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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근은 1981년『월간문학』신인상에「죽은 목각 인형의 방문」이 당선되어 시단에 나왔다. “저물녘,/ 와이샤스 한 장을 빨아 널어놓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나는 기다렸다./ 황혼이 바다 하나를 적시면서부터/ 더 확고한 어둠에 몸이 갇히기 직전/ 삐거덕 삐거덕/ 작은 바퀴 움직이는, 걸어놓은 흰 샤스 위에/ 붉은 나비들이 날아앉고 있다.”라고 시작한 이 시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아아, 보인다 보인다 모두 보인다/ 건너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저 텅빈 죽음의 초라한 궤적들./ 누가 다스릴 것인가 다스릴 것인가/ 여분으로 남아있던 바다마저/ 쿵쿵 아무렇게나 피를 쏟는데,/ 나는 끌고 온 유모차를 잃어버리고/ 발을 절며 언덕을 넘어간다.”
시인의 첫 시집『유적지를 나서며』(그루, 1983)를 지배하는 정념은 등단작에서 본 것과 같은 상실과 소외다. 등단작의 시적 화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와이셔츠를 빨아 놓고, 그것이 마르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다. 이 풍경은 시의 마지막 두 행으로 돌이키기 못할 게 되는데, 도중에 나오는 또 다른 한 대목은 화자의 이런 감정이 현실의 억압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해 준다. “비로소 어둑어둑 함몰하는 바다에/ 교통순경의 호루라기 소리가/ 일순, 바다를 경직으로 몰아 넣는다.” 하지만 시인이 느끼고 있는 억압은 독자가 실감하지 못할 만큼 정체가 희미하다.
젊은 시인들의 첫 시집에서 상실과 소외의 감정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가 구별할 수 있는 것은 개개의 시인들이 드러내는 강도의 차이뿐이다. 이들의 첫 시집이 동일한 정념으로 물들어 있는 이유는 그들에게 사회적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유적지를 나서며』의 맨 앞에 실려 있는「불타는 바다」의 첫 연을 보자.
“태초에 바다는 공소한 울림이었다. 이미 찢어진 옆구리를 통해 퀭하게 널브러져 있는 죽은 바다에 입술을 대어, 나는 전신으로 인공호흡을 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죽은 者는 죽은 者. 오늘도 나는 익숙한 연해를 그대와 함께 손을 잡고 거닐고 있다. 그러나 죽은 者의 이름은 죽은 者. 그대는 형틀에 묶여있는 나를 온몸으로 밟아 멀어진다.” 이 우울한 풍경이 “오, 어금니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젊은 고통을 사려물고 마침내 나는 절명하였다.”라는 비극적 제스처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는 이유도 알고 보면 제 자리가 없는 청년이라는 신분과 연관된다.
등단작, 첫 시집의 표제작, 첫 시집의 맨 앞에 실려 있는 시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바다’는 이 시집을 통틀어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이미지다. “바다는 매춘부”(「바다, 授乳의 즐거움을 허락하지 않는」), “나무들은 그 바다를 지키며 자라다 죽는다.”(「유적지를 나서며」), “오오, 잿빛 한 마리 새여/ 이 험한 바다를 딛고 어디로 가려는가.”(「海圖에서」), “나는 또 다시 바다로 나가 집을 짓는다.”(「겨울닻」), “도둑맞은 바다”(「흔들리는 구도」), “바다를 찾아가/ 바다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일이 잦아졌다.”(「목소리」) 시인은 대구에서 태어나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대구에서 자랐다. 그런데 왠 바다일까.
동양에서 전원이나 산은 사회생활을 마친 은퇴자들이 돌아갈[歸去來] 곳이었던 반면, 바다는 흑선(黒船)과 같은 제국주의나 예술상의 낭만주의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풍경으로 등장한 바가 없다. 산수화(山水畵)는 있어도 바다나 항해를 그린 그림은 없었던 것이다. 최남선은 제국주의를 마주하고서야「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를 썼고, 임화는 그의 첫 시집『현해탄』(1938)을 혁명적 낭만주의로 물들였다. 거기에 비해 1960년대 한국 시단의 상투어였던 바다는 조선 중기에 나온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에서도 퇴보했다. 젊은 시인들에게 바다는 소외된 개인이 자기 자신으로의 복귀(내면 탐구)나 비사회적 영역으로의 도피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윤성근은 “한 마리 새로서 내가 추락한 곳은/ 상징의 바다였다.”(「바다 기행」)던, 그 바다와 결별하고서야『우리 사는 세상』(고려원, 1987)이라는 두 번째 시집을 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