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나쁜 정치와 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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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감영 옛터였던 현 경상감영 공원(대구시 중구 소재) 후미진 곳에 다양한 모습들로 쭈뼛쭈뼛 서 있는 선정비들을 보면, ‘그들이 지역을 얼마나 잘 다스렸기에 비석까지 남겼을까’라는 의문이 들곤 한다. 꼭 감영터가 아니어도, 옛 관아터나 각 고을 나들목에도 그 지역을 잘 다스렸다고 기억되기 원하는 지방관들의 선정비가 곳곳에 남아 있다. 선정비善政碑는 말 그대로 지방관의 선한 정치를 기억하기 위한 비석이니, 내용을 그 자체로 신뢰한다면 조선은 선한 지방관들로 채워진 나라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노상추의 기록은 이러한 환상을 여지없이 깨뜨렸다. 1810년 음력 6월 8일, 노회한 무관 노상추는 자기 고향 선산부사의 행태를 기록하면서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선산부사 이재항은 전형적인 ‘탐관오리貪官汚吏’였다. 노상추는 고향에서 들려오는 이재항의 행실을 기록하면서, 먼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었던 듯하다. 음력 6월 8일을 기점으로 한 두 달 전, 다시 말해 백성들이 보릿고개를 넘고 있을 시기 동안의 행실만으로도 그가 탐관오리였음을 충분히 증명했다.

음력 3~5월은 요즘과 달리 굶주림으로 대변되는 보릿고개 시기였고, 따라서 이 시기 백성들이 체감할 수 있는 지방관의 정책은 진휼이었다. 이를 위해 지방관은 미리 관아 곳간을 튼튼하게 해야 했고, 자신에게 맡겨진 권한을 최대한 동원하여 진휼을 위한 자금과 곡식을 마련해야 했다. 그런데 선산부사 이재항은 이러한 시기, 돈을 받고 향소 임원을 임명하는 몰두하면서 3천 냥 이상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양민들을 대상으로 작은 위법이나 꼬투리만 잡으면 협박을 일삼아 3~4천 섬에 달하는 곡식도 거둬들였다. 그러면서 3천여 명 정도만, 그것도 진휼하는 흉내만 낸 탓에, 선산부에는 굶는 백성들이 속출했다. 그럼에도 이재항은 자신이 사재까지 털어 백성들을 진휼했다면서 떠들고 다녔다.

조선의 관료들에게 6월은 인사 평가(포폄)의 시기이다. 얼마 전 진행되었던 진휼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고, 거기에 사적 이익까지 챙겼으니, 누구나 그에 대한 평가가 높지 않으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정의 평가는 달랐다. 평가 내용에 따르면 “관아의 곳간에는 곡식이 넉넉하지 않으나, 백성들은 늘 배부르다”며 이재항을 후하게 평가했다. 힘든 재정 상태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굶지 않았다는 말인데, 이러한 평가에 따라 포폄 역시 높았다. 선산부민들뿐 아니라, 당시 이 상황을 기록했던 노상추 역시 이 결과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선산부사 이재항은 이방 강시언을 시켜, 순영의 비장과 영리에게 뇌물을 보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포폄의 담당자인 경상감사 정만석에게는 색다른 방식의 아첨을 했는데, 이게 주효했다. 선산부사 이재항은 이방 강시언으로 하여금 선산부 내에 있는 각 면에 통지하여 경상감사의 선정비를 세우는 비용을 거두게 했다. 그리고 마치 선산부민들의 일치된 의견인 것처럼, 선정비를 제작했다. 포폄 결과만 보면, 이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귀에 달콤한 말을 경상감사 정만석이라고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터였다. 그러자 이재항은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이왕 선정비를 세우는 김에 비용을 더 거둬 자신의 선정비까지 세웠다.

선정비는 지방관 임기가 끝난 후, 지역 백성들이 그 지방관의 공로와 선정을 잊지 않기 위해 세우는 비석이다. 조선 시대 백성들 입장에서는 궁궐에 계신 임금보다 그 지역을 다스리는 지방관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고, 따라서 훌륭한 지방관은 그 지역에 내리는 축복이었다. 이 때문에 지역에서는 지방관의 선정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선정비를 세움으로써 그 공덕을 기리는 동시에, 후임 지방관들에게도 그러한 정치를 펴도록 유도하는 효과를 노렸다. 따라서 원론적으로 선정비는 그 지방관의 임기가 끝날 때쯤 세워지는 게 정상적이었고, 그것도 백성들의 자발성에 근거하고 있다.

경상감사 정만석은 그나마 염치는 있었던 듯하다. 그는 자신의 선정비를 아직은 세우지 말고 눕혀 두라는 청을 해왔다. 자신이 경상도를 떠난 후 세워도 늦지 않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산부사 이재항은 그 와중에도 자기 선정비는 세웠다. 아직 임기가 남은 선산부사의 선정비가 떡하니 설치되었던 것이다. 이를 본 노상추를 비롯한 지역 선비들은 부끄러워 입도 떼지 못했다. 그러자 아첨하는 사람들의 부끄러움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지역 사찰인 대둔사는 한술 더 떠, 선산부사에게 아첨하기 위한 용도로 선산부사와 이방 강시언의 선정비를 절 앞에 별도로 세웠다. 아첨이 아첨을 만들었다.

원래 선정비 건립은 아름다운 이유에서 시작되었다. 지역을 위해 선정을 베푼 지방관을 기억하고 그 감사함을 비석에 담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같은 선정비의 본래 목적이 사라지면, 다른 목적으로 선정비의 건립이 남발될 수밖에 없다. 지역의 경우에 선정비는 아첨의 용도로, 그리고 지방관 입장에서는 자기 과시의 용도로 활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본래 목적인 선정을 기억하기 위해 세운 선정비를 가려내는 게 힘들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현재 우리는 선정비를 통해 훌륭했던 지방관을 기억하기보다, 이를 위해 백성들이 흘렸을 땀과 피를 먼저 떠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