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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1일 대법원은 아사히글라스(AGC화인테크노한국, AFK)가 파견법을 위반했다고 선고했다. 같은 날 해고노동자들이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 대해서도 아사히글라스가 노동자(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22명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선고했다. 이 판결로 2015년 5월 29일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7월 30일 해고된 노동자들은 만 9년 만인 2024년 8월 1일 공장으로 돌아간다.
대법원 판결로 공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오직 판결 덕분일까. 복직을 앞둔 노동자 22명이 보낸 9년은 단순하지 않았다. 회유와 탄압에 흔들렸고, 분노했고, 버텨냈다. 법정만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 억압받는 다른 이들 곁으로 갔다. 최저시급과 해고를 통보한 회사에 대한 분노로 시작한 싸움이 9년이나 갈 거라고 생각한 이는 없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노동자들이 보낸 9년은 구미시, 외투기업, 국회, 노동조합, 노동법, 검찰, 법원, 사드, 비정규직, 문화, 책, 영화 등 우리 사회 모든 분야가 얽혀 있다. <뉴스민>은 그들이 보낸 9년을 간략하게 정리해봤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3조 3교대 휴무 없는 5년
식은 밥과 국, 징벌조끼
노동조합 결성 한 달 후 해고 통보
2015년 5월 어느 날 구미공단 최초로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결성되니 취재를 부탁한다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은 5월 29일 아사히사내하청노동조합이 결성됐다. 아사히맥주가 떠올랐지만, 일본계 회사라는 것 말고는 관련은 없었다. 아사히글라스는 전범기업인 미쓰비시 사장 이와사키 야노스케의 차남 이와사키 토시야가 1907년 설립됐고, 2004년 구미 땅을 밟았다. PDP, LCD 유리기판을 생산했고, 직원 1,100여 명 중 326명(지티에스, 건호, 우영)이 사내하청업체 소속으로 일했다. 노동조합을 만든 건 지티에스 소속 138명이다.
노조로 모인 결정적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하나는 같았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안진석은 3조 3교대, 휴무 없는 5년과 잔업을 떠올리며 방송으로만 봤던 노조에 발을 들였다. 인력 파견업체를 운영한 경험이 있던 오수일은 식은 국과 밥을 떠올렸다.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징벌조끼’를 입어야만 했던 기억을 떠올린 이도 있다. 위원장 차헌호는 2015년 4월 동료들이 거부하는데도 권고사직과 위로금 제안, 정리해고를 압박하던 하청업체 관리자를 만나고는 노동조합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보면 노동조합 결성의 공은 회사에 있었다. (관련 기사=[인터뷰] 차헌호 아사히글라스사내하청노조 위원장(‘15.6.17))
6월 15일 하청업체와 단체교섭을 시작했다. 기대 반 의심 반이었다. 노조 결성 전부터 함께 해온 노무사 이경호(노무법인 참터)는 조합원 교육에서 이렇게 말했다. “해고가 될 수도 있고, 근로관계가 종료될 수 있다. 생계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조합원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 법적으로 다투면 5년은 걸릴 수 있다.” 희망적인 얘기를 기대했건만. 조합원들 다수는 그 말을 그냥 넘겼다. 2017년 4월 광화문 건물 옥상에 올라 단식농성을 했던 오수일도 마찬가지였다. “단순 반복노동이지만 설마 해고를 할까. 인수인계 하려면 2~3주는 걸릴 건데, 그리고 1년 안에는 해결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교섭 중이던 하청업체가 6월 30일 문자로 해고 예고 통보를 했다. 다음날 7월 1일 아사히글라스는 출근 중단을 통보해 입구부터 막았다. 공장 앞은 덩치 큰 경비용역들이 서 있었다. 사물함에서 작업복도 꺼내오지 못했다. 공장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했다. 하청업체는 희망퇴직자를 모집했고, 노조 결성 석 달이 지나자 조합원은 50명으로 줄었다. 노조도 7월 21일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아사히글라스와 지티에스를 부당해고, 파견법 위반, 부당노동행위를 했다며 노동청에 진정하고, 고소를 했다. 이어 구미시가 외투기업의 부당해고 문제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서면운동을 벌였다. 3만 4,000여 명이 서명했다. 차헌호는 당시를 잊지 않았다. “자신도 비정규직이라며 음료수 한 상자를 사 들고 와서 ‘꼭 이겼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간 여성 노동자가 있었어요.” 서명운동의 힘은 숫자가 아니라, 공감의 확산에 있었다.
#우리 사회의 빌런들, 분노는 나의 힘
노조 탈퇴 종용-농성장 철거, 원청과 함께 움직인 구미시
공감만 힘이 아니었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빌런들, 그 중에서도 내 편을 들어줄 것처럼 하다가 밀어내는 빌런들, 그 빌런들에 대한 분노는 오기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구미시도 그랬다. 노동자들은 10월 5일 구미시청 앞에서도 농성을 시작했다. 시장을 만나려고 했으나, 시장 차량에 부딪혀 다치기만 했다. 구미시는 노사민정협의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노조 안 하면 안 되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구미시장은 박정희를 반인반신(半人半神)이라고 외친 남유진이었다.
11월 16일 아사히사내하청노동조합은 전국금속노동조합에 가입했다. 해고 상황을 혼자서 버티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해가 바뀌고 2016년 3월 25일 드디어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원청(아사히글라스)이 노조 활동을 탄압할 목적으로 계약을 해지했다는 중앙노동위원회 판정이 나온 것이다. 경북지방노동위원회는 각하했던 결정이다.
중노위 결정이 나오자 회사와 구미시는 바쁘게 움직였다. 지티에스는 4월 1일 조합원 개인의 집으로 고소·고발 취하와 복직 투쟁을 중단하면 위로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2차 희망퇴직 제안 문서를 보냈다. 마감 시한은 8일 오후 5시 30분. 마감 하루 전날에는 아사히글라스노사협의회 의장이 조합원을 만나 일자리를 알선하고 노조 탈퇴를 종용했다. 당시 입수했던 녹취록을 들어보면 의장은 차헌호 지회장에 대한 감시, 차량 미행까지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관련 기사=아사히글라스 노사협의회 의장, 해고자 만나 노조탈퇴 종용(‘16.4.19))
“조합원들이 명퇴 신청 등기를 받고 노조를 탈퇴하느냐 마느냐 하는 판국에 조합원 단속을 안 하고 외부 연대투쟁으로 돌아다닌다”, “이제 차헌호는 투사가 될 것이다”, “공장 굴뚝에 올라가는 방식으로”, “이후 전국 민주노총에 올라갈 것이고”
얼마 후 구미시도 나섰다. 4월 21일 구미시는 공장 앞에 있는 노조의 천막농성장을 철거하는 행정대집행을 했다. 400여 명의 철거용역 직원이 투입됐고, 경찰도 100명이 투입됐다. 조합원들은 끈으로 서로 몸을 결박한 채로 농성장을 둘러쌌지만, 속수무책이었다. 5월 1일 공장 앞에서 열린 노동절 경북대회를 마친 참가자들이 농성장을 다시 세웠다.
노동조합에 발을 디딜 때 믿고 따랐던 형이 떠날 때 오수일은 분노했다. “그 형 때문에 노조를 하게 됐는데, 그 형이 2차 희망퇴직 공모를 하는 걸 보고는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다. 술을 한 잔 하자고 해서 갔는데, 아사히글라스 총무팀과 있었다. 너무 화가 나서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하고 녹음을 했다. 떠나가는 사람 때문에 나도 흔들렸지만, 젊은 친구들이 나서기 시작하는 걸 보고 목적의식을 갖고 살자고 다짐했다.”
그 이후 농성장 철거는 없었다. 중노위 결정, 2차 희망퇴직, 노조 탈퇴 종용, 농성장 철거가 서로 연결돼 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결과였다. 그 사이 노조원은 23명이 됐다. (관련 기사=구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꿈(‘16.5.17))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연대향이 느껴진거야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고 있어 함께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토로하며 떠난 조합원 1명을 제외하면 22명은 2016년 5월부터 2024년까지 흩어지지 않았다.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라는 노동가요처럼 말이다. 흩어지기 전에 뭉칠 수 있도록 눈덩이를 굴려야 했다.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니 나만 힘든 게 아니었다.
2016년 7월 가까운 성주군 사드 배치 반대 현장에도 달려갔고, 전국 투쟁사업장은 어디든 달려갔다. 2015년 집회를 준비하면서 몸짓패도 만들었다. 금속노조 KEC지회 몸짓패 ‘창공’을 패러디한 ‘허공’(허를 찌르는 공연)은 연대의 맨 앞에 있었다. 허공의 남기웅은 “투쟁하는 동지들이 부르면 가능하면 무조건 달려가는 게 허공의 연대 기조”라며 “힘을 주러 가지만 오히려 힘을 받아 오는 것이 연대의 ‘진짜 힘’ 같다”고 했다. (관련 기사=[기고] 내 이름은 비정규직, 아사히 투쟁과 함께한 노동자 문화 (1) (‘22.4.20))
노조를 시작할 때는 한 발 뒤에 있었던, 초창기 흔들릴 때가 몇 차례 있었다는 오수일은 연대를 하면서 버틸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한다. “우리가 떼를 쓰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억울한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세상이 돌아가는 구조를 서서히 알게 됐어요. 힘들지만 버텨야겠다는 객기 비슷한 것도 생기게 됐어요.”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샴푸향이 아니라 연대의 힘이 싹트기 시작했다. 노조 결성 초기부터 든든한 동반자였던 KEC지회 이종희는 “우리가 받은 걸 똑같이 나누는 거다. 우리가 겪은 걸 아사히가 같이 겪는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승리하고 나면 우리의 지원군이기도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를 응원하는 CMS는 전국 곳곳에 퍼졌다. CMS 후원자 중 한 명인 전근배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은 부러지지 않는 흔들림을 중요하게 봤다. “아사히 투쟁에서는 ‘약함’을 숨기고 정돈된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약한 걸 드러내는 것 자체가, 싸우는 것 만큼 큰 용기이자 중요한 실천”이라며 “아사히글라스 투쟁을 다룬 책에서 접한 이야기에는, 자신감과 기쁨만이 있는 게 아니라, 혼란도 겪고, 인간적인 고민도 담겨 있고, 드러내길 꺼려하는 모습들이 담겨 있었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구미 비정규직 노동자의 희망, 월 1만원 결의를 부탁드립니다(‘16.8.18))
전 국장이 언급한 책 <들꽃, 공단에 피다>(2017, 도서출판 한티재)도 연대의 결과물이다. 조합원들이 직접 자신의 고민을 담은 글을 쓰고 책에 담았는데, 송전탑 반대 운동을 하던 초희,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이경호 노무사 등이 함께 참여했다. 남기웅은 “우리가 투쟁하지 않았다면 살면서 책을 쓸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라고 했고, 편집자인 오은지 한티재 대표는 “원고를 보면서 그냥 투쟁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내 삶이랑 투쟁이 어떤 관계인지 돌아보게 만들고 단단하게 만들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경호 노무사는 “남은 조합원을 보면, 초기에 리더십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한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 같다. 책에도 나와 있지만, 오래 싸우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연대를 하면서 스스로 배우고 단련된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연대의 힘은 2017년 4월 14일 오수일이 광화문 인근 건물 광고탑에 올라 27일 간 단식농성을 하게 만들었다. 하이텍, 동양시멘트, 콜트콜텍, 현대차비정규직, 세종호텔 노동자와 함께였다. 노조는 결성 초기부터 단식, 고공농성, 오체투지 등 몸을 상하게 하는 방식으로 투쟁을 하지 않기로 했지만, 지회장이 올라가야 할 것 같다는 말에 오수일은 “그럼 내가 하겠다”고 나섰다. 지회장이 올라가고 나면 다른 조합원들을 다 지켜낼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관련 기사=거리로 쫓겨난 노동자 6명, 광화문 ‘고공단식농성’…“비정규직·정리해고 악법 철폐”(‘17.4.14))
#대구지방검찰청을 점거하다
2017년 4월 17일 서울행정법원은 중노위의 부당노동행위 판정이 잘못됐다고 판결했다. 아사히글라스의 사용자성이 부족하므로 부당노동행위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구지방고용노동청 구미지청은 수사 지휘를 건의했지만, 검찰은 묵묵부답이었다. 대구지방고용노동청 한 근로감독관은 “현장을 있는 그대로 확인하고 진술조사해서 법에 맞춰 확인한 것뿐”이라고 했다. 그해 9월 22일 아사히글라스가 파견법을 위반했다며 GTS 소속 노동자 178명을 11월 3일까지 직접 고용하라는 시정 지시도 내렸다.
검찰이 움직이지 않으니 재판도 열리지 않았다. 8월 29일 노조는 기소를 촉구하며 대구지방검찰청 앞에 또 하나의 천막농성장을 차렸다. 기자는 대구지방검찰청 김천지청 담당검사가 바뀔 때마다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다. 2017년 안에는 결과가 나오느냐는 질문에 김도형 검사는 “그래야 하겠죠”라고 말했다. 그해 12월 22일 결론이 나왔다. 파견법 위반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관련 기사=구미 아사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왜 대구지방검찰청 앞 농성을 시작하는가?(‘17.8.28))
안 좋은 소식이 이어졌다. 해가 바뀐 2018년 1월 12일 대구검찰청 앞 농성장은 수성구청의 행정대집행에 철거됐다. 2018년 1월 19일 고등검찰청에 항고장을 제출했다. 해고 1,000일이 다가왔다. 2월 21일부터 3월 9일까지 해고노동자 남기웅, 송동주, 장명주는 아사히글라스 일본 본사 항의방문에 나섰다. 고조노 에쯔로라는 총무부 그룹 매니저는 얼굴은 정중했지만, 같은 소리만 반복했다. (관련 기사=아사히글라스 해고 1000일, 해고노동자 일본 본사 원정투쟁기(‘18.3.16))
“한국아사히글라스와 아사히글라스그룹은 다른 법인입니다. 다른 법인에 대해 할 말이 없습니다.”
5월 14일 대구고등검찰청은 파견법 위반 혐의를 다시 수사하라는 ‘재기수사명령’을 내렸다. 다시 침묵이 길어졌다. 계속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11월 5일 대구검찰청 앞에 다시 천막을 쳤고, 12월 27일에는 대구검찰청 로비에서 연좌농성을 감행했다. 저녁 7시 50분께 ‘퇴거불응’ 혐의로 11명이 현장에서 연행됐다. 당시 취재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관련 기사=아사히글라스 해고 노동자들은 왜 검찰에 항의하나요?(‘18.12.28))
“아사히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연행된지 23시간 만인 28일 오후 6시 50분께 조사를 마치고 경찰서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퇴거불응 혐의는 신속하게 사건 처리가 이뤄지겠지요. 검찰청사에서 퇴거 요구를 거부한 11명의 노동자를 빠르게 기소하면 됩니다. 대신, 파견법 위반 혐의 기소 여부도 함께 말입니다.”
#3년 6개월 만에 기소
근로자지위확인 1심 소송 승소
바뀐 구미시장, 아사히글라스 본사 방문
조합원 모두 파견법 위반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이경호 노무사는 “불법 파견은 명확하다고는 생각했다. 정규직과 혼재되어서 업무 지시를 받았다”고 했고, 2019년까지 사건을 담당했던 장석우 변호사도 “자료를 보면 파견이 인정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해가 바뀌고 햇수로 5년, 답답한 마음이 더해질 때였다.
2월 13일 대검찰청 수사심의원회는 파견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 권고 결정을 내렸다. 이틀 후인 15일 대구지방검찰청 김천지청은 아사히글라스를 파견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고소한 지 3년 7개월만이었다. 차헌호, 오수일 등 조합원은 “이번 검사는 진짜 다른 것 같아요”라며 담당검사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이름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박광호.
그동안 검사를 믿을 수 없어서 몇 번이나 찾아가 따지듯 물었었다. 박광호 검사가 말했다. “자료가 1만 페이지가 넘습니다. 이 사건 무조건 대법원까지 갑니다. 그러니 시간을 주십시오.” 확신이 들었다. 차헌호는 기소 이후 “무조건 이긴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바뀐 장세용 구미시장은 그해 3월 6일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 회장을 만나 원직복직을 요구하겠다”고 했다. 노조는 3월 28일 다시 한 번 일본으로 향했다. 본사 주주총회장 항의방문을 위해서였다. 장 시장은 4월 일본을 방문해 아사히글라스 회장을 만나려고 했는데, 불법파견 재판이 시작되자 돌연 일정이 연기됐다.
8월 23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은 아사히글라스가 직접고용 당사자라고 판결했다. 해고된 지 만 4년만이다. 조합원 모두가 환하게 웃었다. 그날 하루는 기쁨을 만끽할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아직 끝이 아님을 모두 알고 있었다. 지회장을 포함한 조합원들은 변호사와 향후 대응 계획, 형사 재판에 미칠 영향 등을 모여서 의논했다. (관련 기사=법원,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직접 고용해야”(‘19.8.23))
아사히글라스는 항소했다. 해가 바뀐 2020년 1월 장세용 구미시장은 일본에 건너가 아사히글라스 회장을 만났다. 모든 소송이 끝나고 장 시장에게 당시 상황을 물었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고향의 일이니까. 그래서 CMS 후원도 바로 시작했죠. 시장에 출마하면서 이 문제를 풀어보고자 공약으로도 냈어요. 회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산 영사관에 갔죠. 어렵게 회장을 만났는데, 자기네들은 주재국의 법에 따르겠다는 말밖에 안 해요. 그 후로도 아사히글라스에서 사고가 나서 찾아가서 압박하고 그랬어요. 지자체에 할 수 있는 권한이 많이 없어서 아쉬웠죠.”
#지회장 제외 복직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다
항소심에서 파견법 위반 무죄로 뒤집혔지만,
2024년 7월 11일 대법원이 바로잡다
5년이 지났지만, 다시 시작이었다. 2019년 4월 10일 시작된 파견법 위반 혐의 재판은 지연됐다. 회사는 증인을 계속 신청했다. 회유도 시작됐다. 파견법 위반 재판 선고를 앞둔 2021년 2월 아사히글라스 사측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태평양이 노조에 만남을 제안했다. 두 차례 만났고, 소송 취하와 신규채용 방식으로 단계적 복직, 일시보상금을 내놨다. 한 가지 더, 지회장 차헌호는 제외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 자리에서 차헌호, 오수일 등은 단칼에 거절했다.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노조는 태평양과 만나기 전 조합원들과 모여 회의했다. 위로금으로 정리하거나, 사람을 제외하거나, 노조를 인정하지 않으면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합의했다. 30분이 채 걸리지 않은 합의였다. 그 후로 회사 쪽과 만남은 없었다. (관련 기사=아사히글라스-해고노동자 첫 복직 논의, ‘지회장 제외’로 결렬(‘21.2.24))
회사도 재판 결과를 예상했던걸까. 2년 4개월 만인 2021년 8월 21일 재판부는 아사히글라스에 대해 파견법 위반을 선고했다. 대표에 대한 징역형 판결은 국내 최초 파견법 위반 징역형 처벌 사례다. 1년 후 2022년 7월 13일 대구고등법원이 아사히글라스의 항소를 기각하면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2심에서도 승소했다.
승승장구였다. 그런데 2023년 2월, 대구지방법원 제4형사부(재판장 이영화)는 아사히글라스 파견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불법파견이 아닌 정당한 도급이라는 이유다. 아사히글라스가 하청노동자에 대해 상시적으로 지시하고 개입한 숱한 증거들은 무시됐고, 아사히글라스 쪽에서 신청한 증인 입장이 대거 반영됐다. 당시 재판부 김아영 판사는 임용 전 태평양에서 변호사로 근무했던 이력이 있었다. 조합원들은 태평양 ‘파견 판사’라며 재판부 판결에 불신을 보냈다. (관련 기사=연이은 아사히글라스 불법파견 인정 판결, 뒤집힌 이유는?(‘23.2.22))
분노했던 조합원들은 실망이 컸지만, 조금씩 털어냈다. 판결의 오류를 누구보다 정확히 짚을 수 있었다. 2020년부터 노조 쪽 소송대리를 맡았던 금속노조법률원의 탁선호 변호사는 “자료를 보면 파견이 인정되지 않을 수는 없는 사안이라고 봤다. 법정에서 회사에 유리한 관리자를 불러내서 객관적인 증거에 반하는 진술을 많이 하도록 했는데, 혹시나 불리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면서도 “대법원의 판례기준에 따르면 파견을 인정해야 하고, 이런 증거가 있음에도 부정되면 사실상 제조업에서 위장도급이 횡행할 거라는 걸 대법원도 알고 있을 거라고 봤다”고 말했다.
판결 지연은 힘들었지만,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흔들리는 마음은 오랜 기간 쌓은 새로운 관계 속에서 다잡았다. 2015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다양한 사람들과 단단한 관계를 쌓았기 때문이다.
근로자지위확인소송, 불법파견, 부당노동행위 선고가 하루에 몰려 잡힌 2024년 7월 11일. 새벽부터 모여 서울로 향하는 조합원들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바 없었다. 소송에서 지는 경우의 수는 생각지 않았다. 판결을 앞두고 버스에서 내린 조합원들이 대법원 앞에 섰다. 그들을 맞이하는 노동자와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산재로 사망한 하청노동자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씨를 포함해 9년 동안 현장에서 함께 했던 얼굴들이 같은 표정을 머금고 조합원들을 바라봤다. 아사히비정규직 조합원들이 걷는 걸음마다 함께 걷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다행히 대법원은 파견법 위반에 무죄를 선고한 2심 재판부의 결정을 파기환송했다. 고소한 지 9년 만에 재판이 끝났다. (관련 기사=아사히글라스 해고자 승리···공장으로 돌아간다(‘24.7.11))
#아사히비정규직 복직 싸움의 핵심, ‘연대’
노동운동뿐 아닌 사회운동 향한 여파도
판결 승소 소식이 전해지면서 아사히비정규직지회를 지원하던 시민들의 환영도 이어졌다. 노동자 투쟁에 대한 폭 넓은 시민들의 지지가 새삼스럽다. 비결은 무엇일까. 11일 판결 직후. 들뜬 조합원들에게 소감을 묻자 툭툭 ‘KEC’라는 말을 뱉어냈다. KEC지회는 2015년 아사히사내하청노조 출범 즈음 노조 설립과 초기 운영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문자로 하루아침에 해고자가 됐을 때, 농성장이 철거되고 거리에 내동댕이쳐질 때, 그리고 9년 내내 주요 국면에서 아사히비정규직지회와 함께 했다. (관련 기사=아사히글라스 공장 밖에서 9년을 보낸 22명의 노동자(‘23.2.5))
김성훈 금속노조 KEC지회 사무장은 “우리 노조도 2010년대 노조파괴를 경험했다. 이에 맞서는 동안 엄청난 연대를 받았다. 그러면서 노조가 성장했다. 연대로 성장한 노조로서 깨달은 바가 있다. 꾸준한 연대도 대단한 의식이 있어서 되는 게 아니고, 지속하다보면 관계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대투쟁이 주는 만족감이라는 것도 있다”고 말했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는 비정규직 문제를 중심으로 여러 영역에 노조의 역량을 쏟았다. 생계라는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기도 했지만, 해고노동자라는 신분은 일터에 얽매이지 않고 연대를 뻗칠 무기가 되기도 했다. 전국을 무대로 중요한 싸움의 현장으로 향했다.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 징수 노동자 투쟁 현장, 백남기 농민 장례식장, 비정규직 해고자들과의 광화문 단식 고공농성, 성주 사드 반대 투쟁에 이르는 사회운동 영역까지 힘을 보냈다.
시나브로 아사히비정규직지회는 한국 비정규직 공동투쟁의 주축이 됐다. 하청노동자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씨와도 인연을 맺었다. 비정규직노조가 주축이 된 노동운동을 고민하며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을 꾸렸다. 아들을 떠나 보낸 이후 싸움의 현장에서 차헌호 지회장을 처음 만난 김미숙 씨는 아사히비정규직지회의 연대가 든든한 힘이 되었다고 기억한다. (관련 기사=아사히글라스 해고자 향한 故김용균 어머니 김미숙의 포옹(‘19.6.22))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줬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구미에서 일했는데, 비정규직 이제그만과 함께 하면서 아사히글라스 소식을 처음 알았습니다. 오래 보면서 멋있는 동지들이라고 느끼게 됐습니다. 엄청난 연대로, 다른 힘든 곳에 큰 힘을 나눴습니다. 이제 저분들이 공장에 들어간다는 게, 내일처럼 기쁘면서도 덜컥 겁이 날 정도로 큰 한축을 담당했습니다. 불법파견은 더 이상 안 된다는 걸 몸으로 알렸습니다. 이제 공장에 들어가면 또다른 투쟁으로, 비정규직을 없애는 길에 함께 할 거라 믿습니다.”
너른 연대는 아사히비정규직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우리밥연대’에서 활동 중인 김주휘 씨는 오는 8월 10일, ‘아사히 투쟁 승리보고대회’ 참가자에게 식사 대접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김주휘 씨는 “백남기 어르신 장례식장을 지키며 투쟁하고 있었는데, 거기 연대 온 아사히 동지들을 처음 만났다. 유난히 적극적이었고, 눈에 띄었다. 뒤이은 투쟁에서도 조합원 한분 한분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밥을 해줄 수 있어서 영광이라 생각했다”며 “공장에 들어가서도 계속 싸워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잘 싸워낼 거라고도 믿는다. 우리는 계속 곁에 서 있을 거다”고 말했다.
사드 반대 운동을 이어오고 있는 임순분 소성리 부녀회장은 여러 장면을 떠올렸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는 사드 장비가 들어가는 비통한 순간에도 곁에 있었다. 조합원들은 새벽같이 열리는 사드 반대 집회 현장을 직접 찾아 복직 소식을 전했다. 임순분 부녀회장은 새로운 길 앞에 선 이들을 염려하면서 응원했다.
“마을회관에서, 진밭교에서, 눈이 오는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나 함께했습니다. 우리 할머니들은 다 잊어도 아사히 동지들 만큼은 잊지 못한다고 말해요. 복직한다고 인사하러 온 동지들은 뒤에도 자주 올 거라고 하더라고요. 긴 싸움 끝에 돌아간다니 너무 좋아요. 이제는 연행될 일은 하지 말라고 말해줬어요. 그런다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사람들이란 걸 알아요. 지금까지 싸워온 것이 단지 복직만을 위한 것이 아니란 것도 알아요. 우리 사회 불의가 있는 곳에 함께 한 동지들이 이제 공장으로 돌아가서도 어떤 방식으로 싸우고 연대할지 기대됩니다.”
#구미공단과 비정규직 운동에 희망이 될까
아사히비정규직회, 22명 8월 1일 공장으로 돌아간다
현재 아사히글라스에는 회사와 타협적인 정규직 기업노동조합이 다수노조 지위를 유지하고 있고, 구조조정 소식도 들려온다. 아사히비정규직지회를 대하는 회사 쪽 태도도 전향적이지 않다. 회사는 7월 11일 대법원 판결 직후 바로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고 통보했다. 일방적이었다. 노조는 주변을 정리할 시간을 줄 것을 요청했지만, 15일부터 출근하지 않으면 결근처리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지만 아사히비정규직지회의 9년을 지켜본 사람들은 복직 후 모습도 기대하고 있다. 노동조합 내부 민주주의와 너른 연대는 22명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왔다.
탁선호 변호사는 “대공장 비정규직의 파견법 위반 재판을 보면 회사가 시간을 끄는 방식으로 진행되면, 노동조합도 개별화될 수밖에 없었다. 개별적 원고 입장에서 정규직 여부가 형성되고, 정규직 전환 이후에는 다수 정규직노조로 흡수되는 구조”라며 “아사히비정규직지회는 예외적이다. 기업의 회유도 구성원의 소통을 통해 결국 거부하면서 단결을 유지했다. 연대활동을 통해 노조의 정체성과 노동자 계급으로서의 정체성을 잘 유지했다. 어려움도 예상되지만, 구조조정 국면에서 정규직 노동자들도 민주노조를 원할 수도 있다. 잘 헤처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유흥희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 집행위원장도 “아사히 노동자들은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 죽어간 태안화력 김용균 투쟁, 한국마사회 부산경마기수 문중원 투쟁, 동국제강 하청노동자 이동우 투쟁, 대림산업 디엘이엔씨 하청노동자 강보경 투쟁에 먼 길 마다않고 내 일처럼 나섰고, 해결될 때까지 한결같이 투쟁했다”며 “회사가 차헌호 지회장을 빼고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고 했을 때 이를 거부하고 함께 공장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단결과 투쟁의 민주노조 정신을 지킨 아사히 동지들을 믿는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불법파견이 만연한 구미공단에 당장 큰 변화가 일지 않을 수 있다. 파견법 위반 사업장은 차고 넘치지만 나서는 이들은 잘 없다. 지회 사건을 맡았던 이경호 노무사가 14년 동안 구미에서 파견법 위반 사건을 수임한 사례는 단 두 차례, KEC지회의 고발과 아사히비정규지회 고소뿐이다.
이경호 노무사는 “임금 등으로 상담해보면 불법파견이 부지기수다. 큰 대기업은 체계가 갖춰져 있는데, 그외에 인력을 공급받는 다른 업체는 거의 다 불법파견이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제기하는 당사자는 없다. 당사자가 문제를 제기해야 하고, 그 사람은 어렵게 싸워야 한다. 인정받더라도 특별히 더 보장되는 것도 없다”며 “불법파견에 대해 고민하는 노동자에게 아사히 소식은 희망이 될 수 있겠지만, 구미공단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다. 구조조정 소식이 들려오는 아사히글라스 내부에 영향은 분명하게 줄 것 같다”고 말했다.
오는 8월 1일, 아사히비정규직지회 22명은 당당하게 공장 정문으로 들어가 일터로 복귀한다. 연대했던 이들의 축하 속에서. 9년 만에 노동조합 이름도 바뀌었다. 아사히사내하청노조에서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바뀌었다가, 이제는 아사히글라스지회가 됐다. 공장으로 돌아갈 차헌호 지회장은 벌써 복직 이후를 고민하고 있다.
“우리 투쟁이 중심이라기보다 국내에서 핵심적이고 중요한 문제에 비중을 두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톨게이트 투쟁 당시 저희는 그 문제가 핵심이라 생각했고 적극적으로 연대했어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열악한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인데, 민주노조 운동조차 정규직이 주도하는 현실이죠. 역설적으로 비정규직 운동에 사회를 바꿀 힘이 있는 거예요. 절대 다수 노동자 문제를 해결하려면 비정규직 운동이 살아나야 해요. 당사자가 주체로 나서야죠. 우리는 공장에서도 비정규직 운동을 놓지 않을 거예요. 불법파견 문제가 아사히 투쟁에서 조명 받았지만, 구미공단만 봐도 대부분 불법파견 문제가 있어요. 만연한 불법파견 제도를 바꾸고 비정규직을 철폐하는 길을 가겠어요. 비정규직 노조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지원도 할 겁니다.”
천용길, 박중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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