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박정희 동상 건립에 대한 인혁당 유족의 고백 /서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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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뉴스민은 대구시의 박정희 동상 건립 추진에 대한 각계각층의 비판 의견을 연속 게재한다. 두 번째는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희생자의 유가족인 서동훈 씨다. 서동훈은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돼 1975년 4월 9일 사형당한 서도원(1923~1975)의 아들이다. 서도원은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대구 합동신문사 및 대구 남선경제신문사 기자, 대구매일신문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4 · 19혁명 직후인 1960년 말 청구대학에서 결성한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도맹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혁명재판소에 의해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6조 위반으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아 서울교도소에서 복역 중 1963년 12월에 석방됐다. 1974년 3월 인민혁명당 재건 사건으로 구속됐고,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확정 판결 이후 다음날 사형이 집행됐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 사건이라고 발표했고,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 재판에서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저는 세칭 ‘2차 인혁당 사건’으로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서도원의 아들입니다. 1974년 4월, 국가가 이 사건을 ‘빨갱이들의 국가 전복 음모 사건’으로 명명하여 발표하자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모든 언론은 톱뉴스로 다루면서 기정사실로 했습니다.

당연히 저는 ‘빨갱이의 자식’으로 늘 어디를 가던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무서운 관심(?)은 아버지께서 잡혀가던 순간부터 관심을 넘어 ‘감시’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49주기를 맞아 현대공원에서 열린 추모제

첫 번째 감시는 평소 나와 동네에서 흉허물을 나누던 친구 등 이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잡혀가던 그날, 이른 아침 저는 등교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두 명의 남자에 의해 끌려간 아버지는 동네 어귀를 빠져나가며, 바로 수갑이 채였습니다. 등교하던 친구들은 당연히 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많은 친구들은 발길을 돌려 우리 집으로 와서 나무 대문의 얼기설기한 사이를 통해 집 안을 살폈습니다. 저는 그 눈길을 잊을 수 없습니다. 목소리 큰 친구들이 내뱉던 ‘간첩 이래!’ 하던 음성은 아직도 귓전에 생생합니다. 이후 이들은 언론이 재판 과정을 대서특필할 때마다 어떤 식으로라도 관심을 표했습니다. 이 같은 이웃들의 눈초리는 때때로 따뜻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그러는데 네 아버지는 독재에 맞서다가 그렇게 된 사람’이라며, 위로의 시선을 보낼 때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위로조차 부담이 되고, 피해가고 싶은 심리를 아십니까? (저는 훗날 제가 선생을 하면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면서, 모두의 관심 대상이 된 학생한테는 ‘너 많이 아프지?’라는 관심조차 상처가 될 수 있겠구나 라는 것을 느끼며, 제가 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감시는 더 가당찮고 끔찍했습니다. 국가가 조직적으로 한 사람을, 한 가정을, 현미경 들여다보듯 한 감시 앞에서 인간의 심리는 어떻게 작동할까요? (어느 날부터 우리 집을 감시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제가 스스로 내면세계를 50여 년간 살핀 결과는 ‘아무 일이 없는 듯이 지내기’였습니다. 매일 우리가 사는 아파트 경비실로 출근해서 해 질 녘이면 퇴근하는 형사와 맞서는 일을 수백 가지 경우의 수로 상정해서 살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맞서서 싸워 볼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출세를 해 볼까? 멀리 아무도 못 찾는 곳으로 사라져 볼까?

같은 처지의 형제들은 어떻게 행동할까를 살피기도 해봤습니다. <집단>에 감시를 받거나 따돌림을 당한 경우 말입니다. 같은 사건으로 저와 같은 처지인 경우를 먼저 살펴봤습니다. 천재 소리를 듣던 분이 알콜 중독의 반항아가 되거나 종교에 깊이 귀의하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이 중에 제일 많은 사례가 ‘아무 일 없는 듯이 지내기’같았습니다. 본인 스스로 다짐해서라기보다는 심리학 석학의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 심리의 작동 원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행태를 두고 용기 없다고 비난하고 싶겠지요.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민복기 대법원장, 주심 이병호 판사)는 인혁당사건 등 대통령 긴급조치위반 피고인 41명에 대한 상고심 선고 공판을 대법원 법정에서 열었다. 대법원은 도예종, 하재완, 서도원, 송상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여정남 등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을 확정하고 9일 오전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사형을 집행했다. [사진=민주화운동아카이브]
개인 경험 하나를 들고 싶습니다. 지방 언론사에 취직해서 밥벌이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자라고 관계를 맺어온 고향을 떠나, 멀리 옮기고 싶어서 서울 지역 언론에 응시해서 합격 통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녁에 편집국장이라는 분이 술을 사겠다고 해서 나갔습니다. 꽤 많은 양의 술을 먹고, 이분의 실수인지 본심인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합격 사실’을 알려 줬습니다. 아니 당사자도 모르는 것을 어떻게 이분이 알 수 있지요? 그 선배는 출입 형사가 알려줬다고 했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언론사를 담당하는 정보 형사가 있었습니다.)

이 순간 저는 어떻게 하는 것이 맞았습니까? 거두절미하고 저는 아무 일 없는 듯이 쑥스러워했을 뿐입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어디를 어떤 방법으로 감추고 살아도, 감시자는 죄다 안다는 절망이었습니다.)

이제 ‘진짜 고백’을 하겠습니다. ‘국가’라는 엄청난 집단으로부터 감시와 따돌림을 당한 저에 대해서 말입니다. 부끄러운 고백일 수 있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70년대 말, 80년대 초는 대학가의 데모가 가장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단 한 번도 데모에 가담한 적이 없습니다. 언론사에 취직을 해서는 기자협회라는 단체를 최초(?)로 탈퇴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서는 교수협의회라는 단체도 스스로 탈퇴해, 주변으로부터 따가운 시선과 함께 ‘독립군’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똘기’있는 사람으로 지목되기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의 답은 감시받고 따돌림 받아보라고 하고 싶을 뿐입니다. 제 몸속에 체득된 DNA 같은 것이 ‘집단에 대한 불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나이가 되도록, 나름 철이 든 이후부터는 집단에 가입해 본 적이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많은 계모임도 하나 없이 살고 있으니까요.

이런 제가 좀 비정상적인 구석이 있지요.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더 욕먹을 이야기도 하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어느 날, 국가라는 집단이 아버지 사건을 두고,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당연히 기쁘고 눈물 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솔직히 언젠가부터 ‘집단’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는 그 모든 것이 부담스러워진 저를 발견했습니다. ‘모든 관심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가해자 ‘국가’가 공식적으로 하는 ‘사과’도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습니다. “머지않은 날 괴물 같은 ‘집단(국가)은 또 표정을 바꿀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지울 수가 없어!” 저는 이날까지 그 생각을 ‘확증 편향’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박정희 동상 건립이라는 문제가 ‘봤지?’ 하는 모습으로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제 느낌을 먼저 얘기하겠습니다.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한다’고 분명히 얘기했고, 국가가 사과한다고 머리까지 조아렸습니다. 그런데 그 가해자의 동상을 세운다니요. 뭐라고요. 그분은 ‘과’도 있지만 ‘공’도 많은 분이라서, 그 ‘공’을 기린다고요?

좀 과하다는 말씀하실 분도 있겠지만, 이런 예를 들고 싶을 뿐입니다. 태권도 세계 챔피언을 한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후손이 그 선대의 ‘태권도 세계 챔피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살인 피해자 마을 입구에 동상을 세우는 꼴과 무엇이 다를까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당한 사람 8명 중 절반이 대구 사람이며, 아직 가족들은 대구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운명을 달리한 분들과 가족들까지 합치면 1백 명이 넘는 분들이 ‘대구 시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홍준표 시장님. 이런 ‘대구 시민’들의 입장을 3초간 만이라도 생각을 해보시고, 다시 판단해 주시죠. 그분은 공인이고, 당신네는 평범한 시민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특히 대구의 관문인 동대구역 광장을 건립 장소라고 선택을 하셨더군요. (그냥 너희가 대구를 떠나라고 말씀을 해주시던지요.)

요즘 한창 사회적 이슈와 쟁점으로 떠오른 ‘집단 따돌림’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엄격한 것이 현실 아닙니까? 그런데 ‘국가’는 예외의 집단입니까? 나아가 ‘2차 가해’에 대해서는 어떻고요. ‘2차 가해’를 자행하다가는 중벌을 면치 못하는 것이 현실 아닌가요?

제가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이 문제를 ‘2차 가해’라고 생각하지 말고, ‘2차 감시’를 한다고 판단하고, ‘아무 일 없는 듯이’ 그냥 지내는 것이 맞을까요?

서동훈
인혁당 재건위 사건(2차 인혁당 사건) 희생자 서도원의 유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