하고 왔냐’ 한마디 하는 식인 거죠. 저희가 마을에 소속된 건 아니지만 마을에서 역할을 맡고 있는 만큼 좀 더 집중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크셨던 것 같아요.
Q. 반대로 소미다미 구성원도 섭섭한 마음이 들었을 것 같아요.
저나 구성원들이 그런 말에 크게 개의치 않는 성격이기도 하고요. ‘시간이 지나면 이해해 주시겠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정말 시간이 해결해 주더라고요. 저희를 외지인, 떠날 사람으로 봤다가 4~5년 차를 넘어가면서 믿어 주셨어요.
Q. 소미다미에서 마을방송국 활동으로 넘어오게 된 계기도 궁금해요.
소미다미가 주식회사에서 협동조합을 전환되던 2021년까지 대표를 맡았고 지금은 예술행정국장 겸 이사를 맡고 있어요.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내부적으로 고민이 많았죠. 사업이 축소되면서 방향성을 새로 정립한 시기였어요. 저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도시락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무렵 마을에 방송국이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비산2.3동 주민자치회 이숙현 간사님이 마을방송국 매니저 교육을 추천했죠. 교육을 듣고 마을방송국 제작팀장으로 일하게 됐어요. 저와 이갑연 대표님, 두 명이 방송국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대표님은 달성토성마을협동조합 총괄팀장을 맡고 계시기도 해요.
그 무렵에 대구 4개 지역에서 마을방송국이 공동개국했어요. 동구 안심마을방송국, 서구 달성토성마을방송국, 남구 앞산마을방송국, 수성구 수성마을방송국이죠. 현재는 대구 전역에 9개 마을방송국이 함께 하고 있어요. 마을방송국은 지역주민의 참여로 내가 사는 지역, 본인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방송이에요. 주민들이 직접 프로그램 기획, 출연, 제작을 해요. 대구 마을공동체라디오의 대표격인 성서공동체FM은 잘 아실 거예요. 성서공동체FM이 자체 주파수가 있는 공동체라디오라면 마을방송국은 유튜브, 팟캐스트를 통해 방송을 출력한다는 차이가 있어요.
Q. 달성토성마을방송국에는 어떤 프로그램이 있나요?
4개의 콘텐츠가 제작되고 있어요. 목표는 월 1회 제작인데, 아직은 각 팀들이 직접 제작해서 올리는 과정을 어려워해요. 자리를 잡아가는 중입니다. 두 명의 중학생 DJ가 책, 음악을 소개하는 ‘달과 별의 스토리’, 서구지역 사람들 이야기를 담은 ‘사람책 에세이’, 최근에는 지역주민과 차문화를 나누는 차담팀이 진행하는 ‘차방차방’ 등이 있어요.
그중에도 가장 보람 있는 콘텐츠는 ‘골목정원 이야기’입니다. 제가 맡고 있는 프로그램이기도 한데요. 골목정원에 참여한 주민들을 인터뷰하는 콘텐츠예요. 저부터도 골목에서 그냥 지나치던 어르신들과 가까워졌다고 느껴요. 처음엔 단순히 기록을 위해 시작했는데 인터뷰에 참여해 준 어르신들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를 생기면서 더 필요성을 느끼게 됐어요.
Q. ‘달성토성마을 공유텃밭 가지 실종사건’도 재밌게 봤어요.
제가 연출, 시나리오, 촬영, 편집 전방위적으로 참여한 로컬휴먼드라마예요. 2022년 제작해 제4회 미디어창작콘테스트 우리동네 ESG이야기 시민영상콘텐츠 제작지원작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죠.
큰 흐름은 공유텃밭에서 사라진 가지를 주민들이 찾는 이야기예요. 2021년은 마을이 도시재생 모범사례, 주민공동체가 활성화된 지역이라고 소개되던 시기인데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던 시기이기도 해요. 조손가정의 자녀가 할머니를 살해한 사건이었는데 당시 한 가정이 흩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우리 공동체가 잘 하고 있는 게 맞나’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가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걸 찾아보자는 취지로 시나리오를 썼죠.
Q. 마을방송국 매니저로 일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나요?
소미다미에서 교육이나 봉사활동을 할 때보다 주민들과 더 끈끈해짐을 느껴요. 그전에는 ‘저희 프로그램에 오세요’라고 접근했다면 이젠 그들이 주인공인 활동을 지원하는 입장이니까요. 보람은 더 커요.
다만 제가 하나부터 열까지 만들어 가다 보니 ‘이게 맞나’, ‘잘 가고 있나’라는 의심이 들 때가 많아요. 위에 선배가 있어서 배우고 검토받으며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아니니까요. 젊은 활동가 유입이 잘 안되거나 재정구조상의 어려움도 있죠. 지금은 제 급여가 대구마을방송국네트워크(대구마을공동체미디어문화정책네트워크) 간사일을 병행하는 것에서 나와요. 대구지역의 마을미디어를 지원하는 기관이 모여 구성된 조직이에요. 대구마을방송국들의 콘텐츠 제작을 지원하거나 분기에 한 번씩 모여서 현안을 공유하고 공동 사업을 기획하는 식으로 운영돼요.
마을방송국마다 편차가 커요. 저희처럼 사실상 실무자가 한 명인 방송국도 있고, 협동조합을 만들어 수익모델을 만든 방송국도 있고요. 전반적으로 마을공동체 사업이나 마을미디어 사업이 줄어들고 있어서 더 어려운 대외적 상황도 있어요.
Q. 함께 할 동료를 찾는 게 어렵다는 말에 공감해요. 이 인터뷰 기획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소미다미에서도 계속해서 함께 할 팀원을 구했지만 쉽지 않았어요. 유대관계를 쌓는 데 문제가 있었을 수 있고 마을운동 자체의 뚜렷한 전망을 보여주지 못해서 일 수도 있죠. 그런 여건을 만들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어요. 마을방송국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결국 지속성을 위해선 사람이 계속 유입돼야 하는데, 마을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활동은 앞으로 더 어려워질 것 같아요. 고향에 머물러서 일하기보단 대체로 큰 곳을 찾아 떠나잖아요. 제 친구들만 해도 대구 안에서 옮겨 다녀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경제적인 면이 크거든요. 아파트 중심으로 생활 환경이 변화되다 보니, 20~30대가 마을활동을 하러 달성토성마을에 오면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있구나’라고 반응해요. 동네에서도 청년을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주민 단위에선 쉽지 않죠.
Q. 그럼에도 마을활동가로 사는 이유는요?
엄청난 뜻이 있진 않아요. 저와 마을 주민들이 서로 기대고 있다는 게 계속 활동을 이어가는 동력이 돼요. 벽화봉사를 매주 오던 처음, 마을과 교류를 시작한 처음으로 돌아가도 같은 결정을 할 것 같아요.
20대에 사회복지사를 준비하다가 활동가의 삶을 선택한 이유가 뭘까 고민해 봤어요. 사회복지사 실습을 하던 시기에 복지관에서 몇 주 동안 봤던 초등학생이 있었거든요. 아침에 출근을 하는데 그 친구가 복지관 근처를 서성이고 있더라고요. 학교 재량 휴업일인데 어른들이 다들 일하러 가서 갈 곳이 없었던 거죠. 복지관에서도 오전에는 케어할 수 없었는데 다행히 제가 출근길에 봐서 돌봐줄 수 있었어요.
그때 고민이 시작됐던 것 같아요. 사회복지기관의 역할이 분명 있지만, 그건 결국 정해진 시스템 속에서만 움직이는 한계가 있잖아요. 내가 하고 싶은 건 그 시스템이 놓치는 부분을 살피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벽화 봉사를 하면서 그게 마을공동체라는 확신이 들었죠. 아직도 찬찬히 방법을 찾아가는 단계예요.
김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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