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속, 돌고래의 속삭임 같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린다. 똑똑 떨어지는 수액 소리, 부산히 움직이는 주변 사람들의 소리가 뒤섞여 들려도 이차연(77) 할머니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만 있다.

무거운 눈꺼풀을 스르륵 뜬다. 앞에는 큰 손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할머니를 들여다보고 있다.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다. 힘겹게 입을 뗐다. “야, 니 와 학교 안 가고 와 여기 와가 있는데.” 큰 손자는 화색이 돌았다. “아이고 어무이, 할무니 깨어났으요. 내가 할무니 지킨다고 학교도 못 가고 지켰으요. 헐머니 사고 났다 캐서 전화받고 오니까 할머니는 응급실 한쪽 구석에 처박아 놓고 할머니는 깨어나지도 않았는데 사람도 아무도 없고․․․”라며 고함친다.

눈을 뜨자 보이는 영문 모를 풍경에 할머니는 기억을 되짚어보지만 최근 며칠 사이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누워있는 곳은 청도 대남병원 일반병동. 묵직한 철근이 짓누르는 것 같이 머리만 아프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할머니는 어느 정도 정신을 추슬렀다.

그러던 차, 한전 직원이 병문안을 목적으로 할머니를 찾아왔다. 옆에 앉아 있는 아들과 한전 직원을 번갈아 본다. 잠시 뒤, 흐릿했던 기억의 조각이 엉성하게 맞춰졌다. 할머니는 한전 직원의 멱살을 잡고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으나 말조차 하기 어려운 상태다.

2012년 8월에 있었던 일이다. 훗날, 이차연 할머니는 입원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거기가 청도 대남병원이었어. 몸 전체가 머리에 마 어데 들이받았는가 온 데가 시커머이 골병이 들어가지고․․․그래 내 다 이자뿠는데 생각을 가마이 해 보니 용역들이 우리를 마 영 지깄는기라. 내가 제일 들머리(가장자리)에 있으이 (용역들이) 날로 젤 머이 끄이 내랐는데, 말도 몬 하게 험한 길로 나를 이리 끌고 내려오니까 마 온 만신이 받치고 찢기고 마 이래가지고 내 완전 사람이 뭐 기절했어”

그렇게 과거를 회상하는 할머니의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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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딴 사람들처럼 날 새도록 누워 자질 못했습니다

부산에서 저는 장사 했심니다. 결혼 전에는 뭐 짜다리 일 안 했심다. 어릴 적에 학교나 조금 다니고 했지. 낙민동(동래구)에 살았는데 집에 어른들도 있고 할아버지 할무니 다 있고, 집이 농사를 지었지. 집에 논도 있고. 결혼 전에는 집에서 하는 일이나 거들어주고 했는데 스물두 살에 결혼하고부터는 중앙동(중구)에서 생선장사 했심니다. 지금은 송도에 있지만은 그때는 어시장이 중앙동에 있어가 그 시장에서 장사 했심니더.

생선장사 할 때는 아들도 쪼맨할 때고 우리 집 양반은 건강이 많이 안 좋아가 3~4개월 폐암 판정 받았심니다. 아들하고 살기가 힘들어서․․․ 벌이 묵고 산다고, 알라들 하루 종일 등드리에 업고 댕기면서 그래가지고 물건 해다가 팔았지. 새벽에 날 새고 어시장에 배 들어오면 경매 봐가지고 그걸 팔았지요. 그때 마 성격도 억척스럽게 됐지요. 그래 살다가 영감이 건강이 너무 안 좋아서 일로 이사를 왔심다.

우리 살았는거 고생은 거 뭐 말로써 다 몬 하지. 그래 억척스럽게 살다가 영감이 아파서 병원에 가니까네 영감이 뭐 얼마 몬 산다 카는데. 폐암으로. 시내는 우째 살아도 남의 일에 상관을 안 하고 모르잖아요. 여기 촌(삼평리)에는 오니까 더군다나 남편 병들었제, 넘 들은 같이 병 오른다고 앉을 처지도 못됐지요. 그거는 말로써 할 수가 없지예. 그거는. 병든 남편 죽는다고, 모두 얼마 안 있으면 초상 치겠다 캐 샀제.

나는 딴 사람들처럼 날 새도록 누워 자질 못 했습니다. 이 골짝에 오고 한참 살 때, 지금은 그래 안 하지만은, 첨에 와가. 아침에 밤에 일나가지고 밥 해묵고 날만 새면 들로 산으로 뭐 오만 거 해가 팔고, 산에 구름에 안개가 꽉 끼가 올라가도 사람이 되게 급하다 보니 날 잡아무라 하면서 그냥 올라갔다고. 넘 일어나기 전에 고사리 같은 거 끊어가지고 팔고 자슥들 공납금도 주고 공부시키고 할라꼬 남편 약값하고 할라꼬 딴 사람 나오기 전에 산에 날만 새면 그 낯선 데서․․․ 시내서 살다가 여기서 고생한 거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지요. 그 정도로 해가지고 살아온 냅니다.

그래도 자식 복은 있었지요. 우리 큰아들이 공무원 시험 쳐가 붙었다 카이 얼마나 좋던지. “아이고 이 자슥아~ 우리도 이런 날도 있네” 내가, 그래 키웠다고. 아들은 “어무이 신경 쓰지 마소, 내가 어떻게 해도 살 수 있겠금 하겠심다 내 열심히 하지요” 그래 샀더만, 그래 해가지고 진급도 했시오. 내는 집 지아가지고 소 미기가면서 그래 우리 손자 둘이도 내 등드리서 업고 댕기며 업고 모도 숭갔슴다. 지금은 기계도 있지만은 그때는 손주 업고 이래 손으로 모를 숭갔습니다.

뭐 표를 안 내도, 내 서러워서 마이 울었지요. 타향 생활도 쉬운 게 아닌데 남편 병들어가 남사시러워서 어데 가서 말도 몬 하고 그렇게 살았다고. 그래도 억척스럽게 살다 보니까 내가 돈 벌어가지고 땅 사가 집 짓고 살고 또 아들이 직장생활 하고 이래저래 하니까 자연적으로 여기 사람들과 그래 친해지더라고. 그때는 아무것도 뭐 없는 기 어디 객지에서 돌아 댕기다가 어데 못살아가지고 왔는 갑다, 이런 말은 안 해도 그런 심정이었겠지만, 내가 벌어가지고 내가 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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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요, 마음의 준비 하이소

여기(삼평리) 와서는 소값 한 참 좋을 적에 재미가 있었으요. 마이 벌었지. 그건 좋았는데 그 와중에 영감이 갔어. 암은 완전 나샀는데 뇌출혈로. 영감은 각북면 경로당에 회장을 했지. 나는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일로 엄청 했는데, 우리 영감은 아파가 숨이 가쁘고 그럴 처지가 못 됐지. 그래가 살았는데. 그래 하루 경로당서 놀다가 저녁에 오디만, 그때 양파 심을 철이다, 오디만 그래 저녁을 잡수코 나디만 “오늘 저녁에는 왜 이래 피곤하고 그 좀 누워야 되겠다”면서 여 누워가지고는 가만히 눈을 감고 “와 이래 어지럽노”카드라고.

내가 “그러면 눈을 콱 감고 뜨지 마소” 이카이 “눈 감아도 머리가 빙빙 돈다” 카는기라. 그래서 이거 큰일 났다 싶어가지고 우리 큰아들한테 전화를 했다꼬. 아부지가 자꾸 어지릅다 눈 감아도 어지럽단다, 병원에 가야 안 되겠나 카이 금방 차를 몰고 오더라고. 오가 아부지 좀 일어나이소 그르이 몬 일나더라고. 그새 몬 일어나드라고. 그래서 일바씨가지고(부축해서) 아들이 엎고 저저 청도 대남병원으로 가이 이 어른이 머리가 아무래도 큰 뭐 뇌출혈이 온 것 같다고, 대구로 가라 카드라고. 대구 병원 가니 사람이 오가 “어른요 마음의 준비 하이소. 아무래도 마 안 될 거 같심다” 카데.

처음에 그날은 말은 하데요. 우리 집에서 소를 키우니까, 집에 가서 저저 짚 사논 거 비가 온다 카는 병원 방송보고 짚 좀 덮어 돌라꼬 부탁하고 오라는 기라. 영감이. 그래서 내가 아이고 안 가도 된다고, 그거 짚 썩어도 된다고 안 가고 여 있을 기다 안 간다니까네, 기어이 집에 갔다 오라고, 자기 안 죽는다고 갔다 오라 카는 기라. 그래서 참 바쁘게 갔다가 다시 왔지. 병원 문 앞에 드가이 방송 하는 기라. 나를 찾는 기라. 마마마 그래서 쫓아 가니까네 그 길로 가뿌리는 기라. 그래가고 내 혼자 소 미깄지.

그래 저 건너 이층집에 아들이 살다가, 와 요전에 왜 소 병이 안 왔습니까. 광우병. 우리 아들이 소를 그때 한 2백 마리, 키웠는데 광우병이 와가지고 소를 다 없앴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작은 손자가 마 백혈병이 걸렸어요. 서울 병원에 꼭 만 2년을 입원을 했시오. 외국사람 피도 사 넣고 오만 할 거 다해도 뭐 아를 결국 보내 뿌리고 나니까 우리 아들이, 아들은 아들이고 며느리가 그 집에 안 살라 캐. 그 방에 드가기 싫다 캐.

내가 이 집을 나놓고 어데로 갑니까?

그래 아를 보내고 나이. 소 병도 왔지. 이래저래 할 수 없이 그 집을 경매에 안 넣었는교. 그런데 저놈의 철탑 때문에 집이 팔리야 말이지. 그래 좋은 집을 경매에 넘기니 일차 돼도 철탑 때문에 모두 둘러보고 안 한다 그러고. 이차로 인자 넘어갔는데 뭐 아주 뭐 막대한 손해를 봤지 뭐. 재작년에 넘어갔어. 사월 달에. 그래가지고 참 뭐 어려움이 뭐 말도 못했지. 저 철탑 때문에 옳은 값도 몬 받고 큰 손해를 보고 집이 저게 경매에 넘어가고 나이, 내 밤에 잠이 안 옵디다, 억울해서. 그러고 아들한테 나는 이제 소 안 키울란다, 힘이 없어 못 하겠다 했시오. 그러이 아들은 “어무이 마음대로 하이소” 카더라. 그래가 내 소를 판지가 인자 사 년이라.

내 이 작은 집이라도 우리 막내를 줘야겠다고 마음을 묵고 사는데, 아 저 철탑이 들어온다고 지랄지랄을 하니까 우리 큰아들이 “어무이 저 철탑이 저 걸리게 되면 여 몬 삽니다. 여 살 수가 없습니다. 저기서 눈에 안 보이는 전파가 나와서 여 사람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머니가 철탑이 걸리게 되면 함부로 살려 하지 말고 이 집을 비아 놓고 어무이 부산 동생들 옆으로 셋방이라도 얻어 가지고 가야 됩니데이”라고 하더라고.

그럼 내가 이 집을 놔놓고 어데로 갑니까 지금? 이 집을 놔놓고. 응? 그러니까 우리가 저 철탑을 말리고 있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그 전깃줄이 위에 걸리믄 우리는 여 살 수가 없는데, 지중화를 해주모 우리 이 집에서 살 거 아닌교. 우리 막내도 왔다 갔다 하면서 살 거 아닌교.

그래가 속이 상해서 내 잠 못 자고. 밤에도 내 이래 앉아가 있으니 속에 천불이 나가 잠을 못 자지. 이런 거 저런 거 생각을 하며 내 방에 앉아 있으이 목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밤에 이래가 날도 새우고 우째가 한 십 분 콱 자고 나면 또 눈뜨면 눈이 안 감기. 우리 둘째 사위가 어째 듣고 이걸(소파) 사왔어. 여 앉아 있으라고. 보약도 지주고.

한전 놈들이 나를 요로콤 골병을 들게 하이. 지금 우리 자식들하고 사위하고는 만약에 앞으로 무슨 일이 있다카믄은 한전 놈들 가만히 안 두겠다고. 내보고 (송전탑 공사방해로 부과되는) 벌금도 다 내드리지요 카고 그랍니다. 몸만 성하믄 그래도 덜합니다. 내 이렇게 상처내가지고 내 이렇게 빙신 만들어 놓고 내가 안 죽을, 목에 숨이 붙어 있는 다음에는 한전 놈들이 저 내 싸우는데 내 안 가겠습니까. 내 정말로 내 마마 진짜 말 다 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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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십 원짜리 하나 필요없다

송전탑 공사 하면서 마을이 갈맀어요. 찬성하는 쪽은 한전에서 뭐 어떻게 포섭을 했는가 그거는 우리 눈으로 안 봤으이 모르고 이유가 있겠지요.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요. 한마음으로 했으면 저거 저거(북경남 송전선로 1분기 22, 24호 송전탑) 못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다 같이 한마음으로 하자고 의논했더니 참 뭐 한전에서 어떻게 했는지 동 이장(이장)부터 사람이 끌리나가 죽어도(기절해도) 못 본체하고 보게트(주머니)에 손 여가 딱 서가 쳐다보고 있고 그런 행사를 하더라고요. 너무 분하고 말 못하게 억울합디다. 정말 뭐 섭섭한 말은 다 할 수가 없지요. 지금도 마을 회관에 모이기만 하믄, 아래께도 노인회 총회 했는데 또 싸웠심니다.

뭐 다 늙어가 찌그러져도 내 솔직히 하는 말로 이 동네 있는 사람들 돈 없는 사람들 없심니다. 그런데 (선하지 보상으로) 돈 그거 뭐 몇백 준다고 우리 손 들 줄 알고. 그거는 말이 안 되고. 이른 집 지아가지고 살라고 해놓고 우리 그거 받고 물러 앉겠십니까. 보상은 문제가 아니라요. 지중화만 해주만 마 지금이라도 우리는 손 놓는다. 돈 십 원짜리 하나 필요 없다. 우리는 돈 싫다. 그래 돈 받고 할 거 같으면 진작 손들었지.

그때 우리 저저 우리 거 있는 사람들 저 지원금 마을에 1억 7천 준다카고 우리 그 있는 사람들 손 들라꼬 1억을 더 준다 했거든. 경찰에서 사람들하고 전부 다 합의 시키려고 회관에 모았거든. 모아 놓으니까 박재근(현 마을 이장) “할매들은 뭐를 원합니까” 그래. 한전이 시킨 거지. 내가 “우리는 다른 그는 엄꼬 우리 때꺼정 고생한 게 억울해서 뭐 지원금이 1억 7천이믄 우리 2억 7천이 나오믄은 1억은 우리를 주권으로 주이소”라고 하니 대번 첫 말에 못 준답니다. 돈 십 원도 일없더랍니다. 우리도 그 길로 박차고 나왔어요.

그래가 지금까지 왔지. 어떻게 이까지 온 지 모르겠어. 법원에 서서 소리도 치보고. 마 죄지은 게 없는데 판사 겁도 안 난다. 벌금 날라 오는 거도 겁 안 난다. 즈그는 법이 있고, 우리는 법도 없고. 우리는 그런 상처를 받아도 즈그가 진료비를 하나 줬나, 사람이라 하믄 사람을 그렇게 상처를 입히 놓고 우리가 고발로 했는데도 판결(2012년 23호기 공사 당시 이차연 할머니가 한전 직원 등 2명을 폭행 혐의로 고소한 것)을 지금까지 안 했습니다. 나는 큰 상처를 받아가지고 지금까지도 보다시피 이노무 약을 이렇게 갖다놓고 그라고 또 내 주사 맞으러 갑니다. 내 몸 자체로 보이소, 앉아가 보믄은 내 성한데 없습니다. 지금 내 몸 전체가 몬 죽어서 참 뭐 그 내 댕기지 사실은 내려가는 것도 힘듭니다.

그리고 송전탑 보믄 속이 디비지요. 저거 마 어데 큰비가 오가 화딱 나자빠졌으면 싶지. 막막 폭우가 와가 다 나자빠졌으면 싶은 마음이 들지. 도시 사람이 필요하다고 촌사람을 이렇게 직이가 되는가. 도시에는 도시에 저거 사용하도록 장치를 해가 쓰믄 되지.

요즘 들어가 너무 기억을 못 해요. 방금 한 걸 까먹고 있다가 냄비고 뭐시고 태워가 많이 내삐맀다. 요즘은 정신과 가도 뭐 영양제나 주고 하니 되나. 정신과 가도 진단명도 모르겠다. 첫날은 테스트를하더라고요. 의사가 보호자 좀 모시고 오이소 캐서 깜짝 놀랐지. “에이, 그 정도는 아니고예 내가 지금 신경을 너무 많이 쓰고 있으니까 그렇지요”했는데 보나(대책위 상황실장)가 소식을 듣고 은주(전 부녀회장) 씨한테 말 한 거라. 은주 씨가 동행을 할라 캐서 떼 놓는다고 애먹었다. 그 뒤로 약은 달고 살지.

공사하러 또 곧 올 수도 있겠지. 들어오면 뭐 목숨 걸어놓고 싸워야지. 기계 들어오면 기계 밑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지. 즈그가 뭐 사람 칭가 직일끼가 우짤 기고. 세상 돌아가는 거, 어이 세상이 히뜩 디비져야지. 완전 디비져야지 이래가는 이거 사람 산다고 할 수도 없고. 이거 참말로마 저 정치하는 사람 보믄 첫째로 문제다. 그런 식으로 해가는 우리가 볼 적에 높은 사람들 마카다 끄내리야지 나둬가 안 되는 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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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끝나고 집을 나서니 이차연 할머니가 마당까지 배웅하러 나왔다. 마당에는 이제는 비어 있는 축사가 있고, 화분 몇 개에 푸성귀나 상추 따위의 채소가 얼마간 심겨 있다. 할머니는 거기에 당신이 먹을 만큼의 채소를 심는다고 한다.

밭은 줄이더라도, 이제 혼자 산다고 해서 가족과 함께 살았던 집마저 줄일 수는 없다. 혼자 살기에는 커 쓸쓸해 보이는 집. 그 집 작은 구석마다 먼저 떠나보낸 작은 손자와 남편의 기억이 녹아 있을 것이다.

할머니에게 옛날 사진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의도치 않게 백혈병으로 먼저 간 작은손자의 사진을 본 할머니는 눈시울을 붉혔다. 손자를 가슴에 묻어 두셔서 손자가 생각 날 때마다 가슴이 아픈지도 모르겠다. 그 기억이 소중해 쉽게 잊을 수 없는 만큼, 기억이 녹아있는 이 공간도 더없이 소중할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