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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은 정묘호란으로 인해 나라는 어지러웠지만, 예안현(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일대) 백성들 입장에서는 행운도 있었다. 매년 바쳐야 하는 5결목과 공물목을 지난겨울에 모두 납부했지만, 전쟁 발발로 인해 되돌려 받았기 때문이다. 전쟁의 패배와 그에 따른 굴욕이야 어쩔 수 없었지만, 납부했던 세금을 돌려받았으니 전쟁 피해가 거의 없었던 예안 백성들 입장에서는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그러나 화장실 갈 때 나올 때 마음이 다른 것처럼, 막상 전쟁이 끝나니 조정과 관아의 생각이 달라졌다. 음력 5월 18일 기록으로 보아, 전쟁 끝난 지 불과 2달 만에 되돌려 주었던 5결목과 공물목을 다시 거두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하필 이를 거두겠다고 나선 시기가 보릿고개를 근근이 넘기는 시점이었으니, 돌려주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관아에서 5결목과 공물목 납부를 강하게 채근하는 바람에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예외 없이 장을 맞거나 주리를 틀려야 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고약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당시 백성들이 납부했다가 돌려받은 포목은 5결목과 공물목, 두 종이었다. 5결목은 토지 5결당 포목 1필씩 납부하는 것으로, 조정에서 내려온 규정에 따른 납부였다. 1결이란 게 곡식 1결, 즉 300두 정도를 생산할 수 있는 땅이니 5결이면 1,500두 정도를 생산할 수 있는 땅이었다. 생산성이 높은 토지의 경우도 1만 4천여 평이 넘는 땅이었고, 낮은 등급의 토지인 경우에는 6만 6천여 평이 넘었다. 이 정도의 넓은 땅에서 포목 1필을 거두어 조정으로 납부하는 세금이니, 거부할 명분은 없었다.
문제는 공물목이었다. 공물목은 어떠한 기준에 따라 정해진 게 아니라, 예안현과 공물 수취를 담당했던 향청에서 자체적으로 정했다. 필요에 따라 임의로 운영되기 때문에 세금의 형태로 거두기는 했지만, 국가에 납부되는 세금도 아니었다. 예안현에서는 8결당 무명 8필씩을 받았는데, 왜 이번 해에는 이만큼 받는지 알 방법도 없었다. 그냥 향청에서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공물목은 말 그대로 공물을 내는데 필요한 비용을 충당할 목적으로 거두었다. 잘 알다시피, 공물이란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 지역 특산물을 현물로 납부하던 세금이다. 예안은 내륙임에도 불구하고 은어가 많이 잡혀 은어를 공물로 납부했고, 경상도 많은 지역은 약재를 공물로 바쳤다. 그런데 공물 역시 세금이기 때문에 정해진 양을 제때 내야 했지만, 이 때문에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대표적인 문제는 현물 특성상, 늘 수확량이 고르지 않다는 점이다. 예컨대 은어는 많이 잡힐 때도 있고, 적게 잡힐 때도 있었다. 약초를 비롯한 지역 특산물 역시 마찬가지이다. 현물 특성상 수확이 들쑥날쑥할 수밖에 없고, 공물을 내야 할 때 그만큼의 공물이 확보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세금은 내야 하니, 백성들은 이를 구입해서 납부하곤 했다. 바로 여기에 공물을 대납하는 방납업자들이 개입했다. 그들은 공물을 대신 납부하되, 자신들의 이익에다 관리들에게 바칠 뇌물까지 백성들에게 부담시켰다. 역사 시간에 배운 방납의 폐해이다.
현물 납부로 인한 또 다른 문제는 품질 문제였다. 현물을 세금으로 받는 공물의 특성상 일정 정도 이상의 품질 요구는 당연했고, 공물 수취 담당 관리들은 정해진 품질 이상의 현물만 받아야 했다. 당연히 품질을 검사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길 방법을 찾았다. 납부해야 할 공물 외에 품질을 검사하는 관리들에게 줄 뇌물이 필요해진 이유였다. 이러한 뇌물을 ‘인정人情’이라고 불렀다. 관리들에게 바칠 뇌물 없이 공물만 납부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인정머리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았고, 공물은 품질 미달로 거부되기도 했다.
이렇게 되니, 인정을 위한 별도 비용이 필요했고, 이를 마련하기 위해 거둔 게 바로 공물목이었다. 그런데 인정은 딱히 정해진 비용이 없다 보니, 얼마의 포목이 인정으로 사용되는지 알 수 없었다. 공물을 납부하는 일을 맡은 향청에서만 알고 있었고, 따라서 향청 입장에서는 모자라지 않도록 넉넉하게 거둘 필요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향청 역시 관리들처럼 자기 이익을 챙기는 법을 배웠다. 백성들은 품질을 검사하는 관리뿐 아니라, 지역 향청에도 인정을 내야 했다.
이러한 인정은 늘면 늘지 줄어들지 않았다. 인정이 조선 전체 사회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났던 이유였다. 이 때문에 이익은 조선을 뇌물의 나라로 규정하면서, “진상은 꼬치로 꿰고 인정은 바리로 싣는다”(출천 : 이익, 《성호사설》, <인정국>)라고 말할 정도였다. 납부해야 할 세금은 꼬치로 꿸 정도였지만, 이를 납부하기 위해 뇌물로 바쳐야 할 인정은 짐짝으로 질 정도의 양이었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었다. 뇌물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고, 그 피해는 오로지 백성들의 몫이 되었다.
조선은 그야말로 ‘인정’ 넘치는 사회였다. 세금보다 세금을 바치기 위한 비용이 더 컸고, 권력이 작동하는 곳 어디에서나 인정은 필요했다. 이러한 현상은 불과 얼마 전까지도 우리 사회 전체에 횡행하는 문화였다. 교통 범칙금도 작은 인정이면 피해갈 수 있었고, 대규모 인허가에는 그만큼의 인정이 필요했다. 사립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 몇천만 원의 인정을 공공연하게 요구받기도 했었다. 불과 20~30여 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는 조선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근래 뇌물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고, 공무원 및 공직자들을 대상으로 한 금품 제공을 법으로 엄하게 금지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한국 사회는 이전과 비교해서 점점 ‘인정머리 없는 사회’가 되었다. 권력을 가진 탓에 작은 선물도 함부로 받을 수 없게 되었고, 작은 뇌물에도 사회적 지탄을 넘어 강한 처벌 대상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회는 조금씩 건강해졌다. 그러나 이도 잠시, 인정은 ‘약한 마음’을 건드렸고, 갑작스레 한국 사회는 다시 ‘인정’ 넘치는 사회로 되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