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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때는 세상을 바꿔보겠다며 사회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운동가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줄어듭니다. 사회운동을 하는 운동가들은 오늘도 사람을 만나고, 제도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려고 애를 씁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운동권 특권 세력 청산은 시대정신”이라며 자신과 대립하는 정치인과 싸우기 위해 운동가들을 몽땅 폄훼하기도 합니다. 운동권이라는 어원은 독재정권 시기 민주화운동에 나선 학생운동가를 고립시키기 위해 만든 용어였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기득권으로 살아가지 않았고, 또 일부는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오늘날까지 사회운동을 이어가는 운동가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2020년대 사회운동을 시작한 운동가들도 있습니다. 2024년, <뉴스민>은 매달 1980년대 사회운동을 시작한 운동가,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운동가들의 삶과 더 나은 공동체를 바라는 운동가의 고민을 듣기로 했습니다.
‘청년’ 의제가 잘 팔리던 시기가 있었다. 88만 원 세대, N포 세대, MZ 세대 같은 이름으로 청년이 호명됐고 지자체는 앞다퉈 관련 정책을 쏟아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훈계도 어느 정도 먹혔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청년’이라는 단일 의제가 갖는 힘은 떨어졌다. 정치, 사회, 문화 모든 방면에서 더 이상 청년은 하나의 이름 안에 갇히지 않는다. 심화하는 양극화, 바닥을 찍는 각종 지표, 세분화된 관심사 등 진단은 다양하다.
조영태 대구참여연대 활동가(33)의 고민은 여기서 다시 시작된다. 20대에는 청년 의제를 주로 다루는 사회단체, 정당에서 일했지만 그보다 폭넓은 전문성이 필요한 대구참여연대에 들어와 30대를 맞았다. 허리 역할을 해 줄 선배들은 단체를 나갔다. ‘다음’을 제시할 모델이 전무한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는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1998년 창립한 대구참여연대는 예산, 공직 부정부패, 대구시정 등 권력 감시와 주민 복지, 참여제도화 운동 같은 일을 해왔다. 다룰 수 있는 의제가 광범위한 만큼 시기마다 활동가의 관심사, 역량에 기대왔을 테다. 서울의 참여연대를 비롯해 전국 18개의 풀뿌리 시민단체와는 ‘참여자치지역운동연대’로 묶여 있다. 서울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 시민단체는 비슷비슷하게 사정이 어렵다.
대구참여연대의 10년 뒤를 어떻게 전망하냐 묻는 말은 무의미했다. 조영태는 “나와 단체의 미래를 같은 선상에 두고 고민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우리 세대의 ‘참여’와 ‘연대’의 의미는 뭐라고 생각하냐 물었다. “세대가 아니라, 방식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우문현답을 내놨다. 적극적인 참여, 후원뿐 아니라 SNS 댓글, 펀딩 등 범위를 점점 넓혀 나가는 게 활동가의 역할이라고도 덧붙였다. 거리를 두는 듯 말해도 그의 고민은 대구참여연대가 가야 할 길과 맞닿았다.
#정당 활동, 콜센터에서 대구참여연대까지
조영태는 학창 시절 작가가 되고 싶었다. 내향적인 성격에 게임을 즐겨하는 학생이었다.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중고등학생 시절을 보냈다고 자평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취업을 하려면 이과를 가야한다고 했다. 수학을 못 하는 이과반 고등학생이 됐고, 전문대학 반도체전자계열에 입학했다. 그중에도 대기업 취업 자체가 목표인 SK하이닉스반이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공정교육이나 직무적성 시험 대비 교육은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대학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갔다.
이 또한 흔한 이야기지만 군대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책도 많이 읽었다. 적성에 맞지 않는 대학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대외활동, 특히 사회참여활동에 관심이 생겼고 우연한 기회에 정토회, 평화재단 활동에 빠졌다. 종교단체 성격보단 사회참여 활동이 주인 단체였다. 운영위원회에서 직책을 맡고 이후 우리미래(현 미래당) 선거 운동을 뛰기도 했다. 창당 초기 대구 공동대표로도 활동했다.
“그때 저의 주요 의제는 청년이었어요. 당은 사회문제, 통일 등 다양한 의제를 풀어냈는데 다른 정당과 차별점이라면 젊은 조직이라는 것이었죠. 평화재단 활동이 재밌었지만 사회단체가 바꿀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고 느꼈어요. 정당을 만들고 우리가 말하는 걸 실현하자고 결심했죠. 사람을 모으고 정책을 고민하고 꿈을 꾸는 과정 자체를 즐겼던 것 같아요.”
돈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정당 활동을 하면서 남산역 인근 콜센터에서 일했다. 여성이 90% 이상인 조직이었고, 남성 직원에게 욕을 하는 민원인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런 여건 속에서 관리자급으로 금방 올라갔다. 1년 넘게 일했지만 돈을 버는 것 이상의 의미를 일에서 찾지 못했다. 상급자의 가스라이팅도 한몫했다. 싸우고 참고를 반복하다 사직서를 냈다.
2019년 대구참여연대 인턴으로 일하게 된 건 우연이다. ‘대구청년NGO활동확산사업’이라는 대구시 사업 공고를 보고 지원했고, 대구참여연대와 매칭됐다. 매년 이름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시민단체와 청년을 연결해 인건비를 지원해 주는 사업으로, 2016년부터 2022년까지 운영됐다. 이 사업을 계기로 활동가가 된 청년들이 지금도 대구 곳곳에 있다. 조영태도 그중 하나다. 8개월간 일하며 선배 활동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도왔다.
단체와는 잘 맞았지만 당시만 해도 정당활동에 좀 더 욕심이 있었다. 잠깐의 인턴 활동을 뒤로 하고 정당활동,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대구청년유니온 활동을 거쳐 대구참여연대에 정식 상근활동가로 채용된 건 2021년 3월이다. 조영태가 입사할 무렵 조직의 허리 역할을 하던 10년 차 장지혁, 4년 차 최나래 활동가가 단체를 떠났다.
#대구참여연대에서 다음을 그린다는 것
현재 대구참여연대 상근활동가는 사무처장, 사무국장, 그리고 조영태 정책부장까지 3명이다. 조영태 부장의 업무는 정책 대응, 사무국 업무 서포트, 홈페이지 관리 등이다. 작은 조직이라 명확하게 업무가 구분되지 않지만, 자율도는 높은 편이다. 후원 관리 시스템이나 회계 프로그램을 바꿔보고 싶을 때, 깊이 파고들고 싶은 주제가 있을 때 대체로 선배 활동가들은 기다려줬다.
“시정 감시가 주요 업무 중 하나인 만큼 홍준표 시장 취임 이후 절로 바빠졌어요. 전임인 권영진 시장 때는 계획이 발표되고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서 시행되기까지 텀이 길었거든요. 시정 진행 과정에서의 문제제기 사이 시간 텀이 좀 있었던 것 같은데 홍 시장 취임 후에는 여러 사안이 동시에 터져요. 그 과정에서 고소‧고발도 많고요”
운동의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다. 박정희 동상 건립 같이 공동 대응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선 시민단체들과 민주노총이 연대체를 꾸리지만 회의가 길어지는 것, 결국 같은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운동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 회의감이 종종 든다. “10년, 20년 반복됐다고 하는데, 우리 세대는 승리의 경험이 없잖아요. 그게 사무처장님 세대와 결정적 차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은 과거를 회상하지만 우린 그럴 과거도 없죠. 패배가 반복되고, 그때마다 흐지부지 넘어가니 무기력해지는 것 같아요” 떠나는 또래 활동가들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당장 피부로 와닿는 어려움은 단체 내부에 있다. “예전에는 대구참여연대의 회원 행사가 인기가 많았대요. 말로만 들어 본 과거죠. 계곡에 가거나 리조트를 빌려서 다같이 놀러가는 행사를 하면 가족 단위로 모여 술도 한잔 하고 새로 온 사람들을 조직하고 사업도 구상했다더라고요. 지금은 일단 다 같이 놀러 가는 문화 자체가 사라졌죠. 그때의 회원 구성이 지금까지 왔으니 다들 나이도 많이 들었고요. 사무처장님이 ‘우리가 더 열심히 하면 사람을 모을 수 있다’고 하면 전 단호하게 ‘안 됩니다’ 해요.”
기존 회원은 나이를 먹고 신규 회원은 늘지 않으니 내리막길뿐이다. 대구참여연대뿐 아니라 모든 시민사회단체의 공통적인 고민이다. 2004년 시민자치정책센터와의 인터뷰에서 강금수 사무처장(당시 조직국장)은 “회원 수 1,500명 중 꾸준히 회비를 내는 회원은 과반수, 적극적으로 주민자치 구(區)모임까지 참여하는 회원은 그중에서도 과반수”라고 했다.
10년이 흐른 지금, 대구참여연대의 공식 회원은 1,000여 명이지만 그 중 회비를 내는 회원은 600명 정도이다. 연령대별 분포도를 그리면 50대 이상이 80% 정도를 차지한다. 전현직 임원 모임에 참여하는 30명 정도가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핵심멤버다. 1998년도 창립할 때 30대 언저리였을 회원들이 단체와 함께 나이를 먹은 셈이다. ‘청년 회원을 늘려야 한다’는 목표를 삼은 것도 오래된 일이다.
마음이 급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다지 부담도, 걱정도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조영태는 문을 닫아야 하는 게 시대정신이라면 닫는 게 맞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래야 새로운 게 시작될 수 있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사무처장님은 늘 청년회원을 늘려야 한다고 말하시죠. 청년들이 모여 생산적인 활동을 하라는 의미로 ‘청년기금’을 만들었거든요. 그 기금으로 제가 활동가 비정기 모임을 운영하고 있어요. 처장님은 강연을 열거나 청년정책을 분석하거나, 나아가 청년위원회를 꾸려서 활동을 기획하는 그림을 그리시는데, 전 ‘그건 어렵다’고 말해요. 더 이상 ‘청년’이라는 주제로만 묶이기엔 관심도 각자의 의제도 세분화됐죠. 특히나 시민단체의 젊은 활동가끼리는 품앗이 활동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업무가 많고 보상은 적죠. 그래서 일단 같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쉬어가는 방식으로 운영 중이에요.”
#단체와 활동가의 미래, 그 사이에서 내 분야 찾기
과거의 영광은 찾을 수 없다. 단체의 미래는 바뀐 시대에 어떻게 적응하느냐에 달렸다. 다음 세대 활동가들은 ‘여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되, 자격증 공부를 하거나 단체 밖 사람들을 만나는 등 미래의 혹시 모를 상황에도 대비하고 있어요” 조영태는 말했다.
다만 이 둘이 별개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활동가 개인의 성장이 곧 단체에도 도움이 된다면 그게 가장 좋은 길임을 안다. 조영태는 그 길을 ‘예산’에서 찾았다. 예산 체계를 공부하다 보니 행정과 법에 대한 공부까지 닿았다. 예산을 얘기하는 건 행정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므로 대구참여연대 안에서 다룰 수 있는 의제도 넓어졌다.
“행정은 예산을 말할 때 의도적으로 숨겨요. 틀린 말을 하진 않아요. 그 행간을 읽는 건 공부가 필요하더라고요. 올 초 의정비 심의위원회 공청회에 참관차 갔는데, 공무원이 ‘대구시 예산이 14조 원이나 있는데, 의원들 월급 올리는 것 정도는 부담이 안 된다’고 말하더라고요. 말이 안 되죠. 4조 원은 교육청 예산, 2조 원은 특별회계라 의정비에 쓸 수 없죠. 나머지 8조 원의 일반회계 중에도 국비와 매칭되는 시비, 필수경비 같은 목적 있는 돈을 빼면 남는 게 없어요. 여기서부터 계산해야 하는 거예요. 반면 시민이나 시민단체가 정책을 제안하면 설명이 길어지죠. 그때마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해요.”
지난해에는 대구청년유니온과 함께 대구시의 청년예산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했다. 올해는 분야별로 활동가들을 모아 분야별 예산을 좀 더 폭넓고 심도있게 들여다볼 계획을 구상 중이다. ‘청년’이 더 이상 그 자체로 운동의 의제가 되지 못하는 시대인만큼, 청년 문제에 집중했던 20대를 넘어 30대에 접어든만큼 전문 분야를 갖기 위한 공부도 이어 나갈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지금 세대의 활동가에게 어떤 자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스스로를 ‘꼰대’라 지칭하며 한참을 설명했다. “‘활동가한테 제일 불행한 일은 활동가 친구밖에 없는 것’이란 말을 들은 적 있어요. 활동 외로도 여러 분야를 접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내 생각과 다른 사람과 접점을 계속 가져가는 거죠. 청년이라는 메리트가 사라진 다음 내 알맹이가 있으려면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려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도 봐요. 정책과 사회체계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지금의 현실을 상대보다 더 잘 알아야 하잖아요. 내실 없이 마이크를 잡고, 라디오에 출연하면서 ‘활동가병’에 걸린 동료를 종종 봐요. 저도 그랬지만…. (웃음) 잘 지나 보내고 성장하는 게 중요하죠.”
김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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