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 칼럼] ‘서류상’ 공약과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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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야당의 압승으로 끝이 났다. 선거기간 동안 각 정당과 국회의원 후보자들은 저마다의 공약을 앞세워 국민의 선택을 받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렇게 선거는 끝났고, 선심성 공약이든, 국민을 갈라놓으려는 공약이든 내뱉어진 말들은 모두 정치인들의 부담이 되어 어깨를 무겁게 할 것이다.

이번 선거기간 나타난 특징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정권심판론’이다. 현 정권의 소통 부재와 국정운영 미숙 문제가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특히 심판은 보수의 텃밭으로 불리는 동쪽 지역을 제외하고,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나머지 거의 모든 지역에서 주효했다. 민생이 어려운데 무슨 편 가르기며, 색깔론을 따지고 있는지, 국민들은 냉정했다. 당장의 민생고 앞에선 이념도, 진영도 무의미하다는 진리를 곱씹는 순간이다.

제22대 국회를 앞둔 시점에서 각 정당들이 내세운 공약에는 이 같은 문제의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각 정당이 발표한 10대 공약에는 국민의 어려운 점을 해소하겠다는 공약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국민을 더 행복하게, 더 건강하게 만들겠다는 삶의 질을 높이는 공약은 상당히 축소되어 있다. 이를테면 국민의 건강과 관련된 공약에 치료라는 ‘소극적’ 측면에서의 의료와 보건 문제에 비해, 예방과 증진 측면에서의 ‘적극적’ 공약은 부족한 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심각한 기후 위기와 관련한 공약들을 살펴보면, 뭔가 답답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대부분의 정당은 환경문제를 공약의 큰 카테고리에 포함하고, 각자의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지만, 총체적인 관점에서 국가적 환경정책을 제시하고 있을 뿐, 실생활에 와닿는 구체적인 실천과제는 여전히 미흡해 보인다. 정치나 행정에서 총론은 있는데, 각론의 구성이 활발하지 못한 이유가 대개 총론 자체가 아직 표류하는 경우라는 점을 미루어보면 아직 실천 의지는 크지 않다는 점을 방증한다.

이런 가운데 오는 7월 개막하는 2024 하계파리올림픽을 대하는 프랑스인들의 태도는 환경정책이 온갖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우리와는 사뭇 달라 보인다. 이들이 올림픽을 대하는 방식은 ‘지속가능성’을 바탕으로 “최대한 덜 짓는 방식”을 선호하고, 이로써 환경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대회 중 먹거리까지도 식물성 제품과 지역 농산물을 조달하고, 플라스틱 사용을 절감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더해 ‘대회를 위한 기후 코치(Climate coach for events)’를 개발하여, 대회를 준비하는 관계자들이 각자의 탄소발자국을 확인하고, 맞춤형 탄소배출 절감 방법을 제공 받아 실천력을 획기적으로 높이도록 했다.

프랑스가 과거와 같은 개발 일변도의 올림픽 손님맞이를 지양하고, 환경적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목표로 정책을 추진하는 이유는 올림픽이라는 큰 행사를 맞아 기후 위기에 대한 사회적인 공감대와 더불어 정부가 실천가능한 방식으로 지원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친환경적인 생활 태도를 올림픽 유산을 남기고자 하는 의지 덕분이다. 얼마 전 한국 사회가 올림픽을 개발특수로 이해하고, 짓지 않아도 될 경기장을 최대한 짓고, 분산개최도 거부했던 부끄러운 방식과는 크게 대비된다. 뿐만 아니라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적극적’ 정책이 어떻게 국민들의 생활 속으로 파고드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번 선거를 통해 정치권은 급한 불을 끄고자 당면한 시급한 과제들을 우선 공약들로 제시하고, 국민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발로 뛰었다. 하지만 또 다시 ‘서류상’으로만 남아있을 그 정책들을 알뜰히 기억해내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또 ‘지연된’ 환경 정의는 후대에 큰 빚으로 남을 것이 확실하다. 파리 올림픽이 남기고자 하는 그들만의 올림픽 유산은 지속가능성이었다. 프랑스의 국민들은 스스로 지속가능한 스포츠와 환경,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소중한 경험을 유산으로 남기고, 그렇게 또 한걸음 나아갈 것이다. 정책은 이렇게 자발적인 실천을 담보로 만들어져야 하고, 공동의 목표를 내세우면서 무르익을 수 있다. 늘 공염불이 되는 ‘서류상 정책과 공약’은 진정성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