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054] 1980년 대구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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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이라고 하면 으레 광주를 떠올린다. 광주는 민주주의라는 상징성을 지닌 도시가 됐고, 시민들은 집단 기억을 공유한다. 광주 내에서도, 광주 밖에서도 5월이면 신군부에 대한 광주 시민의 저항, 정당성 없는 신군부의 무자비한 폭력을 잊지 않으려는 기억투쟁이 여전히 진행형이다. 광주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광주의 아픔, 상처를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다. 광주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대구 중·남구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한 도태우 변호사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북한군개입설을 주장해서 논란이 됐다. 이 일로 국민의힘 공천이 취소됐지만, 무소속으로 출마해 완주했다. 무소속 후보로 나선 이후에는 특별히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논란에 더 말을 하지 않았다. 5·18민주화운동은 대구의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5·18민주화운동을 광주에만 제한해 기억하지 않는 일이 더 중요하다.

지난해 흥행한 영화 ‘서울의 봄’의 영향으로 5·18민주화운동을 촉발시킨 신군부의 쿠데타 계획도 어느 정도 알려졌다. 1979년 10.26 이후 5월 17일 신군부의 2차 쿠데타가 일어날 때까지 대구는 조용했을까. 그렇지 않다. 1980년 봄 광주에서 대학생들이 신군부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듯이 대구도 그랬다.

▲5.18 사진전을 보는 시민들 (뉴스민 자료사진)

계명대학교 학생들은 그해 5월 12일부터 16일까지를 민주화 투쟁 기간으로 선포하고, 14일에는 ‘비상계엄 철폐’, ‘전두환 신현확 퇴진’, ‘언론자유 보장’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 시위 후 도심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경북대학교 학생들 역시 교내 시위 후 7,000여 명이 도심까지 가두 행진을 시도했다가 진압에 막혀 학교로 복귀했다. 영남대학교 학생들은 경산에서 대구 대명동캠퍼스까지 무려 18km를 1만 3,000여 명이 행진했다. 당시 학교법인 이사장이었던 ‘박근혜 퇴진’ 구호와 ‘유신잔당 척결’을 외쳤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5일 계명대학교에 전국 최초로 휴교령을 내렸다. 광주보다 3일 앞서 학생들을 폭도로 낙인찍은 것이다. 국가기록원에 남은 신군부의 문건을 보면 경북 계엄분소가 불법으로 연행한 대구시민이 244명에 달했다. 182명이 대학생이고, 62명은 대학생이 아닌 민간인이다. 5월 15일 이미 신군부는 대구의 민주화운동을 차단하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였던 것이다.

신군부가 1980년 5월 18일 이후 광주를 고립시키기로 작정했지만, 모든 대구시민의 귀를 막을 수는 없었다. 5월 21일부터 몇 차례 ‘광주 시민 봉기의 전말’이라는 내용으로 유인물이 도심에 살포됐고, 벽보가 나붙었다.

이 일로 구금되거나 강제징집된 대학생도 여럿 나왔다. 광주의 실상을 알리고자 하던 이들은 대학생만이 아니었다. 1980년 5월 경북대 서문 인근에서 두레서점을 운영하던 두레양서조합원들도 광주학살의 진상을 알리고자 여러 차례 모였다가, 그해 9월 간첩죄를 씌우려는 신군부에 끌려가 불법구금 됐다. 농민, 교사, 교수, 회사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시민들이었다.

이때 불법구금돼 고문을 받고 풀려났고, 지금은 경북에 사는 5·18민주화운동유공자와 대화가 생각난다. 그는 자신이 5·18유공자라는 이야기를 꺼내면 “1980년 광주가서 데모했어? 아니면 가짜 유공자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광주민주화운동의 가짜 유공자설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일 때 가장 가슴 아프다고 했다.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폄훼를 바로잡으려는 일을 광주시민들에게만 내맡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1980년 대구의 봄을 기억해야 한다. 1980년처럼 또 다시 광주를 고립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1980년 대구에서 일어난 5·18민주화운동을 대구시민들이 함께 기억해야 한다.

천용길 기자
droadb@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