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평리 주민 인터뷰를 수차례 진행하다 보니 모종의 감이 생겼다. 주민 집에 도착해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으며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지 대략적인 느낌이 오게 된 것이다.

이은주(47) 씨의 경우도 그렇다. 은주 씨의 집터에 들어서는 순간 잡초의 생명력처럼 경이로울 정도의 생활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들과는 다소 떨어진 주택에는 사과밭과 복숭아밭이 펼쳐져 있다. 강아지를 두 마리와 함께 살며, 과수원 한편의 텃밭에서는 상추와 씀바귀 등 각종 채소도 기르고 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며, 11살 쌍둥이 남매까지 키우고 있다.

이만 해도 벅찰 법하지만, 은주 씨는 삼평리의 송전탑 반대 투쟁 초기부터 근 5년간 투쟁의 전면에 나서기도 했다. 인터뷰를 위해 자리에 앉자 은주 씨는 곧바로 송전탑 투쟁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웠다. 삶의 화두가 송전탑 반대 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송전탑 반대 투쟁에서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는 조건이기도 했다. 대학도 졸업했고, 연령대가 높은 다른 주민들에 비해 은주 씨는 젊었다. 다년간 투쟁의 전면에 나섰기 때문인지, 은주 씨는 여느 단체의 활동가나 실무자 못지않게 괄괄하면서도 꼼꼼했다.

하지만 타고난 성격은 지금과는 거리가 멀었다. 삼평리로 귀농하기 전, 은주 씨는 그저 꽃을 좋아하는 평범한 소녀였다. 86학번으로, 대학 시절 1987년 6월 항쟁을 겪고 격변의 시절을 보냈지만 은주 씨는 그 시절 그 흔한 데모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다.

Next

제가 이렇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죠

86학번이에요. 그런데 그때는 여학교라 그런지 몰라도 학내 분위기는 조용했어요. 데모도 별로 없었고. 당시 학생운동 그런 쪽에 대한 의식이 없었죠.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으니까. 왜 서클이 있으면 거기서라도 어떤 얘기라도 듣고 했을 건데 학교에서 나는 우리 단대에만 딱 있었으니까요. 그때는 제가 이렇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죠.

졸업하고도 저는 그냥 평범한 가정주부였어요. 직장생활도 크게 오래 하지도 않았어요. 90년도에 졸업하고 그냥 작은 사업 좀 하다가 결혼하고 꽃집을 좀 했죠. 제 전공이 그쪽이었거든요. 꽃집도 하다 보니 잘 안됐어요. 꽃집 하는 것도 사업이지 장사는 아니에요. 영업을 뛰어야 하더라고요. 화환 하는 게 영업이에요.

결혼하고는 대구에서 일 할 때는 애기 아빠 일도 IMF 터지고 해서 힘들어지니까, 애들 교육도 그렇고 시골 가서 인성적인 교육도 해보고 싶고 했어요. 우리 애들에게 좋은 공기 마시게 하고 운동장에서 뛰놀면서 키워보고 싶었어요. 또 마침 이곳(삼평리)에 땅이 있어서 귀농했죠. 초반에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애기 아빠(빈기수 씨)은 건축업을 했고, 저는 전공을 했지만 생활은 또 다르잖아요. 성격도 많이 바뀌었어요. 지금 보면 좀 괄괄하지만, 나 진짜 조용한 사람이었거든요. 학생 때도 그랬고 어디 잘 안 나갔어요. 당시에도 학교랑 집밖에는 몰랐고. 대구 살적에도 주택에만 있고 친구들 동창모임이나 가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여기 시골에 딱 들어오니까 아무도 내를 안 찾아줘. 마을이랑 집도 조금 떨어져 있고. 내 또래도 없고 전부 나보다 10살 이상씩은 되니까 아무래도 어렵죠.

귀농을 처음 시작했으면 내가 모르는 게 많으니까 많이 배워야 하는데 누가 와가지고 선뜻 알려주진 않거든요. 그래서 내가 “콩은 언제 심어야 돼요? 옥수수는 언제 심어요?”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물어봐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밖으로 나가게 되는 거예요. 집 근처에 이어댁(이억조) 할머니 밭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어댁 할머니하고 제일 먼저 알게 되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를 내놓게 되더라구요. 외향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죠. 연고도 없고, 살아야 하니까. 시골은 사람을 잘 품어줄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아니에요. 정말 배타적이에요. 잘난 척도 하면 안 되고, 끼어들어서 뭐든지 열심히 하려고 해야 사람들이 “아, 젊은 사람이 그래도 시내에서 와가지고 좀 열심히 하려는구나” 싶어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거죠.

농사짓기 쉽지 않죠. 혼자서 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내가 남 집 일을 안 해주면 남도 내 일을 안 해주거든요. 품앗이해야 돼요. 이어댁 할머니 통해서 배웠죠. 내 경우는 일을 잘 못 해도 젊다는 그것 하나가 무기였죠. 그래 내가 먼저 품앗이하고. 내가 바쁘다고 우리 집에 먼저 오란 소리 못해요. 내가 몇 집 다니고 동네 일 돌아가는 거를 물어보는 거죠. 언제 누구 집 가는지 확인하고 그 사이 비는 시간을 우리 집에 오시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복숭아와 사과 농사를 하는데, 복숭아는 따는 시기를 잘 맞춰야 하거든요. 제때 안 따면 다 흘려버려요. 복숭아는 새벽 4시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따야 해서 식구끼리 해야 하고. 그래 고생했죠. 그런데 처음에 고생하다가 익숙해지고 농사를 좀 알겠다 싶으니 송전탑이 들어온다 하더라고요. 사실 우리 집 피해는 적은 편이긴 해요. 그렇다고 다른 집들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죠. 우리가 제일 젊고, 눈과 귀가 밝잖아요. 뭐든 빨리 들을 수 있고 자료를 찾을 수도 있고.

Next

엉터리 주민설명회, 시골사람이라고 무시하는 거죠

2009년 3월에 송전탑 들어온다는 걸 알았어요. 마을 회관에 주민 모여있는데 한전이 뭐 사 들고 찾아왔어요. 그 자리에서 공사하러 오겠다고 했어요. 공사 시작설명회였어요. 당연히 그때 마을 주민들은 모두 반대했죠. 다 나서긴 어려우니 대표를 몇 꾸린 것이 반대추진위원회예요.

앞서 주민설명회가 있긴 했죠. 2006년 1월 11일에 각북면사무소에서 환경영향평가에 대한 주민설명회를 했는데, 삼평리 주민도 몇몇 참석했더라고요. 그런데 시골이 그렇잖아요. 설명회를 한다고 345kV 송전탑이 얼마나 피해 된다던지 설명해줘도 알기 힘든데 그런 설명은 전혀 안 하잖아요. 시골 어른들은 그런 설명은 잘 모르거든요. 그런데 또 추후에 11년도인가 12년도인가에 한전에서 주민설명회 자료를 줬는데, 그거랑 당시 주민설명회 자료랑 달라요. 주민설명회 당시 자료에는 송전선로가 우리 마을을 지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한전에 물어보니 당시 담당 차장이 “3차원 영상으로 찍다 보니까 글씨가 오르락내리락해서 선로 도면이 그렇게 됐다”고 하는 거예요. 시골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거죠. 그 말이 맞다 해도 설명회 때 부실한 자료를 가져온 셈이고. 이때 자료를 정보공개 신청해도 모두 비공개래요. 국회의원이 청구하면 자료가 가긴 하는데, 그 자료는 주민이 받은 자료와는 다른 자료예요. 복사본만 주고 원본은 없어요. 한전에서 수정한 자료를 준거죠.

청도를 지나는 송전선로(345kV 북경남 제1분기)도 밀양 못지않게 심각해요. 여기는 345kV이긴 해도 풍각, 각북 두 개 면에 40기가 서요. 밀양은 5개 면에 69개고. 아주 촘촘히 들어서는 거죠. 1분기 중에서도 가장 피해가 심한 곳이 삼평리예요. 60가구가 살거든요. 그래서 풍각에 송전탑이 들어설 때도 우리 삼평리에서 제일 먼저 달려가서 막았어요. 그런데 2010년도 10월 달에 풍각은 대부분 한전과 협상을 했죠. 그래도 삼평리는 빠졌어요. 너무 피해가 심하니까.

삼평리는 마을에서 다 함께 반대했는데 2010년도 10월경 풍각이 협상할 당시 우리 마을도 회의했죠. 거기서 마을 발전기금 1억 7천 준다는 거 필요 없고, 계속 반대하면서 지금 우리가 요구하는 것처럼 지중화를 요구하자고 그때 결정한 거예요.

마을 사람 거의 다가 피해자

2012년 4월 중순부터 삼평리에 22호, 24호 송전탑 공사가 시작됐어요. 그때 우리 마을 주민 한 50명이 가서 아침부터 포클레인 들어오는 거 막았어요. 그러니 경찰도 그렇고 한전도 그렇고 공사를 막으면 이제 손해배상청구가 들어갈 것이다면서 그런 식으로 협박하는 거죠. 밑에서 지키고 있으니 불법으로 헬기 작업도 하는 거예요, 22호기 저기를. 그래 할머니들이 산으로 올라가게 됐어요 그때. 할머니들이 포클레인 바가지에 앉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또 경찰들이 이렇게 하면은 손해배상 들어온다고 협박하니 그때부터 한 사람 두 사람 떨어지게 됐어요. 싸움이 힘들기도 했고. 또 이장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되는데 당시 이장(박재근)은 얼굴만 비치는 거였고. 벌금도 많이 맞았고.

그래도 마을 회의에서 투표했는데 계속 싸우기로 결과가 나왔어요. 당시 이장이 가구당 한 표로 하자고 주장해서 했는데, 29가구 중 24가구가 반대하기로 한 거예요. 그런데 이장이 하는 말이 이게 공개가 되면 마을에 큰 분란이 생긴다며 택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투표용지를 다 집에 들고 갔어요. 결과에 안 따르는 거죠. 그러면서 사람은 점점 떨어지고 경찰이 또 회관에 와서 하는 말이 이렇게 반대를 하면은 할머니들이 벌금 맞고 그 돈을 안 갚으면 할머니가 감옥에 가는 게 아니고 아들, 손자 때까지 그 벌금을 갚아줘야 된다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경찰도 한전 편이라 그러지. 할머니들은 경찰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먹힐 수밖에 없죠. 왜냐면 경찰이 법인데.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가 아니라, 마을 사람 거의 다가 피해자인 거죠. 한전에서는 이제 마을을 인제 이간질하고 골을 깊게 만들어가는 게 자기들 전략이니까. 일부 몇몇 사람들만 꼬드기면 마을 주민들은 따라가거든요. 그래서 난 우리 할머니들한테 고마운 게 뭐냐면, 그때 당시에 내가 부녀회장이긴 했지만, 내가 내 생각으로 내 올바른 길을 가지마는 할머니 입장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는데 할머니들이 김춘화 아줌마랑 내가 가는 길을 같이 발맞춰 줬는거죠. 할머니들도 방관자가 될 수가 있는 거잖아요.

우리 마을 주민들한테 안타까운 거는 앞에 정말 돈에 눈이 어두운 몇 사람이 하는 대로 맞춰서 따라가는 거죠. 우리 부부가 젊어서 앞에 나서니 한전에서 우리한테도 여러 가지 손이 많이 들어왔어요. 한전에서 우리 집에 찾아와서 “앞에서 고생한 거 아니까, 다 생각해줄 테니까 할머니들 데모 못 하게 해 주세요”라는 소리도 했고. 돈을 주겠다 그런 말은 안 했지만 말 중에 다 그런 뜻이 나오잖아요. 그래도 우리는 아니라고, 할머니들이 스스로 손을 놓지 않는 이상은 할머니하고 같이 간다고 했죠. 그러니까 한전에서는 우리가 안 하면 마을 이장이나 노인회장한테 시키겠다는 거예요. 할머니들 데모 못 하게. 우리는 못한다고 했죠.

이런저런 회유 협박에도 끝까지 싸우는 할머니들이 참 대단하죠. 존경스럽죠. 남자들은 사회생활을 하잖아요. 이장 같은 경우는 일단은 자기들끼리는 준공무원이라고 하거든요. 나라 월급을 받으니. 관계가 이래저래 있다 보면 안면 받힌다고. 시골이 더 그렇잖아요. 알게 모르게 압력받는 거죠. 또 남자들은 강하지 않아요. 근본적으로. 여러 가지 채면 치레도 많이 해야 되고. 그런데 여자들은 나가가 만날 사람도 없고 그렇잖아요. 강하잖아. 그죠. 거슬릴 게 없잖아요.

Next

연대도 일종의 품앗이죠

저는 송전탑 싸움하면서 많이 바뀌었어요. 성질도 많이 생겼고, 싸우다 보니. 물론 내 내면에 그런 게 있었겠지만 이래 송전탑이 없었으면 내 내면의 성격이 안 나올 수도 있었는데. 이런 모습 스스로 보면 별로 좋진 않아요. 그냥 순한 사람으로 갔으면 된 거를 독한 사람으로 만들었죠. 별로 안 좋지.

저 같은 경우는 솔직히 싸움 시작할 때에는 여기까지 올 줄도 몰랐어요. 오면서 보니 점점 더 잘못된 걸 더 많이 알게 되고, 나를 필요로 하기도 했고. 개인적으로만 보자면 나 몰라라 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내 애들이 아직 어리니까, 내 애들이 좀 더 지금보다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었으면 했어요. 요만한 바늘구멍이지만 이거라도 뚫어보고 싶었어요.

싸움하면서 좋았던 것도 있어요. 여기 연대하러 오는 분들 만난 거죠. 정말 내가 평생에 이런 분들이 있다는 거 자체를 몰랐을 거예요. 송전탑 저거는 때려죽여야 될 거지만 저거 때문에 내가 이래 정말 세상에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내 일같이 어려운, 어두운 곳만 찾아다니면서 해주는 분들이 이렇게 많다는 거를 안 거는 좋죠. 놀랐어요. 내가 학교 다닐 때 운동권에 있었으면 이런 경험을 할 수도 있었을 거지만 그런 것도 없었으니까,

연대도 일종의 품앗이죠. 여러 사람이 도와주러 오면 우리도 어려운 데를 가야 되잖아요. 그게 품앗이, 진짜 품앗이거든요. 우리가 정말 2012년도 4월 15일 공사 당시 KBS, MBC, TBC, 신문에 막 전화 다 했어요. 취재 좀 와달라고. 정말 이거는 우리가 딱 갇혀있는 거예요. 우물 안에 가둬놓고 우리를 밟아 죽일 그런 느낌이었으니까. 누구 한 사람이라도 방송국에서 오면 억울한 거를 알릴 수 있는데 아무도 안 왔어요. 나중에 정수근 국장(대구환경운동연합)님이 오고 하면서 우리는 정말 진짜 큰 힘을 받았죠. 그래 우리 그때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거든요. 아, 우리 얘기를 다른 사람이 알고 있다는 느낌. 지금도 손님이 많이 오면 힘들긴 하지만 기분은 정말 좋아요.

-송전탑의 근본적 문제는 뭐라고 생각하나요?

여기 시골 사람들, 정말 보면 가스 불에 보리차 끓이는 것도 아까워하면서 살았어요. 그런 사람들이 모은 재산이에요. 우리가 모은 이런 재산이랑 비교가 안 되는 거죠. 그렇게 모은 재산과 땅인데, 그런 모든 피해와 책임을 시골 사람들한테 고스란히 떠안기는 거잖아요. 나라가 떠안기는 거잖아요.

아무리 국책 사업이라도 필요성이 충분하게 입증돼야 하는 거고, 직접 피해를 받는 사람들의 의견도 충분히 듣고 가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 게 전혀 없잖아요. 자기네들 이익만 따지는 거잖아요.

싸움하면서 탈핵에 관심도 생겼어요. 김익중(『한국 탈핵』저자, 동국대) 교수 강연도 찾아가고. 송전탑 반대가 탈핵과도 연관이 있는 거고. 전에는 원자력 발전소가 몇 개 있는지 그런 것도 몰랐지. 싸움하면서 점점 알게 되니까 이게 너무나 위험한 건데, 아주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죠.

싸우는 건 저희가 귀농 한 이유와도 상관이 있어요. 우리 애들은 4살부터 여기서 살았으니 고향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애들 위해서 이곳으로 왔는데, 그런데 나중에 세월이 흘러서 마을에 사람이 없어지면, 우리도 여기 오래 못 있고 나가야 되는 거잖아요. 고향을 잃는 거잖아요. 젊은 사람이 계속 들어오고 마을이 점점 좋아져야 하는데 그렇게 안 되잖아요. 송전탑이 여기서면 아무 의미 없게 되는 거죠.

Next

학창시절에는 집과 학교만 오갔고 졸업 후에는 꽃집을 하던 은주 씨. 그런 은주 씨가 농촌에 들어와 부닥치며 품앗이를 배웠고, 송전탑 반대 싸움을 지속하며 연대라는 것을 배웠다.

나는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덮쳤을 때, 사민당을, 노조를, 유대인을 덮쳤을 때 내가 침묵했고 결국 나를 위해 말할 사람도 없어졌다”고 한 마틴 니뮐러의 시가 생각났다.

농성장을 찾는 여러 사람을 보며, 또 전국의 투쟁현장 곳곳을 누비며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려 하는 은주 씨와 삼평리 할머니들을 본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이야기는 비극일까, 희극일까?