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욕망’을 팔고 ‘허기’를 부추기는 ‘야식’에 맞선 자유로운 개인들의 동맹

14:10
Voiced by Amazon Polly

‘야식’, 저녁식사 후 잠자기 전에 먹는 음식을 이른다. 통상적으로는 간단한 간식 외에는 먹을 일이 없게 마련이지만, 현대인의 식습관에서 이 야식은 점점 아침+점심+저녁+a, 제4의 식사가 되어간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녁을 먹은 뒤에도 휴식과 수면을 곧바로 취하지 못하는 생활습관이 일상화된다는 의미이다. ‘저녁이 있는 삶’은 여전히 21세기 한국에서 그저 구호로 그치는 중이다.

이 ‘야식’의 점유 시간은 기존의 세끼를 먹던 순환의 공백기를 의미한다. 즉 저녁 9시부터 아침 6시까지의, 원래대로면 잠을 청해야 할 때다. 하지만 다양한 이유와 상황 때문에 늦은 시간에 깨어 있는 비율은 날로 늘어만 간다. 낮에 일하고 밤에 쉬던 인류 고유의 생활습관이 무너지는 것이다. 24시간 교대근무, 혹은 야간작업에 특화된 직장 비중이 확대되고 낮에는 확보하기 힘든 개인 활동을 위해 자발적으로 생체 시계의 리듬을 무너뜨리곤 한다. 야식은 바로 그런 변화의 부산물인 셈이다.

야식은 대개 편의성, 그리고 야식을 요구하는 신체 상황을 반영해 ‘맵고-달고-짠’ 맛이 두드러지게 마련이다. 늦은 시간대인 데다가, 원래 잘 시간을 희생해 업무에 몰두하기 위해 야식은 직접 조리하기보다는 배달하거나 사서 먹는 게 일반적이다. 자연히 개별의 조건을 맞추는 것보다 몇 가지 메뉴에 편중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건강에 좋지 않다는 생각은 다들 하지만, 허기가 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자신은 어떻게든 참아보려 하지만 옆자리에서 먹고 있는 걸 보면 저절로 침이 꿀떡하고, 한 입만 먹어보란 권유가 언제 올지 초조해지기 일쑤다. 그렇게 우리는 야식에 중독되어간다.

▲혜영, 채원, 지유는 제각각의 이유로 야식을 떨쳐내기 위해 야식금지클럽을 결성했다.

야식을 끊기 위한 ‘백일기도’ 전야에 도착한 ‘미확인’ 야식배달

<야식금지클럽>의 구성원들 역시 야식의 역습에 상시 노출된 존재들이다. 핵심 구성원은 3명인데 각자 야식을 떨쳐내려는 목적은 다르다. 가장 연장자인 ‘혜영’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산적한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단 것을 입에 달고 지냈다. ‘당이 떨어지면’ 심각한 상황이 닥치기 때문이다. 늘 질소 포장 과자를 잔뜩 준비해 두고 일하다 지치면 신경질적으로 봉투를 뜯는다.

‘채원’은 사랑하던 반려견 ‘빙빙’을 잃고 상실감을 달래기 위해 온갖 면류를 흡입한다. 라면을 끓이고 비빔면을 섞어 후루룩 삼키며 빙빙의 영전에도 덜어둔다. 막내 ‘지유’는 연인과 이별을 달래고자 피자 포장상자를 연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피자를 맛있게 뱃속으로 집어넣지만, 역류성 식도염이라도 왔는지 곧 그는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걸 몽땅 게워낼 때까지 토하고 또 토해낸다.

이들은 도저히 혼자서는 대적할 수 없는 야식의 충동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위험한 시간대인 밤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한데 모이는 ‘야식금지클럽’을 결성한다. 제법 체계를 갖춘 조직인지 단체복도 차려입고 명상과 운동을 통해 유혹을 건설적으로 돌파하려는 노력이다. 어느덧 이들의 수행은 99일째, 이제 100일 고지가 머지않았다.

▲제법 체계를 갖춘 조직인지 단체복도 차려입고 명상과 운동을 통해 유혹을 건설적으로 돌파하려는 노력이다.

클럽에는 아래와 같이 엄격한 내규가 있다.

하나. 야식의 충동이 올 때 서로에게 털어 놓는다.
둘. 가공식품에 굴복하지 않고 건강한 식습관을 만든다.
셋.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다.
단순히 마른 몸을 갈망하지 않고,
가짜 허기에 조종당하지 않는다.
넷. 건강한 주체성을 가지고 음식을 먹는다.

이 규칙에 바탕을 두고 클럽 구성원들은 매일 세끼 식단을 공유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마약처럼 빠져들었던 ‘허기’가 실제 몸에 영양분을 보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심리적, 정신적 공허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직시하고 있기에 이런 규정을 정해둔 것이다. 혼자서는 한 번 유혹에 함락되면 벗어나기 쉽지 않지만, 함께라면 각자가 처한 위기에 대한 조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리가 셋 달린 솥처럼 이들은 서로의 난제를 함께 풀고 헤쳐나가는 중이다. 절대로 만만하지 않은 과업이지만 그들은 자발적인 의지로 곧 목표했던 100일간 야식과의 작별에 도달할 상황이다.

하지만 그렇게 99일째 날 밤에 지유의 방에 모인 이들 앞에 각자가 좋아하는 야식이 한가득 배달된다. 피자와 치킨, 닭발과 족발에 후식으로 쿠키까지 이들 앞에 한가득 도착한 야식이 단짠 냄새로 후각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구성원들은 서로 다른 이들에게 나약함을 떨쳐내야 한다며 개탄한다. 하지만 처음엔 당혹해하던 이들은 이 방대한 야식이 자신들이 주문한 게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99일째 날 밤에 지유의 방에 모인 이들 앞에 각자가 좋아하는 야식이 한가득 배달된다.

인간 소외를 조장하는 ‘야식’이란 괴물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

<야식금지클럽>에서 주인공들의 머릿속에 그려지다 현실로 눈앞에 도착한 ‘야식’은 단순히 먹기 좋은 식욕의 대상을 넘어 사회적 의제로 구현되는 존재다. 우리는 왜 그토록 야식에 집착하는가? 클럽의 구성원들은 그 근본적 명제를 꿰뚫고 대적하려 애쓴다. 혼자서는 너무 힘든 싸움이기에 마치 반지원정대처럼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불침번을 서듯 경계하고자 한데 모인 것이다. 서로 다른 나이대와 경험의 소유자들이지만, 각자의 상황이 그저 개별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에 입각한 공통의 과제라는 합의는 영화가 출발하기 전 이미 도달해 있었다.

우리들 각자가 사회적 환경에 속해 있다는 건 알지만 그 영향력이 어떻게 우리를 잠식해가는지 각자 체감하지 못하는 구석이 적지 않음을 고려해 본다면, 야식금지클럽의 성원들은 자신들이 처한 구조적 위기와 중독성 있는 미봉책의 위해를 어떻게 해서든 근본적으로 탈출할 결의를 다진 이들인 셈이다. 즉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기계들의 환상(‘파란 알약’) 대신 현실의 척박하지만 해방된 삶(‘빨간 알약’)을 선택한 이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탈주를 방해하려는 책동이 당연히 따르게 마련이다. 바로 정체불명의 야식 배달이 그 ‘간계’ 격이다.

야식 배달의 주범은 중반부에 밝혀진다. 그 범인의 목적을 통해 야식이란 개념을 이 영화가 어떻게 규정하는지 더 소상해진다. 범인은 셋 중 한 명과 과거에 긴밀한 인연이 있었지만, 그 관계는 그리 건설적이진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상대방이 ‘우울해졌으면 좋겠어’라며 과거에 자신과 관계를 맺을 때 탐닉하던 야식으로 예전처럼 되돌리려 획책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존재감과 가치가 복원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근래 한국 사회 내에서 여전히 횡행하는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길들이기 수단으로 충분히 독해가 가능한 지점이다. 제작진 또한 세 여성으로 구성된 클럽 형태를 통해 충분히 해당 주제와의 연결을 의식한 것으로 읽힌다. 여성연대의 가능성은 그들이 중반부에 봉착한 위기를 긍정적으로 돌파하는데 핵심적인 동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즉 이 영화에서 ‘야식’은 개인의 자유롭고 주체적인,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거대한 구조적 문제의 첨병이자 표상으로 기능한다. 야식은 각자가 처한 난국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게 아닌, 마치 마약처럼 일시적으로 중화시켜주는 역할을 통해 더욱 수렁으로 빠뜨리는 ‘아편’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그저 찰나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건강도 해치고 의존도를 더 증폭시키며 돈도 많이 드는 ‘야식’이란 존재는 경제적 효용 측면에서건, 건강을 유지하는 측면에서건, 정신적으로 자립하기 위해서건 ‘지양’되어야만 하는 대상으로 설정된다. 그러므로 ‘야식금지클럽’의 대의는 오늘날 대안적 삶을 찾으려 애쓰는 모든 이들에게 통용될 보편성으로 확장될 수 있겠다.

영화 속 ‘야식’이란 존재는 현대 미국 대중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스티븐 킹의 장편소설, ‘욕망을 파는 집’에서 (작가의 소설 속 주요 배경 중 한 곳인) 캐슬록 마을 주민들에게 제각각 숨은 욕망과 닿는다. 그 소설에서 인간을 초월한 존재인 ‘욕망을 파는 가게’ 주인은 개별 주민이 원하는 ‘욕망’을 들어주는 대신 대가를 요구한다. 야구를 좋아하는 소년에겐 구하기 어려운 ‘레어템’ 트레이딩 카드를, 퇴행성 관절염에 고통당하는 여성에겐 이를 치유해줄 부적을,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중년 남자에겐 부친과 추억이 깃든 낚싯대를 구해주는 식이다. 그 대신 사소한 비용과 함께 가게 주인이 지정한 ‘장난’을 타인에게 가해야 한다.

결국엔 누구나 악의는 품지 않았으나 타인을 괴롭히고 의심하며 작은 마을은 격동에 휩싸인다. <야식금지클럽> 속 빌런이라 할 ‘고구마’ 캐릭터 역시 상대를 소유하고 조종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고립되고 외롭다는 걸 감당할 수 없어 상대를 조종하고 종속시키기 위해서다.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게 된다면 상대를 좌지우지하기는 어려워진다. 그렇게 마이크로 단계까지 부정적인 욕망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은 거대한 ‘인간 소외’로 치달으며 ‘파란 약’의 달콤함에 중독된 이들을 양산한다.

▲<야식금지클럽> 속 빌런이라 할 ‘고구마’ 캐릭터 역시 상대를 소유하고 조종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어깨에 힘을 빼고 가볍고 즐겁게 툭 던지는 단편이 얼마만인가

물론 <야식금지클럽>은 사회적 문제를 규탄하며 분노하는 영화가 아니다. 적당한 공감 요소를 버무려 누구나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코미디 기조를 시종일관 유지한다. 그렇지만 제법 묵직한 하중을 감당하기 위해 윤활유와 완충 기능을 수행하고자 여러 장치가 투입된다. 제작진의 장기를 살린 미술과 소품, 그리고 소박한 D.I.Y. 특수효과가 쏠쏠하게 제 몫을 다한 덕분에 영화는 계몽적 설교에 그치지 않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전망으로 자연스럽게 관객을 인도하는 가이드 기능을 무난히 수행한다. 사회적 의제와 영화적 재미의 완급조절은 생각보다 난제인데, 이를 조율하며 목적해둔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 건 경험과 집중력의 승리라 하겠다.

공동 감독과 주요 배역을 통해 이 단편영화는 최근 개봉한 그들의 첫 번째 장편 <더 납작 엎드릴게요>와 상당 부분 겹치는 구석이 확인된다. 아마 장편 제작과정 전후로 적당히 휴식 겸 여운을 남길 겸 뚝딱뚝딱 단편을 작업했을 테다. 서로 장편과 단편을 오가며 일정한 지점은 공유하고 나머지 분량은 변용해가며 스트레스 덜 받고 즐겁게 작업하는 제작현장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김은영 감독과 황영 PD, 전상진 촬영감독이 굳이 역할을 분할해 표기하지 않고 공동감독으로 3명의 이름을 올린 것으로 유추해도 해당 단편의 제작과정이 절대로 영화제 가기 위해 사생결단 작업한 것과 동떨어진 방식이었으리라 상상할 수 있겠다. 배우들 역시 <더 납작 엎드릴게요> 속 사찰 출판사 동료들의 긍정적 연대를 보고 싶었던 이들이라면 깜짝 선물처럼 다가올 법하다.

무엇보다 코미디 속성 때문에 억지웃음 유발이나 제작진들끼리만 통하는 암호문처럼 온갖 B급 유머 코드로 채워진 작업과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오히려 정반대에 가까운 편이다. 영화는 어깨에 힘 빼가며 작업했음에도 관객과의 소통 의지를 포기하기는커녕, 최대한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진입 문턱을 낮추고자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 배려나 단편다운 호흡은 요즘에 오히려 드물기에 더욱 본 작품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지점이라 하겠다.

장편 분량이 되어야 할 내용을 억지로 형편상 단편에 끼워 맞추려는 욕망 탓에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 테세우스를 노리던 악당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비대해진 근래 단편 독립영화 경향과 확연히 다르다. 편히 단편다운 단편영화를 누리면서 마치 짧은 소설의 여운 같은 잔향을 얻게 해주는 개운하고 유쾌한 작업이다. 이들이 정착한 의성군에 좋은 기운이 확실히 있는가 보다.

<작품정보>

야식금지클럽
Anti Late-Night Snack Club
2024 | 한국 | 드라마/코미디 | 21분
감독 김은영, 전상진, 황영
주연 김연교(임지유 역), 손예원(신채원 역), 장리우(마혜영 역)
출연 곽민규(최인호/고구마 역), 야호(빙빙이 역)
제작 고라니북스

2024 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코리안 판타스틱
2024 25회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 경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