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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대구시립희망원은 천주교 대구대교구가 수탁해 운영하던 시절 극단적인 학대, 비리 사실이 밝혀졌다. 2016년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던 시점, 희망원에 거주하던 장애인들에 대한 인권침해 문제는 지역 시민사회의 활동으로 쟁점화되고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희망원에서 벌어진 인권침해 문제는 여전히 낱낱이 밝혀지지 않았다. 사과는커녕, 공식적 기구에서의 진상규명조차 이뤄지지 않은 문제가 희망원 내 노숙인 강제수용과 이들에 대한 인권침해 문제다.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피해자들은 사과도 여전히 받지 못했다. 피해 노숙인의 문제 제기가 이제 막 시작되는 단계, 대구에서도 희망원 강제수용 피해자들이 초동단계의 모임을 시작했다.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노숙인 강제수용 문제를 일부 확인하는 과정에 있지만, 위원회 활동 기한 마감이 다가오고 있다. 이 때문에 진실화해위 활동 기한 연장을 포함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요구도 나오고 있다. 이번 기획에서는 60~70년대 희망원에 강제수용됐던 노숙인들의 증언을 통해 당시 인권침해 상황을 되짚어 보려 한다. 기사에서는 노숙인에 대한 당대 표현인 ‘부랑인’을 차용했다.
텅 빈 광장에 서면 김기석(61)의 마음도 어딘가 비어버린 듯 허전했다. 남 못지않게 치열하게 생을 누볐음에도 삶이 여전히 모래 위에 쌓은 탑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김기석은 유년기, 생의 시작점부터 어긋난 채 쉴 새 없이 달려와야 했다. 그는 어디로도 갈 수 있지만 어디에서도 그를 반기지는 않았던 유년 시절을 보냈다.
유년 시절 누볐던 동대구역. 후끈하고 습한 대구의 여름 바람이 장년의 김기석을 맞이한다. 서울에서 미팅을 마치고 잠깐 들린 차. 대구는 김기석이 어릴 적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아 헤맨 곳이자, 오랜 부랑인 생활을 끝낸 곳이다. 부랑인 생활의 시작과 끝을 대구에서 한 셈이다. 피하고 싶은 기억도 마주해야 하는 이곳을 요즘 부쩍 자주 찾고 있다. 김기석이 마지막으로 강제수용됐던 대구시립희망원. 대구에서는 김기석처럼 희망원에 강제수용됐던 부랑인 생존자들의 모임이 시작됐다.
도둑맞은 유년 시절
도둑처럼 숨어다녀야 했다
일곱 살의 어린 시절이었지만 김기석에게는 대구 거리를 방황했던 기억이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 있다. 전파상을 운영하던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부모가 갈라서면서 김기석은 다섯 살에 경남 양산을 떠나 처음으로 대구로 향했다. 어머니가 대구에 거처를 잡았기 때문이다. 거처는 신암동이었는데, 칠성시장과 칠성교, 미군 막사가 있는 곳이었다. 짧은 대구 생활을 거치던 중 대구에 온 고모들이 양산으로 김기석을 데려갔고, 어머니와도 이별하게 됐다. 어머니가 그리웠던 김기석은 일곱 살, 무작정 기차를 타고 동대구역에 내려 칠성시장, 칠성교, 미군 막사라는 단편적 기억에 의지해 어머니를 찾아 헤맸다. 며칠이 흘렀는지, 음식도 먹지 못한 김기석은 비 오는 여름철 길거리에 쓰러졌다. 잠깐 눈을 뜨니 병원이었는데,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양산의 자택이었다.
양산에서의 생활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아버지나 고모들은 김기석을 돌보지 않았다. 이혼 후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아홉 살, 학교에서는 육성회비를 내지 않았다고 창피를 줘, 여름방학에 맞춰 신문 판매에 나섰다. 일을 시작하자 곧 어떤 중년 남성이 밥을 사준다고 해 따라간 곳이 부산의 집단수용시설 영화숙·재생원이다. 먼저 시설의 연락사무소 격인 ‘임시보관소’에 맡겨졌고, 밤 중에 차량을 통해 재생원으로 옮겨졌다. 영화숙은 아동시설, 재생원은 성인시설이었지만, 김기석을 비롯한 신규입소자들은 일단 재생원에 배정된 다음 아동은 따로 영화숙으로 보냈다.
김기석은 재생원에서 성인 남성들과 함께 수개월을 지내다 영화숙으로 배정됐다. 영화숙에서는 아침에 일어나면 죽어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4평 정도 되는 공간에 어린이 30명 정도가 지그재그로 구겨 넣어져 생활하고 잠도 잤던 것으로 기억한다. 2개월 정도가 흘렀을까, 김기석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다시 양산의 집으로 도망쳐올 수 있었다. 하지만 가정 형편이 갑자기 나아지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원양어선을 탔고, 여전히 돌봄을 받지 못했다. 김기석은 구두닦이를 시작했다.
구두를 수거하는 사람은 찍새, 닦는 사람은 닦새라고 했는데 김기석은 찍새를 맡고 형들이 닦새를 했다. 소년들이 함께 생활하는 거리에서도 폭력은 여전했고, 버티지 못한 기석은 다시 도망치기로 했다. 물금역에서 무임승차를 하러 대합실에서 기다리는데, 또 성인 남성이 20원을 쥐어주며 짜장면을 사 주었다. 병을 건네며 마시라는 걸 마셨고, 깨어보니 다시 재생원으로 향하는 승합차 안이었다. 1973년에 다시 잡혀간 재생원. 그길로 다시 11개월을 살게 됐다. 두 번째 입소한 재생원에서는 본격적으로 폭력을 당했다. 당시 관리자를 소대장이라 불렀는데, 20대 중후반의 소대장은 집요하게 김기석을 괴롭혔다. 매를 맞았고, 팔뼈가 부러졌다. 김기석은 다시 영화숙으로 옮겨진 틈을 타 도망쳤다. 양산에 도착하고 보니 다니던 학교에서는 퇴학 처리돼 있었다. 학교를 다니고자 시작한 신문 판매와 구두닦이였다. 목적을 잃은 기석은 본격적으로 전국을 돌며 거리 생활에 나섰다.
가출한 기석의 삶터는 기차였다. 먹을 것 구하기보다 잘 곳을 찾는 것이 더 힘들었던 기석은 부산진역에서 용산역까지 오랜 시간 운행하는 기차를 잡아타 의자 밑에서 쪽잠을 자기로 했다. 70년대에는 기석과 같은 생활을 하는 부랑인들이 있었다. 이들과 함께 거리에서 생활하다가 수용시설에 잡혀가기를 반복했다. 여객전무는 사법권이 없어 무섭지 않았지만, 간간이 철도공안(현 철도특사경)에 단속되면 수용시설로 보내졌다. 철도공안에 잡힌 김기석은 대전아동보호소, 서울아동보호소를 거쳐 도망치기를 반복했고, 마지막으로 77년 대구시립희망원에 잡혀가게 됐다. 동대구역을 지날 일이 있으면 어릴 적 어머니와 살았던 신암동을 배회하곤 했는데, 거리를 걷다 배고픔에 쓰러져 정신을 차려보니 신도극장 인근 신암파출소였고, 이곳에서 희망원으로 보내진 것이다.
이 역 저 역 다니다 결국엔 수용소
어린 시절 어머니와 살았던 신암동 자주 배회
대구서 떠돌다 굶주림에 쓰러졌더니
파출소에서 희망원으로 보내
시립 시설, 폭력은 덜했으나
“좁은 방 다수 수용, 방치 심각”
기석이 잡혀간 희망원은 천주교가 위탁 받기 전이었다. 최초 설립된 서구 내당동이 아닌, 달성군 화원읍으로 이전한 상태였다. 희망원 입소시 김기석은 신원 노출을 우려해 이름을 둘러대고 사는 곳도 서울이라고 했다. 희망원에서 기석은 과거에 거쳐 온 시설에 비해 직접적인 폭력 상황은 비교적 발생하지 않았다고 느꼈다. 다만 자율성은 어느 곳보다 없었다. 교도소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희망원에 갇힌 4개월 동안, 건물 밖을 한 번도 나가보지 못했다. 작은 창문이 있었고 창문으로 운동장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김기석은 ‘4동’에서 생활했다고 기억하고, 4동 안에는 방이 3개, 화장실이 하나 있었다. 방 하나에 입소자 25~30명 정도가 배정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점호를 시작했고, 밥은 방 안에서 먹었다. 특별한 일과도 없이 앉아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건물은 밖에서 잠궜다.
기록을 보면 김기석이 수용된 1977년에는 그나마 희망원 수용자 수가 적은 편이었다. 대구시 통계연보상에는 1960년부터 1979년까지 관내 부랑인 수용 상황 통계가 확인된다. 61년도까지는 관내 수용기관이 2곳이었으나, 62년부터는 줄곧 희망원 1곳으로 유지된다. 1977년에는 수용자 총수 383명, 신규수용 1,639명, 퇴소자수 1,392명, 퇴소자 중 사망자 202명, 연말 기준 수용자수 630명으로 확인된다.
기록이 확인되는 1960년에서 1979년까지 기간 중 한 해 수용자 총수는 최대 5,440명(1963년)까지 확인된다. 1963년의 경우 수용자 총수 5,440명, 신규수용 4,220명, 퇴소자 4,195명, 연말 기준 수용자수 1,245명으로 나타났다. 퇴소자 4,195명은 다시 연고자 인도(3,321명), 보호자 위탁(4명), 전소(181명), 사망(261명), 기타(428명)로 나뉜다.
1963년 퇴소자 중 사망으로 인한 퇴소 처리 비율은 6.2%이다. 사망자 비율이 가장 높은 해는 1973년으로, 퇴소자 897명 중 154명이 사망해 17.1%를 기록했다. 가장 많이 사망한 해는 1964년(265명)이다. 희망원이 천주교 대구대교구에 위탁된 1980년부터는 통계 양식이 바뀌어 비교가 어렵다.
“제가 겪었던 시설보다 희망원에서는 구타나 다른 폭력은 덜했어요. 그런데 인신구속이 정말 심했어요. 말 그대로 교도소에 갇힌 것처럼 살았거든요. 아니 교도소도 식사 시간, 운동 시간, 건물 밖에 나가볼 수 있는 시간이 있을 텐데 제가 머문 4개월 동안 한 번도 건물 밖을 못 나갔어요. 장애인 시설은 별도로 있었던 것 같고. 우리는 건물 하나에 화장실이 하나 있었고 방이 나뉘어져서 한 방에 25~30명 정도 있었던 거 같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점호 하고, 밥시간에도 나가지 못하고 배식을 받아서 방에서 먹었어요. 작업을 따로 시키는 것도 없었고, 창문을 통해서 바깥을 바라보면 운동장이 보였어요. 다른 건 볼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저는 짧게 있었지만, 몇 년씩 오래 있는 분들도 있었어요.”(김기석)
<뉴스민>은 대구시와 현 희망원 관리자에게 문의해 봤으나, 1970년대까지 대구시 직영 시기 부랑인들이 거주했던 시설의 면적, 방의 구조 등 주거환경과 관련한 구체적 정보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희망원 한 관리자에 따르면 천주교의 위탁 운영 시기부터 신축, 보수 등 작업이 이뤄져 당시 원형을 간직한 건물은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1977년 희망원에 수용됐던 김기석은 그해 대구시 공무원으로부터 퇴소해도 좋다는 통지를 받았다. 공무원은 집을 찾아가라며, 김기석이 허위로 둘러댄 집 주소로 향하는 기차표를 건넸다. 다시 광장에 서게 된 김기석. 어디에도 몸을 맡길 곳이 없었던 그는 퇴소 이후 홀로서기에 급급했다. 대구에서 섬유회사에 취직했다가,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습관 때문에 다시 구두닦이 생활을 이어갔다. 일정한 주거지가 없었고, 배움의 기회를 놓치기도 해 자존감도 부족했다. 그렇게 평생을 결혼도 하지 않고 나이를 먹었다.
장년이 된 김기석은 이제야 그가 느끼는 박탈감을 마주 보려 한다. 영화숙·재생원으로 시작해 대구시립희망원으로 끝난 강제수용 생활. 김기석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 김기석은 진실화해위원회에 김기석이 겪었던 다른 강제수용을 포함해 조사를 신청했고, 현재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김기석의 대구시립희망원 입소 기록을 확인해 전달해 주었다. 입소자명으로 둘러댄 ‘김기석’. 그의 본명은 손석주다.
뒤늦게 피해자 모임 시작한 이유
당시 강제 수용, 법률적 근거 취약
명백한 인권침해에도 아직 사과받지 못했다
손석주 씨 사례 진실화해위 진상 조사 중이나
2기 임기 종료 앞둬 촉박
“부랑인 강제수용 전반적 진상 조사 필요”
지난 6월 25일,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는 희망원 강제수용 피해자들이 모여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손석주 씨도 참석했으며, 손석주 씨보다 먼저 희망원에 강제수용됐었던 장상락(66), 장철원(66) 씨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 비교적 근래에 생활했던 장애인 시설수용 피해자들도 함께했다.
장상락 씨는 73년, 장철원 씨는 어린 시절인 64~5년경에 수용된 것으로 기억한다. 이들은 강제수용 생활 당시 폭력 사례들에 대해 공통적으로 증언했다. 특히 철원 씨는 희망원이 지금의 화원읍으로 이전하기 전인 내당동에 있던 시절 수용 생활도 경험했다. 대중목욕탕과 흡사한 구조에, 생활관은 목욕탕 욕조처럼 생긴 곳에 15~20명씩 모여 생활해야 했다고 한다. 당시 생활은 사사건건 통제됐었고, 정확히 구분은 하지 못했지만 ‘반장’, ‘지도장’, ‘책임장’으로 불리는 이들이 통제하고 구타도 행사했다. 수용인 상호 간에도 강압행위가 있었는데, 장기자랑 등 요구사항에 응하지 않으면 구타가 있었고 철원 씨는 눈치를 보는 처세술을 어린 시절부터 익혀야 했다.
철원 씨는 강제수용 피해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피해를 호소하지는 않았다. 그 시절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진상 규명, 국가를 상대로 밝히고자 하는 개인의 의사는 특별히 없었습니다. 그런 시대였잖아요. 나 혼자만 그런 것도 아니고. 억울하다는 마음은 크게 없어요. 그런데 손석주 씨를 만나고 나서 서로 자초지종도 들어보고, 고생했던 과거를 다시 떠올리다 보니, 그 고통이란 게 트라우마처럼 있다는 것도 느끼게 됐어요. 잊어버린 과거지만, 다른 피해자들의 진상규명을 도울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다고 나서기로 했는데, 점점 되짚어보니 진상규명의 길이 나에 대한 치유의 길이 될 것이라고도 생각하게 됐어요.”(장철원)
강제수용 피해자들이 겪은 폭력은 국가폭력으로, 전반적으로 규명해야 할 사항이다. 가장 크게 알려진 사례는 형제복지원 부랑인 강제수용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진실화해위로부터 국가 폭력에 따른 인권침해 사건으로 진실규명이 이뤄졌다. 희망원 문제의 경우 이제 시작 단계다. 특히 희망원은 대구시가 운영했다는 점에서도 전반적인 진실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전근배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은 “군사독재 시기 부랑인에 대해 사회 정화라는 명목으로 감금, 격리했던 한국의 역사가 있다. 내무부 훈령, 관련 법 등 강제수용 근거가 80년대에 마련되는데, 이는 임의적으로 자행된 인권침해가 국가에 의해 체계화, 공식화됐다는 의미”라며 “희망원의 경우 같은 역사적 진실이 이제 드러나야 하는 국면이다. 한국이 민주주의를 이룩했다고 하지만, 민주주의 가치를 실질적으로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국가폭력에 따른 희망원 강제수용 문제의 진상조사를 철저히 해야 한다. 시립시설인 만큼 대구시 차원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 국장이 언급했듯, 부랑인 강제수용시설이 설립된 5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도 부랑인을 구속하거나 강제수용하기 위한 법률적 근거는 부족했지만,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점차 부족하나마 근거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1954년 시행된 경범죄처벌법은 ‘일정한 주거를 가지지 않고 제방에 배회하는 자’에 대해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고 명시한다. 하지만 이 법은 부랑인을 수용시설로 보내 강제수용할 수 있는 법률적 근거로 충분하지는 않다. 1953년에 시행된 경찰관직무집행법은 미아, 주취자 등을 보호조치 할 수 있도록 명시하나, 본인이 거절하는 경우는 예외로 하도록 해, 이 또한 강제수용의 근거로는 부족하다.
유신체제 시기인 1975년 마련된 내무부 훈령 410호에서는 ‘부랑인 신고, 단속, 수용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지침’이 포함됐다. 지자체장이 경찰과 합동으로 부랑인 단속반을 편성해 부랑인을 단속하고, 단속된 부랑인 중 연고가 불확실한 사람을 시도 단위로 설치된 부랑인수용시설에 위탁 수용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훈령일 뿐, 헌법상의 근거는 찾을 수 없다.
강제수용 피해 부랑인들은 “누구도 자의로 시설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고 입을 모은다. 부랑인들은 입소 과정에서, 수용소 생활 과정에서 갖은 인권침해를 증언하고 있다. 부랑자 강제수용 정책이 제도적 모양새를 갖추기 이전부터,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노골적으로 부랑인 강제수용 정책을 펼치기까지. 어린 시절 평화로운 삶을 누릴 권리를 빼앗긴 강제수용 피해자들은 이제 아픔을 딛고 본격적으로 증언에 나서려 한다.
은재식 대구시립희망원대책위 공동대표는 “희망원의 경우 대구시가 직접 운영하던 6~70년대의 인권침해 부분을 정확히 규명하는 건 중요한 문제”라며 “시민 개개인이 받은 피해와 상처,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인권침해 문제를 막기 위해서라도 진상규명과 책임을 지는 일이 필요하다. 또한 역사를 제대로 돌아보는 것이 선행돼야 정당한 복지정책을 수립하고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는 대구시립희망원 사건의 폭넓은 진상규명과 피해 생존자들에 대한 구가 및 대구시 차원의 사과와 배·보상을 위해 피해 생존자 관련 제보를 받고 있다. 이들은 시설 입소·퇴소 기간과 무관하게 본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희망원으로 보내진 사람, 이외 희망원에서 생활하며 시설 수용에 따른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당사자이거나, 이에 대한 사례를 아는 시민은 daegusadd@gmail.com이나 박동균 대구장차연 활동가(010-4484-5375)에게 제보 하면 된다.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