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덟 번째 희생자와 같은 건물에 사는 전세사기 피해자다. 고인은 으레 전세사기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모습의, 실의에 빠진 분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자신의 상황에 최선을 다하고 피해 사례를 적극적으로 알린 분이다. 정부는 여러 해결책을 내놓지만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임대인 조 씨 일가는 지금도 악성임대인 목록에서 빠져 있다. 고단한 일상에서 쉴 수 있던 집은 이제 숨을 옥죄는 고통의 공간이 됐다. 이젠 사람을 믿을 수도, 약이 없으면 잠에 들 수도 없다. 단순히 돈을 잃은 게 아니라 삶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 (대구 남구 전세사기 피해자)
18일 오후 6시 30분, 지난 1일 숨진 대구 전세사기 피해자 추모제가 열렸다.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 전국대책위, 대구대책위, 시민사회대책위 등 주최 측은 추모제에서 정부와 여당, 대구시에 피해자들이 더 이상 벼랑 끝으로 내몰리지 않도록 당장 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이달 8일 기준 대구시 피해 접수 신청건수는 444건으로, 이 중 323건이 국토교통부로부터 피해 인정을 결정받았다.
지난 1일 대구 남구의 전세사기 피해자 A 씨는 “빚으로만 살아갈 자신이 없다. 도와주지 않는 이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서민은 죽어야만 하나”라고 적힌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전국에선 여덟 번째, 대구에서 첫 번째 전세사기 피해 희생자다. 대책위원회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던 A 씨는 숨지기 전 대구시, 남구청 등에 백방으로 도움을 요청한 걸로 알려진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인 안상미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 공동위원장은 “전국의 피해 사례를 상담하면서 어느 한 지역만의 문제가 아닌 걸 알았다. 전세사기는 인간의 기본권인 주거를 흔든 악독한 범죄”라며 “전세사기를 당하고 1년여 간 주변을 지나는 이들과 함께 하는 소소한 행복을 잃어버렸다. 변호사도, 중개인도 당했다. 이 시간 이 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에게 나의 가족, 친척, 친구 누구라도 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개인 문제로 보는 사회적 인식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서구 빌라왕 전세사기 피해자인 이철빈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 공동위원장은 “감히 그 심정을 다 알 수 없지만 피해자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건 아무도 손 내밀어 도와주지 않는 고립감 때문일 것이다. 가급적 가족, 친구 등 신뢰할 수 있는 주변에 알리고 함께 버텨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나도 아직 힘든 부분”이라며 “여덟 번째 희생자 분이 돌아가신 5월, 아이에겐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이 슬픈 일이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희생자가 나오고서야 움직이는 지자체를 비판하는 발언도 나왔다. 장선훈 대전 전세사기 피해 대책위원장은 “인천에서 희생자가 나온 다음에야 특별법이 만들어졌고, 대전에서 희생자가 나온 다음에야 대전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은 죄책감 때문에 희생자를 온전히 추모할 수 없다”며 “우리에겐 정부, 여당, 국토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여덟 번째 희생자에게 추모의 말을 전할 수 없다. 대신 분노하고, 힘을 모아서 해결을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대구 전세사기 피해 대책위는 17, 18일 이틀간 대구 전세사기 희생자 추모분향소를 운영했다. 18일 저녁 분향소에 들른 취업준비생 김소정 씨(25) 씨는 “추모제와 추모분향소에 참석하기 위해 일부러 왔다. 대구에 전세사기 희생자가 나왔다는 걸 뉴스를 보고 알았다. 전세사기는 개인이 아닌 사회문제이며, 나와 내 주변에도 생길 수 있는 일”이라고 전했다.
한편 지난 17일 대구 남구(구청장 조재구)는 전세사기 피해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대구시와 9개 구·군 중 전세사기 피해자들과 간담회를 가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남구는 통·반장을 통해 빌라 중심으로 피해자 파악에 적극 나설 것, 피해자에 대한 심리 상담을 지원할 것, 임대인이 방치하고 있는 건물 하자 보수 및 소방안전과 관련해 적극 지원할 것 등을 약속했다,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