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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현은 1986년『시문학』지에「누이의 바다」연작시가 추천되었다. ‘누이’도 ‘바다’도 이 무렵에는 고등학교 문사들이나 쓰는 낡은 시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누이의 바다엔 달맞이꽃만 피고 겨울에도 남쪽 나라의 비가 내렸다.”(「누이의 바다ㆍ1」) 따위로 시작하는 시로 등단을 한 것을 보면, 시인은 1980년대 초중반에 들이닥친 한국시의 변화와는 애써 담을 쌓은 것처럼 보인다.
시인의 첫 시집『길들의 여행』(도서출판 그루,1988)에는 표제작과 같은 제목을 가진 시가 여섯 편이나 되고,「여행자의 기도」라는 시도 있다. “초조하지 말자, 길들은 저기 말없이 누워 있다.”(「길들의 여행 – 유혹」) 신화나 서사시에서 길을 떠나는 이는 항상 그가 몸담은 가족이나 공동체의 위난을 해결할 임무를 졌다. 바로 그랬기에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이는 새로운 공동체를 여는 초석(楚石)이 되고 건설자가 되었다. 반면 오늘날의 여행자는 오로지 저만의 고민만 짊어지며 자신만을 대면한다. 그런 끝에 그는 갈등 관계에 있던 사회와 통합된다.
하지만 어떤 시인들은 끝내 통합되지 않는다. 그들의 세계 인식이 비극적이기 때문이다 “문이 없는 집 수도가 없는 집 한쪽 어깨가 기운 집 거꾸로 서 있는 집 잠자는 집 혼자서 히스테리컬한 웃음을 웃는 집 폐를 앓는 집 기침하는 집 […] 해숫병이 걸린 집 잠수하는 집 산으로 오르는 집 날아가는 집 창문이 없는 집 집 속에 갇힌 집 […] 바람에 펄럭이는 집 지붕을 잃은 집 기둥 없이 선 집 나붓기는 집 빗속에서 잠자는 집 그 속에 어머니가 잠의 잠을 자는 집 울고 있는 집 […] 시계가 잠자는 집 시계가 없는 집 바다가 우는 집 강이 돌아가는 집 바람이 머무는 집 비오지 않는 집 손대면 허물어지는 집”(「나의 집」)
가스통 바슐라르는 1957년에 출간한 어느 책에서 인간은 아무런 근본도 연고도 없이 세계에 내던져질 뿐이라고 주장하는 당대의 유행 사조를 이렇게 공박했다. “인간은 성급한 형이상학들이 가르치듯 ‘세계에 내던져’지기에 앞서, 집이라는 요람에 놓여지는 것이다. 삶은 잘 시작된다, 삶은 집의 품속에 포근하게 숨겨지고 보호되어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집은 4원소(물ㆍ불ㆍ흙ㆍ공기)만큼이나 절대적이지만, 앞서 본 시인의 집은 정신 분열을 낳는 집이며 거주할 수 없는 집이다. 그래서 시인은 떠나는데, 그에게는 애초부터 임무란 게 없다. “우리는 길들의 목적지와 방향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마치 젖은 벽에 다가선 우리의 그림자가/ 선뜻 그 벽을 기어오르듯이 우리는 여행에 대하여/ 아무런 작심도 없다.”(「길들의 여행」)
집만 없는 게 아니다. 시인은 스스로 얼굴이 없다고 말할 뿐 아니라(「기억과 꿈」), 우리는 그림자로만 존재한다고 말한다(「유예된 빛」). 이러한 비극성은 카프카에스크(kafkaesk)하기 짝이 없는「희망의 이장(移葬)」에서 절정을 이룬다. 어느 날 희망이 나타나 우리에게 자신의 주검을 찾아내라고 명령한다(희망은 죽은 게 아니다!). 우리가 조금도 부식되지 않는 희망의 “황홀한” 주검을 발굴하자, 희망은 다시 자신의 주검을 더 깊은 땅속에 묻으라고 명령한다. 우리는 묵묵히 명령에 따랐으니, “우리 스스로를 매장”한 것이다. 놀랍게도, 고답적으로 보이는 이 시집은 “숨쉬지 않는 민주주의”(「숨어서 별을 보다」)였던 그 시대로부터 흘러나온 “시즙(屍汁)”(「길들의 여행–유혹」)이다.
한국 현대시에는 ‘누이’(임화)와 ‘누님’(서정주)이 흔한데, 무리해서 기원을 쫓자면 신라 시대의 향가「제망매가(祭亡妹歌)」를 꼽을 수 있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체화해야 하는 유교 사회에서는 아들이 어머니를 놓고 아버지와 삼각관계를 벌인다는 식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각본이 생겨날리 없다. 누님과 누이는 아들들의 안전한 선택이자 패배선언이다. 게다가「제망매가」를 쓴 월명이 스님이었기에 그 관계는 기원에서부터 무성적(無性的)이었다(성적 리비도가 거세됐다). 고은과 박재삼의 ‘누님’은 한국전쟁 이후에 나왔다. 이때는 싸움을 걸 아버지가 없었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각본도 의식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