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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부장제 시스템이 종용하는 ‘명예 남성’ 딜레마
모든 종류의 차별은 단순한 기준으로 분별할 수 없는 문제다. 차별을 은폐하기 위해 항상 기득권 집단은 ‘예외’를 만들어내는데, 대개 차별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소수의 성공사례를 홍보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이들이 선호하는 모델들이 피나는 노력으로 성공해 타의 모범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게으르고 피해의식에 젖은 불만 세력들이 현실에 실재하지 않는 차별을 내세워 반대급부를 ‘날로’ 얻으려 한다는 논리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레퍼토리다.
물론 동등한 조건에서 좌절하고 정체되는 이들과 주경야독으로 자수성가하는 이들이 구분되는 건 엄연한 사실이지만, 기득권 집단은 자신들이 상속을 받았거나 ‘파워 엘리트’ 집단의 상호 담합으로 얻은 부당이득에 대해선 애써 감추기로 일관하면서 동시에 위의 예외적 사례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는데 열심이다. 미디어의 범람 속에서 한쪽에선 ‘재벌’ 3세, 4세와의 로맨스가 무한복제되는 반면, 지난해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처럼 부의 세습을 위한 온갖 행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제는 현대판 귀족처럼 부의 척도로 시민의 평등권이 부정되는 현실에 도달한 셈이다. 시청자는 치를 떨다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드라마의 논리를 체념한 채 수용하기 시작한다.
그나마 판타지로 현실을 망각하도록 주입하는 ‘신데렐라’ 복사판보다는 민낯이라도 보여주는 작품들이 현실과의 연결고리는 최소한 남기는 의의가 있긴 하다. 해당 드라마에서 후계자가 승계 과정에서 벌어진 범죄에 경악해 상속을 포기하겠다고 하자 그룹 총수의 일갈, ‘자기 손으로 10원 하나 벌어본 적 없는 주제에!’라는 어두운 진실이 폭로되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그런 기득권 집단을 도우며 자신을 충복으로 스스로 개조하는 이들의 모습이 신랄하게 묘사된다. 오히려 시혜적으로 온정을 베풀거나 최소한 자기 이미지를 위해 선행도 일삼는 ‘주인’에 비해 이들은 더 냉혹한 기술자들로 표현되곤 한다. 그리고 극 중 주인공이건 이를 관전하는 시청자건 그 ‘주구’들에게 더 분노를 느끼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게 ‘세뇌’된 이들의 탄생은 기득권 체제의 줄창 지속된 ‘포섭’의 결과일 따름이다.
성차별의 역사 역시 동일한 패턴을 따른다. 수많은 사례에서 차별당하는 집단 중 일부는 자신들을 차별하는 권력의 최말단에 속해 약간의 이득을 얻는 대신 권력자가 일일이 챙길 수 없는. 혹은 애초에 자신들의 손을 더럽히기 싫지만 일관된 실행과정을 대행한다. 자본의 편에 선 어용노조 간부나, 가족 내에서 남성 가부장제 시스템을 지속하는데 중추가 되는 ‘명예 남성’ 캐릭터의 여성 가장은 어렵지 않게 목격되는 단면이다. 적극적으로 기득권 체제에 영합하는 존재라면 마음 편히 비난할 수 있지만, 개인의 의도는 선량하거나 어쩌다 보니 상황 논리에 처해 변화해가는 경우에는 참 복잡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찾아보면 그런 비극의 주인공은 우리 주변에 의외로 흔하다. 일부는 그런 ‘전락’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채 환경결정론의 예시가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선’을 넘지 않고 비록 한계는 있어도 대물림의 악순환을 끊거나 개선하려 도전한다. <버티는 밤>은 그런 위기에 처한 주인공을 소개하려는 기획이다.
◆ 평생 일궈온 세계가 무너질 위기에 처한 ‘연자’
‘연자’는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기까지 40여 년 넘게 본인 명의로 된 ‘사업자 등록’으로 가족 살림을 책임져 왔다. 평생의 반려였던 남편 ‘창섭’은 중환자실에서 투병 중이다. 깡마른 채 호흡기에 의지한 남편이 회생할 가망성은 그리 없어 보인다. ‘연자’는 남편이 입원한 종합병원을 드나들며 남편을 뒷바라지하느라 자기 몸을 돌볼 새가 없다. 그는 거친 입담으로 병원의 무관심과 몰이해를 카메라 앞에서 성토하는 중이다. 남편의 병세는 차도는커녕 오늘내일 다투는 중인데 다른 방도가 없는 현실 앞에서 ‘연자’의 평정심은 사라진지 오래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연자’의 심기는 썩 좋지 않아 보인다. 가족들은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면서 ‘연자’가 그렇게 좌절하고 상심하게 된 배경에 대한 해설을 덧붙이기 시작한다. 최선을 다해 지난 반세기 가까운 시간 내내 가족을 책임져 왔지만 이제 자손들이 장성해 독립하면서 그전에는 자신이 꼼꼼하고 배려심 깊게 챙겨왔던 것들을 불편해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나’의 꿈과 욕망을 포기한 대신, 자신이 속하게 된 가족 공동체 안에서 요구된 역할에 충실했건만 이제는 자신의 그런 노고가 외면당하는 데에서 초래된 상실감이 쌓여왔다는 것이다.
반려자를 잃고 충격이 적지 않던 ‘연자’에게 두 번째 해일이 휘몰아친다. 그는 슬픈 가운데에도 미리 준비해둔 장례절차에 따라 착착 일정을 진행한다. 수십 년 동안 이 집안의 대소사는 다 그렇게 처리되어왔을 테다. 가족이 장기간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가 임종을 맞는다면 병원비 대금 처리도 큰 부담이지만 ‘연자’에겐 다 계획이 있었다. 장례식 등 상조 처리도 차질없이 치렀다. 절에 유해를 모시고 화장절차까지 일사천리다. 하지만 가족이 방문한 절에선 ‘연자’의 기대처럼 깔끔한 업무처리가 이뤄지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가족들은 고인의 유해를 성의 없게 관리하는 절에 항의도 하고 대책을 모색하지만, 정작 선봉이 되어야 할 ‘연자’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허탈해한다.
가족들은 그런 ‘연자’를 위로하고 상황을 파악하며 내용을 공유하지만, ‘연자’는 나사가 몇 개쯤 빠진 것 마냥,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무기력할 뿐이다. 할아버지를 떠나보낸 충격에도 불구하고 이 가족의 중대사는 도맡았던 해결사답게 모든 과정을 준비했건만,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어닥친 난관에 그만 좌초되고 만 것이다. ‘인지부조화’ 상태처럼 그는 예정과 다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표류한다. 자신이 쌓아 올리고 책임져온 세계가 붕괴 상태에 처한 앞에서 ‘연자’가 아닌 누구라도 보일법한 상황이다.
◆ 할머니의 연착륙과 이를 돕는 가족들의 풍경
‘연자’로선 억울한 것을 넘어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이 터진 셈이다. 그는 한평생을 바쳐 이 가족을 책임져 왔다. 고인이 된 남편이 있지만, 영화 속에서 묘사되듯 본인 명의로 사업자 등록을 하고 가업을 진두지휘했을 정도라면 그가 얼마나 억척스럽게 살아왔는지 능히 짐작할 만하다. 그런 그의 수고 덕분에 성장한 자녀들이 각각 자리를 잡고 손자 손녀가 주렁주렁 자라났다. 이제 ‘연자’의 역할은 한 단락을 마무리한 것이다. 위기는 아마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을 테다. 자신을 버린 채 가족 공동체를 건사하기 위한 톱니바퀴로 기능적 캐릭터가 되기를 스스로 받아들인 그에게 이제는 그 엔진 역할을 그만둬도 된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오랫동안 고생한 그가 이제 좀 편히 쉬라는 의도였겠지만, ‘연자’에겐 ‘존재’를 부정당하는 순간과 다를 바 없다. 자신의 기호가 아니라 유무형의 압력을 수용한 것뿐인데, 이제는 그 주도권마저 상실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연자’는 남편의 존재가 있음에도 40여 년 동안 사실상 ‘가장’의 책임을 짊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에 충실했고, 그 성과는 영화에서 드러나듯 큰 탈 없이 성장한 2세와 3세 자녀들의 존재로 증명된다. 한국 현대사에서 무수히 많은 여성이 감당해온 숙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그에겐 공로상과 감사패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보상이 그들 스스로 혹은 강압으로 의해 포기하고 만 꿈과 시간을 메워줄 수 있을까? 게다가 이미 과거의 꿈 많던 시절은 잊어버린 채 ‘기계’처럼 자신의 역할을 가족의 유지와 건사에 바치는 것으로 변형된 이들에겐 이제 그 역할을 내려놓으란 것 역시 수용하기 힘든 경우다.
대개 (드라마나 미디어에서 상투적으로 다루듯) 적지 않은 경우, 이렇게 피해자 유형에 가까웠던 당사자들은 형질 개조로 인해 ‘명예 남성’ 화가 이뤄지기 일쑤다. 자신들을 희생시켜 영속해온 남성 가부장제를 지속하고 계승하기 위해 ‘딸’이나 ‘며느리’에게 대를 물려 희생하고 체념하기를 종용하는 캐릭터로 말이다. 전형적인 ‘가해자가 된 피해자’ 모델이다. 한국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연자’ 역시 그렇게 될 위기를 숱하게 거쳐왔을 테다. 하지만 시련을 겪었으되, 다행히 그는 그런 추락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 비법은 무엇일까?
‘연자’는 도구적 역할을 가족 내에서 너무나 완벽하고 충실하게 수행해 왔다. 그 과정에서 (영화에선 구체적으로 적시되진 않지만) ‘나를 따르라!’ 식의 결정과 집행도 분명히 존재했을 테다. 그 과정에서 다행히 엄청난 부를 이루거나 선을 넘는 과잉으로 치닫지 않았기에, 무엇보다도 자신을 희생해가며 수고한 목적에 충실하게 살았음을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공감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경우다. 지난 수십 년간 그의 노고를 기억하는 가족들은 이제 ‘철의 여인’이던 엄마 & 할머니가 늙고 쇠약해졌다고 해서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다들 어떻게든 그에게 닥친 불행을 함께 슬퍼하고 격려해 평생 (우주를 떠받치는 형벌에 신음하는 아틀라스 거인처럼) 짊어지고 있던 수고를 ‘연착륙’하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 결과는 평생직장 은퇴하는 게 어려워진 요즘 세태에서 보기 드문 흐뭇한 광경으로 마무리된다.
◆ 지역에서 보기 드문 다큐멘터리 신작에 거는 기대
감독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봐왔던 할머니의 위기를 사랑받고 자란 손녀의 위치에서 포착하고 기록한다. 추정이지만 그동안 봐왔던 강하고 자상한 할머니가 아니라 흔들리고 난처해하는 황혼에 접어든 여성 ‘연자’를 발견했기 때문일 테다. 단편의 호흡과 처음부터 주도면밀하게 계획하에 출발한 작업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관객은 ‘연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남에게 말하지 못한 구구절절한 사연을 본인의 언어로 듣는 부분에선 아쉬움을 남길 수밖에 없을 법하다. 하지만 그런 주인공이 장구한 시간 동안 헌신하고 봉사해온 덕분에 우호적인 유대감을 공유하는 가족 성원들의 인터뷰를 통해 일종의 ‘논평’을 접하는 건 색다른 재미이기도 하다. ‘연자’의 인생에 대한 평가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메스로 폐부를 헤집지 않으면서 관객 각자가 접해봤을 조부모 세대에 대한 기억을 환기하는 장치로 꽤 실용적으로 활용된다.
근래 한국독립영화 주요 창작그룹이 된 20ㆍ30대 세대들의 작업에서 목격되는 경향성과 <버티는 밤>의 시야는 상당 부분 호환된다. 이 세대는 부모세대와 아옹다옹 다투는 건 물론 기성세대가 모든 걸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 시스템 아래 질식될 것처럼 고통당하기 일쑤다. 부모세대가 시스템을 장악하고 좌지우지하면서 자신들의 방식에 길들어질 것을 무언의 강요로 종용한다는 게 취업절벽부터 뭐든 뜻을 펼치는데 역부족을 절감하는 청년세대에게 팽배해 있는 게 현실의 일면일 테다. 또 가족 내에서도 간섭 대신 자유를 누리고 싶지만, 독립하기엔 사회경제적 자립 여건이 턱없이 모자란 실정에 어쩔 수 없이 불편한 동거를 성인이 된 후에도 이어가는 상황 역시 스트레스로 쌓여간다. 그러다 보니 부모세대 중 어머니와는 다투면서도 이해하거나, 아버지와는 거리를 두거나 심지어 증오하는 경우가 영화 속에서도 정형화되는 편이다.
반면에 조부모 세대는 그 세대의 자녀인 부모세대와는 좀 경우가 다르다. 바쁜 부모 대신에 어릴 적 돌봄을 책임지는 경우도 허다하고, 부모가 야단을 치면 방패가 되어주는 경험을 가진 청년세대들에겐 조부모 세대, 특히 할머니는 ‘내 편’이자 ‘피난처’가 되어주기도 한다. 이 경우 조부모 세대의 등장 혹은 추억은 일종의 ‘노스텔지아’로 기능하는 셈이다. 그런 향수를 가진 이들에겐 더없이 우호적이거나 소중한 존재로,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이들과의 이별에 대한 회한과 상실감으로 묘사되곤 한다. 반면에 어릴 적부터 접촉 경험이 희소한 경우에는 친척도 남남이라는 말처럼 별달리 기억에 중요하게 남지 않기에 배경으로만 소급되는 데 그친다. <버티는 밤>은 우호적인 정서가 전제되는 작품 라인에 속할 테다.
하지만 그저 그런 경향의 일부라 하기엔 이 영화에서 도드라지는 미덕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연자’의 쇠락한 모습이 주로 담기는 데다 자기 입장을 공개할 기회가 많지 않은 주인공이지만, (손녀인) 감독과의 짧은 대화에서 그의 지난할 수밖에 없었을 삶과 그 과정에서 묵은 상처를 효과적으로 상상하게 해주는 인상적인 장면이 그렇다. 혼자 잠들기 무서워 대문을 걸어 잠근 채 불을 끄지 않아야 잠들 수 있다는 할머니의 고백은 그가 겪어온 시련과 고뇌를 구구절절한 인생역정 해설보다 더 효과적으로 압축해낸다. 감독에겐 그야말로 ‘제대로 걸린’ 장면일 것이다.
<버티는 밤>의 의의는 이것만이 아니다. 사전에 오랜 기간 각본을 집필하고 프리-프로덕션 단계를 거쳐 현실을 재현하는 극영화에 비해, 물론 상당한 사전준비를 거치는 건 똑같은 데도 모든 게 계획대로 될 수 없는 다큐멘터리의 묘미가 방금 언급한 얻어걸린 장면으로 증명된다. 하지만 영화의 기원부터 주요한 장르로 자리매김한 해당 분야인데도 지역에선 기이할 만큼 다큐멘터리 작업이 상대적으로 희소한 게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등장한 다큐멘터리 신작이란 점에서 <버티는 밤>이 어쩔 수 없이 노출하는 투박함이나 일부 한계는 기대감에 비하면 흘려보내도 좋은 수준이다. 극영화 작업을 해오던 감독이 우연한 기회에 도전한 작업이 일정한 성과를 도출하는 상황에서 더 많은 도전이 이뤄지길 기원해보며.
<작품정보>
버티는 밤
2023|한국|다큐멘터리|22분
감독 이다운
출연 홍연자, 정미애, 정선애, 이아름, 이다운, 故 정창섭
촬영 이다운, 이아름
편집 이다운
색보정 전상진(컬러플러스)
2023 대구영상미디어센터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워크숍 수료작
2023 대구시민미디어페스티벌
2024 2회 반짝다큐페스티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