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동상 공모전 (7) 농촌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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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69년 10월 충남 아산시 선장면 장곳리를 방문한 박정희가 벼를 추수하며 웃는 모습이다.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와 크게 다르게 상당히 명랑하고 인자해 보이는 모습이다. 이를 박정희 동상 절충안으로 제시한다. 단, 안내판은 다음과 같이 적어야 한다. ‘농업 대통령 박정희’의 정확한 실상이다. 

박정희는 한국 최초의 농가 출신 대통령이다. 저임금 정책을 썼던 그는 공평심과 양보 정신을 발휘하여 5.16 직후 농촌에도 저곡가 정책을 적용했다. 그의 재임기(1963~1979년) 한국 농촌은 변혁을 경험했다. 시인 김지하는 <오적>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중농(重農)이닷, 빈농(貧農)은 이농(離農)으로!”

1965년 농업 취업 인구 중 50세 이상은 18.3%에 불과했지만 1980년 32.3%로 늘어났다. 도시 가구 대비 농가 소득은 1975년 93.9%였던 것이 1980년 62.4%로 하락했다. 1호당 농가 부채는 1971년 2만 9500원에서 1980년 80만 8400원으로 급증했다. 양곡 자급률은 1970년 86.1%에서 1980년 56.0%로 떨어졌다.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운동은 ‘차별적이고 단계적인 지원’을 내걸며 농촌에 경쟁체제를 도입했다. 복지부동을 청산한 공무원들은 초가 지붕을 뜯어내고 통일벼 없는 못자리를 뭉갰다. 새마을운동은 농촌을 새마을로 만드는 수준을 넘어 농민이 도시의 새마을로 떠나는 데 이바지했다.

박정희 농업정책은 쌀 품종 ‘노풍’을 도입하면서 절정에 달한다. 수확량이 많다는 정부의 선전에도 불구, 1978년 노풍의 3분의 2 가량이 도열병 피해를 입었다. 빚더미에서 자결을 기도하는 농민들이 속출했고 그 이듬해 78만 명이 농촌을 등졌다.]


박정희 시대와 박정희 기념사업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소리들을 찾아서.
동상 디자인 응모는 sumin-gumi@daum.net

김수민 객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