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세월호 참사 10주기, 대구에서 세월호를 말한다는 것

10년째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활동, 한유미 대구416연대 집행위원장
"국가는 바뀌지 않았지만 국민들은 바뀌었다"
"대구4.16연대는 연결자···세월호 참사 기억하는 시민들의 공간 만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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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세월호를 말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두고 그 의미를 듣고자 했을 때, 모두가 한유미 집행위원장을 언급했다. 또 누군가는 덧붙였다. 많은 이가 대구를 보수색 짙은 불모지라 하지만, 지난 10년간 매주 토요일 대구 시내 중심가에서 펼쳐진 세월호 서명운동을 봤다면 쉽게 단정지을 수 없을 거라고.

지난 9일 오후, 중구에 위치한 대구4.16연대 사무실을 찾았다. 사무실 중간 넓은 책상에선 오전부터 리본공방이 펼쳐져 있었다. “10주기 행사를 앞두고 리본이 많이 필요해서. 오전, 오후, 저녁 세 팀이 와서 리본을 만들어요” 분주하게 전화를 받고 문서 작업을 하며 한유미 대구4.16연대 집행위원장이 말했다. 책상 위 수북하게 쌓인 노란 리본만큼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겠지만, 한 집행위원장은 자주 ‘다음 과제’를 말했다. 그리고 대구가 가진 연대의 힘을 강조했다.

▲4월 9일 화요일 오후, 한유미 대구4.16연대 집행위원장을 만났다. 전교조 대구지부 상근활동가인 한 집행위원장은 “국가는 바뀌지 않았지만 국민들은 바뀌었다”고 말했다.

Q. 올 초 결성한 세월호 참사 10주기 대구시민위원회에는 얼마나 모였나.

4월 3일 기준 단체는 100개, 개인은 500명 정도 모였다. 4.16연대,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4.16재단 같은 단위를 ‘4.16연대 중앙’이라고 편의상 묶어서 표현하는데, 1년 전부터 중앙에서 함께 10주기 행사 논의를 시작했다. 대구4.16연대는 작년 10월부터 실무 준비에 들어갔다.

Q. 대구4.16연대 상황은 어떤가?

안 그래도 10주기를 앞두고 소속 단체들을 정리해 봤다. 그동안 대구4.16연대 소속으로 이름을 올려둔 단체가 81개였다. 리스트를 뽑아서 업데이트해 보니 단체가 70여 개 정도로 줄었더라. 세월호 참사에 대한 관심이 없어져서 라기보단 지난 10년 동안 시민사회단체 상황이 어려워진 탓이다.

대구·경북에서 4.16연대 중앙과 대구에 후원하는 회원은 250명 정도이다. 이 중 200여 명은 중앙으로 후원하고, 50여 명이 대구로 후원한다. 그동안 후원회원 확대 사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50명은 대부분 10년 전부터 꾸준히 후원한 분들이다. 대구로 들어오는 후원과 중앙에서 지원하는 사업비로 매년 사업을 꾸려왔고, 연간 누적 참석인원은 600~700명 정도 된다.

Q. 대구4.16연대 활동의 지난 흐름을 간단히 설명해달라.

세월호 참사 발생 직후 대구에서도 대책기구를 꾸렸다. 2014년 5월 처음 세월호 참사 대구시민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대구지역 단체들이 모여서 집회를 열거나 사업을 해오다가 2019년쯤 대구4.16연대로 전환했다. 한 축에 시민사회단체를 회원으로 두고, 다른 한 축으론 활동에 적극적인 개인을 연결할 수 있도록 조직을 전환하는 게 목표였다.

전국에 대구4.16연대와 비슷한 형태의 단체들이 있다. 중앙의 4.16연대와는 수직도, 수평도 아닌 개별 조직들이다. 내용적으로 연결되어 협업하는 관계라고 볼 수 있겠다. 시민단체 중심이거나, 개인 중심의 조직이거나 각자 지역 상황에 맞게 단체가 만들어져 유지되고 있다.

Q. 이번 세월호 참사 10주기 행사를 준비하면서 무엇을 가장 중점에 뒀나.

단체를 몇 개 모으냐, 사업계획을 어떻게 세우냐가 중요하진 않았다. 세월호 참사 10년을 기점으로 우리가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평가하고, 여기에 기초해서 앞으로 사회적 재난 참사 운동이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나눴다. 그동안 진심을 갖고 활동해 온 이들을 만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우선 동네에서 세월호 활동하시는 분들과 워크숍을 여러 번 진행했다. 대구의 집행위원끼리 회의를 하고, 중앙의 활동가들을 모셔서 조언을 듣기도 했다.

Q. 회의에선 주로 어떤 내용이 논의됐나.

‘국가는 바뀌지 않았지만 국민들은 바뀌었다. 국민들이 바뀌어 가는 과정을 우리가 만들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이게 결론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이 통과된 과정과 비슷하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산업재해로 하루에 7~8명이 죽는 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사업주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이 생겼다. 재난참사도 마찬가지다. 크고 작은 재난참사가 있었다. 삼풍백화점 붕괴가 대표적이며 대구에서도 상인동 가스폭발사고, 대구지하철참사가 있었다. 재난 참사의 책임이 개인에게 있다는 인식에 기반해 개인에 보상을 해주는 방식으로 정리가 됐다면, 세월호 참사를 기점으로 우린 국가의 책임을 말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재난’, ‘사회적 참사’라는 용어가 보편화된 것도 세월호 참사 이후라고 생각한다. 국가가 재난 참사를 예방해야 하고, 참사가 발생했을 땐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세월호 사건 이후 국민들 사이에 분명히 자리 잡았다.

Q.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태원 참사가 떠오른다.

이태원 참사를 두고 아직도 일부는 “놀러 가서 죽었다”고 말한다. 세월호 참사 때도 마찬가지였다. 제주도에 놀러 가다 죽었는데 그걸 왜 국가가 책임지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젠 ‘놀러 가다가도, 일하다가도 죽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 많다. 개인의 탓이 아닌,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일이라고 인식이 변했다. 국가의 책임을 요구하고 피해자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회로 진입했다고 본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생명존중 안전사회를 바라는 많은 시민이 지난 10년 간 외쳐왔기에 가능한 변화다.

Q. 인식 변화는 이뤄냈지만 여전히 남은 과제가 많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다. 박근혜 대통령 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고, 당시 배가 4년간 바다에 빠져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 때 배는 건져 올렸지만, 진상규명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책임자들을 요직에 앉혔다. ‘국가가 변하지 않았다’는 건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 모두 느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유가족과 시민들이 이뤄낸 부분도 있다. 직접 축적한 자료 양이 엄청나다. 세월호 특별법과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드는 성과를 냈음에도 침몰의 원인과 구조 방기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고, 책임자 처벌도 온전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사실 유가족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나처럼 아이를 잃는 부모가 더는 없어야 한다’는, 재발방지에 대한 간절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제가 선결되지 않은 건 우리 사회가 점점 복합위기 사회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위기, 정치권력의 위기에 더해 오송참사 같은 기후위기들이 빈번해지고 있다. 이걸 관리하고 감독하는 국가의 책임이 훨씬 높아져야 한다는 뜻이다.

과제는 분명하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온전하게 이뤄져야 한다. 그에 기초해서 생명존중 안전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여러 법과 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 10년 전 외치던 것과 동일한 요구이다.

▲인터뷰를 위해 찾은 대구4.16연대 사무실에는 리본공방이 펼쳐져 있었다. 한 집행위원장은 “10주기 행사를 앞두고 리본이 많이 필요해서  오전, 오후, 저녁 세 팀이 와서 리본을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Q. 10년 활동의 동력이 뭔지 궁금하다.

유가족은 부모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부모들이 포기하지 않으면 나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전의 참사와는 다른, 세월호 참사가 갖는 어떤 지점이 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내 아이가 고3, 고1이었다. 세월호 활동가 중 당사자성을 느끼는 내 또래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용산참사는 굉장히 아픈 이야기지만 내가 철거민이 될 가능성이 높진 않다. 쌍용차 투쟁 당시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을 하며 싸웠지만 내가 당장 정리해고 당사자가 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고등학생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가다가 죽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회적 참사라는 데서 그 광범위한 당사자성이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것 같다. 그래서 유가족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여기까지 오게 해줬다.

약간은 꼰대스러워도 어른들이 잘못 살아서 아이들이 죽었다는 생각을 한다. 죄책감과 공감대, 책임감이 커서 세월호 운동을 시작한 것도 있다. 그 과정에서 만난 부모들이 다 이웃이 되었다. 처음에는 말도 못 붙이고 눈도 못 마주치고 계속 울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니 속속들이 사정도 알게 되고, 이젠 같이 웃기도 한다.

Q. 지난 10년간 매주 토요일 대구 시내에서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10년간 일부 비 오는 날, 명절을 제외하곤 매주 토요일 서명운동을 했다. 기네스북에 올려도 되지 않을까 싶다. (웃음) 대구지역 70여 개 단체 중 여력이 되는 곳에서 집행위원을 파견하는데, 그 7~8개 단체가 돌아가면서 서명운동을 했다. 북구, 동구 등에서 세월호 약속 지킴이를 하는 마을활동가들도 돌아가면서 나왔다. 대구는 이 힘이 굉장히 크다.

서명을 하고 리본을 받아 가는 시민들도 계속 있었다. 시민들 반응이 있으니 서 있는 두 시간 동안 하나도 지겹지 않았다. 대구는 특히 지하철참사와 상인동 화재폭발 사건이 비교적 최근에 있었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에 공감하는 시민이 많은 것도 같다. 나이 든 분들의 기억 속엔 우리 지역의 참사가 생생하다고 느꼈고, 실제 관련된 분도 꽤 만났다.

Q.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든 부분이 있을 것 같다.

10년이란 시간을 달려오다 보니, 지치고 무력감이 들기도 한다. 해야 할 과제는 명확한데 부모님도 활동가도 많이 늙었다. 건강이 악화되고 활동가 수도 줄고 국민적인 관심도 떨어진다. 언론에선 제대로 진상규명이 안 된 부분을 다뤄주지 않는 등 악화된 역량과 여건 속에서 10년의 과제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고민되는 것도 맞다.

Q. 지난해 말 재난참사피해자연대가 공식 발족했다. 큰 성과 아닌가.

참사 피해자들이 다른 참사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상설 기구를 만든 것은 민·관 통틀어 최초다. 세월호 유가족이 그런 면에서 굉장히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몇 년 뒤 대구지하철참사 추모제에 유가족이 왔다. 다른 참사 유가족들을 찾아다니고 연대하는 노력 속에서 연대체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10주기를 앞두고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중심으로 전국의 참사 유가족을 만나고 논의하는 과정을 공들여 한 걸로 알고 있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이번 전국 도보행진도 이태원 참사 유가족 중심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런 힘이 모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Q. 대구416연대 활동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전교조에서 상근 활동을 오래 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당시에도 전교조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책위에 차출됐다. 전교조 내부적으론 교육자로서 세월호 참사에 갖는 부채감과 책임감이 있기에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지지해 줬다. 물론 양쪽 단체 일이 몰릴 땐 힘들기도 하고, 힘에 부칠 때도 있다. 그래도 이 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개인적으로는 되게 피폐해졌을 거란 생각을 한다.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세월호 운동을 하면서 난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유가족은 ‘우리에게 고맙다’, ‘곁에 있어 줘서 힘이 난다’고 하지만 반대로 내가 덕분에 절망과 좌절이 아닌 희망을 말할 수 있었다. 정치 질서가 바뀌지 않는 건 괴롭지만 시민들의 흐름은 분명 변화했고, 그 속에서 보람이 있다.

Q. 대구4.16연대의 다음 10년 과제는 무엇인가.

대구4.16연대는 연결자이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부채감을 갖는 시민들이 말하고 손잡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앙과 호흡을 맞춰 가면서도 대구 안에서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국가와 지자체의 역할을 요구하는 활동을 해 나갈 것이다.

대구지하철참사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가 많다. 당시를 떠올려보면 나도 마음 아팠던 것만 기억이 난다.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은 못 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만나면서 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을 다시 만났다. 그들에게 남은 과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대구시민의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우리가 계속해서 연대해 해결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밖에 조직 구조나 운동의 방향은 아직 고민 중이다. 적지 않게 모인 단체나 개인의 힘을 질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생명존중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슈를 갖고 공감대를 확산해 나가는 역할에 더해, 유가족과 활동가들이 지치지 않도록 곁이 되어주는 역할도 하고 싶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