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교육이 허락되지 않는 자들] (6) 계속 공부하고 싶어요. 진짜로!_김태완 이야기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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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대구에는 장애성인을 위한 질라라비장애인야학이 있다. 초등학교, 중학교 인정은 이뤄지고 있지만, 고등학교 인정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질라라비장애인야학 학생의 구술을 5월부터 8월까지 연재할 예정이다.]

[학교교육이 허락되지 않는 자들] (1) “이제 고등학교 가고 싶어요!”
[학교교육이 허락되지 않는 자들] (2) 모르고 살아온 삶_박경화 이야기 ①
[학교교육이 허락되지 않는 자들] (3) 모르고 살아온 삶_박경화 이야기 ②
[학교교육이 허락되지 않는 자들] (4)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_이상근 이야기①
[학교교육이 허락되지 않는 자들] (5)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_이상근 이야기②

김태완 씨는 57세의 지적장애인이다. 어린 시절, 그는 가족과 갑작스럽게 이별하며 거주시설로 보내졌고, 상실감과 외로움 속에서 긴 시간을 홀로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2016년, 태완 씨는 탈시설을 통해 자립을 결심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질라라비장애인야학 중학과정에 입학해 예전에 포기했던 중학교 진학의 꿈을 실현할 수 있었고 올해 8월, 졸업과 함께 고등학교 입학을 꿈꾸고 있다. 이 글은 질라라비장애인야학의 조계숙 활동가가 인터뷰한 내용으로 지역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태완 씨의 삶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고자 한다.

오래된 기억 그리고 아련한 추억

옛날에는 엄마, 아부지, 할매 이렇게 다 같이 살았어요. 대구에서.
나는 동신국민학교에 다녔어요. 6학년 9반에 있을 때 국민학교는 졸업했고 졸업장도 받았어요. 근데 친구는 없었어요. 그냥 학교만 왔다갔다 했어요.
그때 우리 집에서 개를 키웠어요. 진돗개, 노란거. 귀여웠어요. 그 강아지가 내 친구라요.
개밥도 내가 주고 개집 문도 내가 닫아주고 했어요.
아부지는 강아지를 “쫑이”라고 불렀어요. 창문처럼 큰 문이 있었는데 거기가 개집이라요.
내가 맨날 학교 갔다 와서 밥 주면 꼬리 흔들고 그랬어요. 근데 하루는 학교 갔다 오니깐 큰 문이 열려 있었고 쫑이가 안보였어요. 물어보니 할매가 어디에 팔았다고 했어요. 어디 팔았는지는 확실히 그거는 잘 모르겠고. 속상했어요. 기분도 나빴어요. 그래도 울지는 않았어요.

국민학교 다닐 때 씨름(선수) 했어요. 내가 직접 씨름하고 싶다고 (선생님한테)캤어요. 6학년때. 학교 마치면 맨날 연습했어요. 학교 운동장 옆에 보면 거기 모래 있는 씨름장이 있었어요. 내 말고 여러 명이 같이 씨름 연습했어요. 대회도 나갔어요. 상은 못 탔지만. 상은 그냥 주나? 1등 해야 받지. 씨름 오래 했어요. 그라니깐 귀에 이거 함 보소(자신의 귀를 가리키며). 이쪽도 그렇고 이게 다 씨름한 자국이라요.

국민학교 졸업하고 중학교는 못 갔어요. 나는 중학교 가고 싶었는데 집에서 돈 없다고 가지마라 캤어요. 확실히 기분이 속상했어요. 지금까지도 계속 속상해요. 국민학교 졸업하고는 그냥 집에 있었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 있으니깐 더 외로웠어요. 강아지도 자꾸 생각났고···.

▲김태완 씨가 생전 처음 가져본 스마트폰 사용법을 익히고 있다(왼쪽 사진). 김태완 씨가 탈시설을 주문하는 손피켓을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질라라비야학)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

내가 20살인가 그때 아부지가 나를 C시설(장애인거주시설)에 보냈어요.
내를 거기 보내놓고 아부지는 병 때문에 마산 가서 돌아가뿟고, 좀 지나니깐 할매도 돌아가뿟고. 작은 아부지가 이야기 해줬어요. 거기 작은 집에서 아부지와 할매 제사를 지냈어요. 나도 갔었는데 그때 많이 울었어요. 아부지하고 할매 산소도 못 가보고 해서 많이 울었어요. 작은 아부지는 산소 가봤지만 내한테는 같이 가자고도 안 했어요. 나는 안 데리고 갔고 산소가 어딘지도 확실히 몰라요.

그라고는 계속 거기서(C시설) 살았어요. 내가 벌방 열쇠를 가지고 있었어요. 벌방이 뭔고 하면 나쁜 짓 하는 사람들 가두는 방이라요. 술 먹고 돌아다니면 잡아넣어요. 선생님이 내한테 열쇠를 줬어요. 내가 문 열고 저녁에 밥도 갖다줬어요. 밥그릇 큰 거 있잖아요. 거기 밥하고 반찬하고 넣어가지고, 벌방에 문 열고 갖다줬어요. 배 고플거잖아요. 화요일에 들어가면 수요일 지나야 나오거든요. 내가 밥 안 갖다주면 밥도 못 먹어요 벌방에서는.
나도 한 번 들어 가봤어요. 나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들어가고 캐가지고···.
거기(벌방)는 냄새도 억수로 많이 나고 쪼만해가지고 여러 명이 갇혀 있었어요. 기분이 진짜 나빴어요. 한 번 들어가면 밖에서 문을 열어줘야 나올 수 있어요. 밖에 구경도 못 하고. 감옥이라요. 감옥!

거기(C시설) 있을 때 장애인보호작업장에 가서 일도 했어요. 일 많이 했어요.
봉투 있잖아요. 종이 이렇게 풀로 붙이고 끈을 요렇게 연결해서 가방 만드는 거. 그거 할 때 끈을 잘 붙여야 돼요. 요렇게 붙이고 반대쪽은 이렇게 붙이고.
김○수하고 나하고 둘이 같이 했어요. 나는 일 잘했어요.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잘 했어요. 그라고 박스를 이렇게 앞뒤로 묶는 것도 했어요.

▲김태완 씨가 탈시설 동지이자 친구인 김○수 씨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왼쪽 사진). 2024년 김태완 씨가 벚꽃길에서 조계숙 선생님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질라라비야학)

탈시설의 결단 : 야학과의 만남

그러다가 거기서(C시설) 나갈라고 마음 먹었어요. 겨울이었어요. 2016년도요. 내가 스스로 나간다고 캤어요. 그때 오십 넘었어요. 나올 때. 거기는 방도 비좁고 사는 게 숨이 막혔어요.
그래가지고 이○욱 하고 김○수 하고 같이 나가자고 내가 이야기했어요.
처음에 신천아이파크에서 살았어요. 김○수 하고. 아파트가 12층이라요. 방도 세 개고. 화장실도 좋았고 내 방도 있었어요. 집에 들어갈 때 번호 같은 거(도어락) 누르고 들어가야 되는데 나는 혼자 잘 눌러서 들어갔어요. 활동지원사님이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반찬도 맛있는 거 많이 해줬고. 한 번씩 김○수 하고 최○림 하고 돈 같이 내가지고(돈을 나눠 내어서) 짜장면하고 탕수육도 시켜먹고 그랬어요. 재미있었어요. 진짜로.

근데 집 생각이 자꾸 났어요. 밤에는.
할매도 보고 싶고 아부지하고 엄마도 보고 싶고. 내가 사는 집에 한 번 와보면 좋을긴데.
인제 그것도 안 되고. 내 방도 보여주고 싶어도 안 되니깐 속상했어요. 많이 울었어요. 보고 싶고 자꾸 생각났어요. 내가 이제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거 보여 주고 싶었는데···. 맨날 울었어요. 보고 싶어 가지고. 산소라도 알면 가볼낀데.

신천아이파크 있을 때 야학에 처음 다니게 됐어요.
옛날에 국민학교 밖에 못 나와서 그랬는데 학교 다닐 수 있어서 좋았어요. 공부하는 게 좋았어요. 재미있어요. 공부하는 거. 국어도 배우고 영어도 배웠어요.

첫사랑요?(쑥스러운 표정으로) 다 결혼 해뿟고 인자 만나지도 못하는데 뭐. 야학에서 한 반에 같이 공부할 때 만났어요. 근데 거기서 내가 고백도 했는데···. 고백하면 뭐하노? 다른 데 가뿟는데. 인제 다 필요 없어요. 고백은 말라고 했는고. 진짜로~

2021년에 야학에서 중학 과정 입학했어요. 옛날에 야학이 신천동에 있었을 때 있잖아요. 중학 과정 생기기 전에 거기서 검정고시 치고 공부했잖아요. 잘 안됐어요. 떨어졌어요. 나는 잘 쳤는데 맨날 떨어졌어요. 근데 중학 과정 입학해가 이제 조금 있으면 나도 중학교 졸업장 따요. 옛날에 아부지가 돈 없다고 중학교 가지마라 캤는데 인제 중학교 졸업해요. 기분 좋지요 당연히. 인자 졸업하면 고등학교 갈라고요. 계속 공부하고 싶어요.

▲김태완(제일 왼쪽) 씨가 2021년 질라라비장애인야학 중학과정 입학식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질라라비야학)
▲김태완 씨가 중학과정 입학식에서 대표로 연설하고 있다. (사진=질라라비야학)

<기록자의 말>
김태완 씨와 첫 만남은 그가 탈시설한 후 발달장애인주간활동서비스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였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스마트폰을 손에 쥐어보았고, 지역사회에서 자립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하나씩 배워가며 자신이 원하는 곳에 마음껏 갈 수 있는 자유를 나이 50이 넘어서야 경험했다.

반평생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딘가에 구속되어 살아야만 했던 태완 씨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누가 무슨 권리로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렇게 제한했는지···. 앞으로 남은 인생은 오로지 태완 씨 본인의 삶이 되기를 바란다.

다음 주에는 태완 씨의 현재 삶과 미래에 대한 희망찬 이야기로 이어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