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권력과 권위의 자리다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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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의 혼란함이 겨우 종결된 1637년 음력 2월, 지난해 12월 부임한 예안현감 김경후金慶厚는 현감으로서 중요한 일 하나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역 서원을 둘러보고 그곳에 배향된 인물들을 참배하는 일이었다. 예안현은 영남학의 메카이자 동방오현으로 문묘에 배향된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과 역동 우탁 선생을 모신 역동서원에 대한 참배였기에, 부임 후 두 달 만에 방문이 늦기는 늦었다. 하긴 전쟁이 터져 인사 검증의 일종인 서경도 없이 부임했고, 부임하자마자 백성들을 닦달하여 무기로 쓸 쇠를 구해 조정으로 올리다 보니, 지역 서원 방문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기는 했다.

연통을 받은 도산서원도 바빠졌다. 아무리 미관말직인 현감이지만, 그래도 예안고을에서는 국왕이 파견한 지역 권력의 상징이지 않은가! 도산서원 원장 김광계는 음력 2월 25일 아침 댓바람부터 서원을 찾아 직접 현감을 맞을 준비를 했다. 현감이 도착해서 이동할 동선을 짜고, 상덕사尙德祠 참배를 준비했다. 그리고 현감을 대접할 음식과 술도 직접 확인했다. 예안뿐만 아니라, 영남을 대표하는 서원으로서 그 법도와 예의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김광계가 새벽 댓바람부터 서둘렀지만, 현감이 도착한 시간은 날이 거의 저물어서였다. 도산서원을 들러 역동서원까지 둘러볼 계획치고는 늦은 도착이었다. 그런데 현감은 혼자 도산서원을 찾은 게 아니라, 아들 김문욱과 생질 채성귀를 비롯한 조카 6명을 더 대동했다. 지난해 말 전쟁을 피해 현감 김경후와 함께 남쪽 지역으로 도망쳐 왔다 아직 한양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들이었다. 갑작스럽게 떼로 들이닥친 탓에 당황도 했지만, 계획대로 상덕사 참배를 하고 술까지 대접했다. 이후 역동서원 방문 역시 큰 문제는 없었다고 했다.

새벽부터 현감의 방문으로 분주했던 김광계 역시 비교적 흡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전체적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으니, 일단은 잘 끝난 듯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원에서 급한 연통이 도착했다. 도산서원과 역동서원을 들러 술까지 잘 마시고 돌아간 예안현감이 갑자기 도산서원 원장에게 배속된 종 5명과 집사들에게 배속된 종을 잡아가려 한다는 소식이었다. 서원에 도착해 보니, 현감 주위에서 집사들을 닦달할 필요가 없다고 말리는 바람에 이들은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 현감은 다시 차사들을 보내 도산서원과 역동서원의 장무掌務(실무 담담 관리)를 잡아들였다. 김광계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다음날 장무들이 잡혀들어갔던 이유를 들은 예안 고을 선비들은 비웃음을 감추기 힘들었다. 예안현감이 마음이 상했던 이유는 도산서원과 역동서원 두 곳에서 모두 현감의 좌석을 동쪽 벽에 배치했기 때문이었다. 현청으로 돌아간 예안현감은 자신을 상석에 앉히지 않았다는 조카들 말을 곰곰이 씹어 생각하다, 부아가 치밀어 올랐던 듯했다. 그러나 도산서원과 역동서원에서 그 자리에 현감을 앉게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조선 역시 직위와 연령에 따라 좌석을 배치하는 일은 의례의 일종이었다. 요즘도 행사를 할 때 ‘의전이 반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좌석 배치가 중요한 점을 감안하면, 조선시대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조선의 경우 일반적으로 북쪽 벽을 등지고 앉는 자리가 주인 자리이고, 손님은 북쪽을 바라보면서 가장 가까운 동쪽에 높은 지위(연장자)의 손님이 앉았다. 그리고 그 다음은 서쪽, 그리고 다시 동쪽 자리 순으로 이어졌다. 즉 북쪽→동쪽→서쪽→(동쪽→서쪽→)남쪽의 순으로 좌석을 배치했다. 이는 엄밀한 동서남북의 방위에 따르기보다는 들어가는 문을 남쪽으로 상정하여, 문에서 가장 먼 쪽이 상석이고 문으로 내려올수록 말석이 되는 형태이다.

주인과 손님 둘만 있는데 이 둘의 지위가 다를 경우, 주인은 북쪽 벽을 등지고 앉고 손님은 북쪽 벽을 바라보는 남쪽 자리에 앉았다. 이에 비해 주인이 둘이거나 또는 지위가 유사한 경우에는 동서로 마주보고 앉기도 했다. 물론 모든 의례는 오는 사람에 따라 그때그때 적용하기 때문에 서로 오해만 없으면 예나 지금이나 문제 될 일은 없었다. 서원의 경우 이 원칙은 강했으면 강했지 약하지 않았다. 도산서원과 역동서원에서는 모두 원장이 주인으로서 북쪽 벽을 등지고 앉았으며, 현감은 가장 가까운 동쪽에 앉힘으로써 가장 높은 지위의 손님으로 예우했다.

예안현감 김경후가 화가 난 이유였다. 도산서원과 역동서원에서는 쉬 인지하지 못했지만, 김경후가 관아에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자신의 자리는 당연히 가장 상석인 북쪽 벽을 등지는 자리였어야 했다. 그러나 예안의 두 서원에서는 현감의 지위를 무시하고 자신을 손님의 자리에 앉혔던 것이다. 예안의 최고 권력에 대한 서원의 대접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원의 생각은 달랐다. 서원 원장은 개인 지위가 아니라, 그 서원이 배향하고 있는 성현들을 대리하는 자리였다. 지역 공동체를 통해 성현으로 인정받은 성현을 배향하고 있는 곳이 서원이기 때문에, 유학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조선 사회에서 이는 이념적 권위의 상징이었다.

이 때문에 관료들이 서원을 방문할 때는 당연히 손님 자리를 자처했다. 강력한 국가 권력이라도 유학의 권위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점을 관료 스스로가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임명장에 인사 검증도 제대로 받지 않고 전쟁통에 부임했던 관료가 쥐꼬리만한 권력을 앞세워 유학의 권위를 밀어내려고 했으니, 지역 선비들 입장에서는 비웃음이 나올 만도 했다. 물론 본래 권위 없는 권력일수록 눈에 보이는 물리적 자리만 탐하는 법이니, 김경후 입장을 이해 못할 일도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