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왕 노릇 하기 힘든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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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 기간 중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라고 말했던 발언이 여러 이유로 소환되고 있다. 대통령이 가진 권력을 감안하면, 이 발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처했던 상황과 권력 행사에 대한 자기 비판적 고민을 담은 내용으로 읽힌다. 당시 이 말이 나온 상황을 분석해 보면, 다양한 사회적 요구를 듣고 조정하는 자리에서,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행태를 감당하기 힘들어서 한 말이었다.

하긴 최고 권력자라고 해서 권력의 행사가 쉽기만 할까? 특히 국민의 선택을 받아 특정 기간 이양받은 권력만 행사해야 하는 현재 우리 권력자에게는 이는 더더욱 어려운 문제일 수 있다. 그렇다면 왕권 국가에서 최고 권력을 가졌던 왕이라고 해서 지금 대통령보다 권력자 노릇 하기가 쉬웠을까? 1811년 음력 1월 20일, 왕 위에 오른 지 10여 년 된 순조에게 대신들은 참으로 어려운 대상이었다. 이제 막 20세가 넘은 어린 왕이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아래에서 자기 권력을 행사한다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당시 무관으로 근무했던 노상추가 쓴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순조의 할머니 혜경궁 홍씨가 병으로 몸져누웠다고 했다. 정치적으로야 어떻든, 궁의 가장 큰 어른의 병환인지라 순조의 걱정은 컸다. 그런데 조정 신하라면 왕의 걱정을 반영하여 혜경궁의 문후를 여쭙는 게 예의였다. 그런데 당시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대신들의 문후가 없었다. 젊은 순조 입장에서는 여간 서운한 게 아니었다. 결국 사관을 통해 자신의 섭섭한 마음을 담은 전교를 내린 이유였다.

“내가 대신들을 공경하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대신들의 도리로 볼 때 어찌 이처럼-혜경궁에게 문후를 여쭙지 않음-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전교의 문투는 정중했지만, 왕의 서운함을 드러내기에는 충분했다. 젊디젊은 왕으로서 노회한 대신들을 충분히 존중하고 공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경궁에 대한 그들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비판이었다. 그러면서 병 중일 때에는 환후가 어떠한지 물어야 하고, 환후가 다 낳았다면 회복을 축하해야 한다고 권했다. 오늘 당장 이 청을 시행해 달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전교 내용만 보면 조정의 신하들은 당장이라도 혜경궁 홍씨의 처소로 달려가야 했다. 그러나 당시 대신들의 생각은 달랐다. 여기에는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이 내재해 있어서 그 이유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들의 선택은 단호했다. 그들은 보란 듯 하나둘 궁궐을 떠났고, 대부분은 아예 도성 밖으로 나가 버렸다. 사직하고 낙향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관료들의 집단 사직이 조선 시대의 경우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정치적 이유로 항명성 사직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조선의 신하들은 유교 이념에 따라 출처出處를 판단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강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왕이 왕도정치를 실현하면 조정에 나아가(出) 함께 왕도정치를 행하되, 왕의 정치가 유학적 이념에서 벗어났다고 판단되면 물러나(處) 자기 수양을 해야 하는 것이 유학자들의 올바른 자세였다. 이 같은 유학의 출처관은 그래서 정치적으로 활용 또는 악용되었다.

혜경궁에게 문후를 여쭈라는 전교가 출처를 고민해야 할 정도 사안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적어도 이들이 궁궐을 비운 명분은 그랬다. 왕의 처사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념과 배치되었고, 그래서 이들은 물러나 개인 수양에 매진하겠다는 명분을 던졌다. 왕권이 강력했던 왕이라면 정치적으로 이를 활용한 이들을 대상으로 과감한 처결도 했을 테지만, 당시 순조에게 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순조는 여러 차례 좋은 말로 대신들을 타일렀지만, 대신들은 오히려 “군주를 서운하게 했으니, 죄가 큽니다”라면서 자신들의 서운함을 드러냈다.

순조의 완전한 패배였다. 그는 결국 “어가를 갖추어 내가 직접 (대신들을)맞이해 오겠다”라는 하교를 내렸고, 그제야 대신들은 하나둘 도성으로 돌아왔다. 이 와중에 순조는 공식적으로 지난번 대신들을 섭섭하게 했던 전교를 거두어야 했다. 안 그래도 유교적 이념에 따라 다스리지 않으면 왕명의 권위가 무시되기 일쑤였던 조선이었는데, 순조는 특정 가문에 권력을 이양까지 해 놓은 상태였으니, 그의 명이 권위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참으로 왕 노릇 하기 쉽지 않은 나라였다.

조선은 유학을 국시國是로 설립된 나라였다. 권력은 세습을 통해 전해지지만, 권위는 유학의 수양을 통해 완성된 인격이라고 인정된 사람에게 주어졌다. 따라서 권력이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왕 스스로 유학적 이념에 따라 통치하던지, 그렇지 않으면 유학적 이념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야 했다. 이 때문에 권력은 늘 권위의 감시 속에 있었고, 권위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권력은 비도덕적인 권력으로 평가 또는 심판을 받았다. 권력이 권위까지 갖는 게 힘든 사회였다.

그러나 조선의 이러한 선택은 역으로, 단일 왕조가 500년 이상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권력도 권위의 비판 앞에 서 있었고, 정당한 권력이 되기 위해서는 이념이 만든 권위에 복종해야 했기 때문이다. 왕 노릇 하기 힘들 정도로 권위를 가진 권력이 되기 힘든 사회였고, 그 사이에서 건전한 비판이 살아 숨 쉴 수 있었다. 조선은 이러한 장치는 세도 정치로 인해 무너지면서, 급격한 쇠락을 경험해야 했다. 현재 우리의 권력 역시 ‘민주적’이라는 권위 위에 있을 때만 올바르며, 그럴수록 ‘대통령 노릇하기 힘든 사회’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