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1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줄
모르고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 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 같고
혁명(革命)같고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 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고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 같고
글에서 인용한 ‘꽃잎1’은 <김수영 전집 1(시)>에서 인용했습니다.
김수영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기 딱 일 년 전에, 그러니까 1967년 5월 세 편의 시를 연달아 썼다. 전집에 기록된 탈고 일자가 정확하다면 그에게서 시가 연달아 터져나오는 사태는 이례적인 일이다. 물론 4·19 혁명 직후 몇 편의 시와 5·16 쿠데타 이후의 ‘신귀거래 연작’도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탄생했다. 돌려 말하면 이 이례적 사건은 김수영의 현실이 급변한 것과 관계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1967년 5월에 거의 동시에 써진 ‘꽃잎’ 연작도 그러한 현실적 배경을 갖는 걸까? 나의 과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특이한 현실적 배경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또, 시의 내용과 성격을 고려했을 때도 외부의 사건에 충격을 받아서 연달아 쓴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작품에 즉해 말하면, ‘꽃잎’ 연작은 김수영 내면의 어떤 회오리와 관계있을 가능성이 높다. 정확히는 어떤 ‘새로운 인식’이 발생했을 것이다.
1967년 2월 시평 「시적 인식과 새로움」에서 그는 “시적 인식이란 새로운 진실(즉 새로운 리얼리티)의 발견이며 사물을 보는 새로운 눈과 각도의 발견”이라고 쓴 적이 있는데, 이 진술과 ‘꽃잎’ 연작은 매우 긴밀히 조응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꽃잎’ 연작은 바로 김수영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진실(즉 새로운 리얼리티)”을 섬광처럼 표현한 것이다. 그것이 한 편의 시로 마무리되기에는 버거웠기에 연달아 세 편을 쓰게 된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그러나 김수영이 포착한 “새로운 진실(즉 새로운 리얼리티)”은 구체적인 형상이라기보다 ‘다른 세계’에 대한 ‘어두운 전조’와 유사하다.
들뢰즈에 의하면 ‘어두운 전조’는 어떤 세계가 저마다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이 전조를 통해 비로소 소통하게 된다.” 즉 아직 보이지 않는 혹은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다른 세계가 이 세계에 나타나려면 이 세계와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의 ‘어두운 전조’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두운 전조”는 “자신의 고유한 역량을 통해 차이들을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으로 서로 관계짓는다.”(『차이와 반복』, 268-269)
1연의 첫 행은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이다. 여기서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시적 자아가 경외, 경배, 겸허의 대상을 찾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머리를 숙이는 행위가 신앙이나 숭배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1연에 두 번 반복되는 “조금”에 의해서이다. 동시에 이 “조금”은 작품 전체에서 풍기는 작아지고 낮아지는 변이를 규제하는 이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김수영이 그것까지 ‘운산’하고 쓴 것 같지는 않다.
1연에서 “조금”은 분명히 ‘조심스러운’, 혹은 ‘요란하지 않게 겸허한’ 같은 뉘앙스를 가지며 2연에서 다시 두 번 나타나는 “조금”도 기본적으로 1연의 뉘앙스와 연동되지만 한 번은 ‘약간’(양적인 의미), 또 한 번은 ‘짧은’(시간적인 의미)이라는 뜻을 거느린다. 그리고 이 “조금”은 「사랑의 변주곡」이나 「거대한 뿌리」에서 분출된 파토스를 어느 정도 규제하는 효과도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내용이 형식을 범람하려 하다가 그 직전에서 숨막히는 소용돌이를 만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다이다. 그것도 “많이는 아니고 조금”. “많이”는 이 시에서 추구하려는 가치가 원래 아니다. 그래서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또 1연의 3행과 5행을 “조금”으로 매조지하는 것은 읽는 이의 호흡을 매듭지어주는 효과를 갖는다. 그렇게 호흡을 매듭지어주고 2연으로 넘어가는데, 여기서는 “모르고”를 세 번, “깨어나고”를 한 번 사용하면서 호흡을 매듭짓는 게 아니라 확장시켜준다. 즉 ‘그리고’를 통해 어딘가와 연결시켜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1연과 2연은 전혀 다른 리듬을 갖는다.
2연의 내용은 모호하다. 그것은 “모르고”의 연속적인 사용 때문이기도 하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기 때문이다.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 모른다. 그리고 “가 닿은 언덕”도 모른다. 그리고 “거룩한 산에 가 닿기/전에는 즐거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모르고 모르고, 우리는 모를 뿐이다. 그런데 왜 2연은 맑고 경쾌하고 긍정에 가득 차 있는 느낌이 드는 걸까. 그것은 언어로 가리킬 수 없는 다른 세계와 시가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로지 음악성으로만 2연은 충만하다.
3연은 그 언어로 가리킬 수 없는 세계를 어떻게든 유사한 사물이나 사건으로 표현해보려 하면서 다시 호흡을 헝클어놓는다. 특히 1~4행까지의 익숙한 리듬은 5행과 6행,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 같고/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고”에서 한 번 더 비틀린다. 이것은 분명히 김수영의 의도이다. 언제나 그의 시는 편안함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일종의 기예적인 트릭인 것을 알게 되면 김수영의 시는 편안해진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새로운 진실(즉 새로운 리얼리티)”이 무엇인지 숙고하면 된다. 물론 대부분의 김수영 읽기는 이 지점에서 다시 좌절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2연에서 오로지 충만한 음악성으로만 가리켜지는 다른 세계의 모습은 굳이 말하자면, “임종의 생명 같고”, “꽃잎 같고”, “혁명 같고”, “큰 바위 같고”, 홀로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다. 자세히 보면 3연에서 김수영이 평생을 고뇌하고 서러워한 테마들이 모두 등장한다. 그것은 ‘죽음’(“임종의 생명 같고”) 그리고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즉 ‘구원’(“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한 잎의 꽃잎”) 그리고 ‘혁명’, 그리고 끝내 자신의 실존이 가 닿지 못할 수도 있는 ‘절대’(“큰 바위”)이다. 만역 시가 이렇게 끝났다면 이 시는 싱거운 시가 되었을 것이다. 왜냐면 고작 자기정리를 위한 작품으로 머물렀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들뢰즈에 기대 말하면, 그는 어느 글에서인가 글쓰기는 사유가 도달한 지점에서 쓰는 것이라고 했다. 글쓰기는 사유의 한계에서 앞으로 한발짝 더 밀고 나아가는 행위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이 작품에서 “작은 꽃잎 같고”를 그것으로 꼽는다. 그 “작은 꽃잎”은 처음에는 “나중에 떨어진”으로, 그다음에는 “나중에 떨어져내린”으로 변주되어 독립된 연으로 처리된다. 시의 마지막을 특정 시행을 독립된 연으로 빼서 처리하는 것은 시쓰기에서는 별도의 무게를 갖지만, 여기서는 내용이 형식을 범람하려다가 맴도는 소용돌이의 영속성을 표현하기도 하고 점점 더 작아지는 “꽃잎”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꽃잎”의 그치지 않는 변용을 말한다.
그 증거를 일 년 뒤에 쓴 「풀」에서 찾을 수 있거니와 “꽃잎”의 변용은 이제 바람과 함께 운동하는 “풀”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풀”이 민중을 상징하고 바람이 외세를 의미한다는 훗날의 해석은 별로 흥미롭지 않지만, 분명히 김수영은 혁명 이후에 민중의 실체를 인식했으며 그것이 시대적 조건을 이겨내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김수영의 민중은 저 70~80년대적 의미의 민중이 아니지만 “작은 꽃잎” 같이 오로지 운동하고 변용하는 민중이 세계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섬광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이 이 작품에서 의도치 않은 작용을 하는 것은, 세계의 본질을 구성하는 게 민중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관념적인 프로젝트를 되돌아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본질을 구성하는 게 민중이란 자각은 아마도 「거대한 뿌리」가 시초일 것이며 확실히 그 시에서는 혁명 직후에 발견한 혁명적 민중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퇴보라기보다 일종의 변형에 가깝고 설사 퇴보라고 하더라도 그 퇴보의 책임을 김수영에게 지우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것은 역사적 조건 탓이 더 크다.)
그는 관념의 허위가 ‘어두운 전조’를 통해 다른 세계와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으로 서로 관계짓”는 데 장애가 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꽃잎3」에서 “순자”가 등장한다. “순자”는 누구인가. “순자”는 “나의 방대한 낭비와 난센스와/허위를” 혁파한 존재이다. “순자”는 고작(!) “열네 살 우리집에 고용을 살러 온” “소녀”이며 “순자”는 구체적인 민중이다. 동시에 “조금”을 계속 되뇌다 결국 시인 자신이 도달한 타자이며 또 김수영 자신이기도 하다.
「꽃잎1」은 난해한 시이기도 하지만 그 난해성은 시적 인식으로만 느낄 수 있는 다른 세계를 한계가 명확한 언어 대신 음악성으로 표현하려 했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좋은 시는 가능한 한 많은 세계의 진실을 깊이 표현한다. 그 많은 진실이 함께 공존 가능한 것이 시이며 더 많은 진실이 더 깊이 표현되려면 난해함은 피하기 힘든 늪이다. 김수영이 「포즈의 폐해」에서 “난해시의 논의의 궁극적인 귀결은 난해시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난해시처럼 꾸며 쓰는 시가 나쁘다는 것이다. 말을 바꾸어 말하면, 좀 시니컬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 시단에 가장 필요한 것(강조-인용자)이 진정한 난해시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단순한 경구를 남발한 것이 아니었다.
시가 난해해질 수밖에 없는 내적 필연성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나는, 가능한 한 많은 세계의 진실을 깊이 표현하자면 시는 난해해질 수 있다고 고쳐 말했을 뿐이다. 그럼 난해시의 궁극은 어디인가. 김수영은 극적으로 그 실증적인 예를 남겨놓고 떠나갔다. 「풀」이라는 무의미시를 말이다. “‘의미’를 껴안고 들어가서 그 ‘의미’를 구제함으로써 무의미에 도달하는 길”(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통해서 말이다.
“작품 전문은 저작권자와 협의하에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