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권력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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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본인의 기록이어서 그 객관성을 얼마나 담보할지 알 수 없지만, 기록대로라면 무관 노상추는 꽤 원칙을 강조하는 관료였다. 금군청 수장으로 있으면서, 스스로 원칙에 따라 까다롭게 근무했고, 그만큼 부하들에게도 기강과 원칙을 요구했다. 1794년 음력 6월, 그런 그가 변방인 삭주(현 함경도 안변 지역)부사가 되었으니, 지역 문제들을 얼마나 꼼꼼하게 살폈을지 짐작된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노상추의 눈에 띈 것은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범죄였다. 변방 지역을 중심으로 채금꾼, 다시 말해 불법으로 금을 캐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당연히 삭주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으리라 짐작했고, 주변 탐문을 통해 삭주 관아의 집사 서명겸徐明謙을 불법 채금을 사주한 혐의로 체포했다. 그리고 그의 진술에 따라 마병 별장 이한복으로 하여금 장정 15명을 거느리고 직접 금을 캐는 채금꾼들까지 잡아들이게 했다.

닷새 뒤, 노상추의 명을 받들고 나갔던 이한복의 보고가 올라왔다. 풍하면을 중심으로 채금꾼 4명을 체포한 후 결박하여 올려보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잡아들인 4명을 대상으로 한 일차 신문에서 불법으로 금을 채취한 연유를 물었더니 “저희들은 모두 태천 사람인데 변대천邊大川과 류삼柳三, 두 사람의 사주로 이러한 일을 했습니다”라고 실토했다는 사실도 함께 알려왔다.

이들의 진술에 따르면, 변대천은 부유한 상놈이었다. 그는 원래 송도 사람인데, 태천현에 내려와 살면서 류삼이라는 사람에게 곡식과 돈을 주고, 그것으로 채금꾼들의 식량과 채굴 도구 등을 대도록 했다. 변대천이 전주였고, 류삼은 일종의 행동대장인 셈이었다. 채금꾼들이 금을 캐어 류삼에게 주면, 류삼은 이를 모아 변대천에게 바쳤고, 변대천은 이를 송도에 보내 금괴로 주조한다고 했다. 조직적인 범죄였다. 당시 류삼 역시 덕대편수德代便手, 즉 청부를 받고 채금을 관리하는 우두머리에 불과했고, 이 모두를 조정하는 이는 변대천이었다.

이제 변대천을 잡아들일 차례였다. 당시 변대천은 노상추의 관할 지역이 아닌 태천현에 살고 있었다. 태천현감과 공조해서, 그를 체포해야 했다. 노상추는 집사 이제환李濟寰을 태천현에 보내 채금꾼 관련 수사 상황을 알리고, 변대천의 체포를 요청했다. 그런데 열흘 뒤, 보낸 집사는 돌아오지 않고 함께 보냈던 군졸들 편으로 급하게 작성한 한편의 보고서만 돌아왔다. 잘못될 게 없는 일인데, 이상했다.

집사가 보낸 보고서에는 “태천 수령은 변대천과 계성기桂星己(변대천과 공범으로 보임) 등을 선량한 백성이라면서 이들을 비호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고을(삭주부 소속) 장교인데도 불구하고, 수령에게 나쁜 말을 했다는 핑계로 칼을 쓰고 하룻밤 감금 당했습니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자신은 여전히 태천현에 갇혀 있는 상태인지라, 함께 간 군졸을 시켜 상황을 급히 노상추에게 알렸던 터였다.

삭주부 집사 이제환은 닷새가 지나서야 겨우 풀려났다. 팔자에 없는 옥살이를 하고 돌아온 집사의 손에는 태천 수령이 보낸 문서가 들려 있었다. 그런데 이 문서에는 변대천과 계성기에 대한 비호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정황이 담겼다. 이 문서에서 태천 현감은 “변대천과 계성기는 본래 선량한 백성입니다. 며칠 전 병영에 가서 직접 (관련 사안을)병마절도사에게 아뢰었는데, 절도사께서도 그들을 놓아 보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이 둘을 풀어주고 삭주로 보내지 않았습니다”라면서, 자신의 윗선에서 이미 이들을 비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태천 수령 입장에서는 노상추의 집사 감금 이유를 해명하려 한 문서였지만, 여기에서 두 상인에 대한 비호가 병마절도사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준 꼴이었다.

무과 출신의 변방 지방관인 노상추 입장에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고위 무관이자 자신의 직속 상관인 병마절도사부터 이들을 비호한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에 대한 범죄 사실이 채금꾼들의 진술로 확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심문도 할 수 없는 상황 자체는 참기 힘든 게 사실이었다. 정작 처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권력과 결탁하여 빠져나가고, 힘없는 채금꾼들만 처벌받아야 하니, 법을 집행하는 사람으로서 화가 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예나 지금이나 조직적인 범죄는 범죄자들로만 한정되는 법이 거의 없다. 조직적인 비호 역시 범죄의 범위에 속한다는 말이다. 아니, 어쩌면 변대천과 계승기보다 더 나쁜 이들은 이들이 마음 놓고 범죄를 저지를 수 있도록 비호하는 병마절도사와 태천 현감일 수도 있다. 처벌은 채금꾼들로만 끝나고, 상층부 범죄자는 다른 채금꾼들을 고용해서 또 다른 곳에서 금을 캐면 되니 말이다. 범죄자들을 잡는데 사용해야 할 권력이 그들을 비호하는 데 사용되면, 오히려 더 큰 범죄가 ‘권력의 이름’으로 행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